산상수훈 강해(18)
너희는 기도할 때에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태복음 6장 5∼8절 -
어느 목사님이 “신앙생활하면서 특별히 어렵다고 느끼는 것이 어떤 것이 있습니까?”고 성도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놀랍게도 많은 분들이 기도가 어렵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기도가 제일 힘들어요. 1분만 기도하고 나면 할 말이 없어요. 기도를 꼭 해야 됩니까?”
사람들은 위급할 때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고 하면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서 사는 아주 미천한 존재입니다. 공간과 시간의 제약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존재인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만져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들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아야 알 수 있고, 들어야 깨닫고, 손으로 만져야 느끼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눈을 감고 있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손을 휘둘러 봐도 잡히는 것도 없습니다. 들리는 음성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 기도가 어렵다 보니 잘못된 기도를 하는 일들이 자주 발생하곤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나라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기도를 하기는 하는데 바른 기도를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읽은 이 성경 말씀이 바로 유대 사람들이 잘못하고 있는 기도를 지적하고, 무엇이 참된 기도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기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귀중한 일입니다. 성경을 펴놓고 읽다가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은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모습 중에 하나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집중하는 시간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고상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영혼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권 중에 특권입니다. 영혼이 없는 동물들과 달리 사람 안에는 신을 찾는 마음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변화하는 세상에서 눈을 돌려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유대 랍비들은 기도를 모든 덕 중에서 가장 높은 덕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하는 일보다 더 귀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언제든지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가서 필요한 것을 구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가장 귀중한 특권을 사용하지 않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보통 때보다 바쁜 날을 맞이할 때에, 그리고 몹시 분주하여서 기도할 시간이 거의 없다고 생각될 때에 우리는 마틴 루터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에게는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에 날마다 세 시간을 기도하지 않고서는 모든 일을 잘 해나갈 수가 없습니다.”
1.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드리는 기도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를 지적하셨습니다.
그 첫째가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린다고 하면서 실상은 사람에게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에게 기도를 하느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실제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5절을 읽어 보십시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유대교 지도자들은 일찍부터 기도의 중요성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좀 더 철저하게 가르치고, 또 기도를 더 잘하도록 하기 위해 그 방법을 궁리하면서 열심을 지나치게 많이 낸 덕분에 이상한 방향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할 때 내용과 형식, 시간까지 모두 규격화 시켰습니다. 즉 의식화시켰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하나마다 제품을 만들듯이 기도도 형식화되었고, 규격화되었습니다. 슬픈 때 드리는 기도문, 기쁠 때 드리는 기도문, 여행할 때 드리는 기도문 등 일상사에 해당되는 기도를 만들어서 그대로 외우도록 한 것입니다. 심지어 아침에, 식사 전에, 식사 후에, 취침시간에 드리는 기도를 만들어 놓고 그대로 기도하게 했습니다. 더구나 시간까지 오전 9시, 정오, 그리고 오후 3시를 기도 시간으로 정했습니다. 이렇게 그들 나름대로는 완벽하게 틀을 짜놓고 열심히 기도 했지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참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일부러 기도시간이 가까워 오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시장 바닥이나 회당거리, 아니면 큰 도시 모퉁이에 서서 기다리다가 기도시간이 되면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형식적으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외식하는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외식’은 ‘가면을 쓰고 연기한다’, 즉 ‘쇼를 부린다’는 말입니다.
훌륭한 배우들은 기쁘지 않아도 미소를 지을 수 있고, 또 슬프지 않아도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 익숙한 배우처럼 날마다 사람들의 칭찬과 종교를 위해 종교적인 연극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많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칭찬을 위해 하는 기도는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람 앞에 기도하고, 사람보고 기도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기도는 이렇게 형식적이고, 외식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2.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어떻게 이러한 외식의 기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골방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6절을 읽어 보십시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하게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골방(ταμιειον, 타메이온)’이라는 말의 어원은 “자르다”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골방’(ταμιειον, 타메이온)은 “창고, 침실, 밀실”을 말합니다.
세상과 단절하고 오직 하나님과만 은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골방입니다.
창문도 없고 문만 닫으면 외부와 완전히 단절 되는 곳이 골방입니다.
누가 그 속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릅니다.
세상 모든 것과 단절하고 오직 하나님과만 은밀(隱密)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골방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기도할 때에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기도를 하게 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을 의식하기 쉽습니다. 또 사람들이 있는 곳이나 소음이 있는 곳에서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나 소음의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해서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골방에서 은밀하게 기도하라’는 말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만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는 사람이나 환경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께만 모든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 음성을 듣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이사야 38장에 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죽게 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 위기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그는 방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있는 방의 벽을 향하여 오직 하나님 앞에서 앉아서 울며 기도했습니다. <은밀한 기도의 골방>을 마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가운데 히스기야를 보셨습니다. 그의 마음 중심을 보셨습니다. 은밀하게 기도하는 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15년이나 그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은밀한 기도에는 이처럼 능력이 있습니다. 골방의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날마다 새로운 힘을 공급받고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골방에서 은밀하게 기도하라’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만남을 소중히 생각하는 그런 장소를 택하라는 것입니다.
세상과 단절하고 오직 하나님과만 은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골방’을 갖는다는 것은 주를 갈망하고 주를 구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재능과 선택된 시간을 드리면서 어느 곳, 어느 때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밀한 골방은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과 차단된 어떤 장소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구하고 기도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홀로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골방은 차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서재가 골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방이 골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산에 오르는 오솔길이 은밀한 골방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그 곳, 그 시간이 은밀한 기도의 골방입니다.
주님께서는 은밀한 곳에 계시며, 은밀한 곳을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화려한 왕궁에서 태어나시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메시야는 잘 알려진 예루살렘이나 왕궁, 좋은 가문, 당시의 권력자나 서기관이나 제사장 가운데, 사람들이 들끓는 시끌법적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한적하기가 짝이 없던 베들레헴 한 촌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것도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숨어 계십니다.
하나님은 숨어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십니다.
사람들이 다 잘 알고 있는 곳이 아닌 은밀한 곳,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그러한 곳에 계시며 그러한 곳을 찾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권력과 부귀와 인기를 한 몸에 모으고 있었던 아합왕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합과 이세벨에게 쫒기며 죽음의 그림자를 안고 살아야했던 엘리야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어서 절망 가운데 있는 엘리야! 기껏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약간의 떡과 물에 의지해야 했던 엘리야와 하나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흉년을 만나서 먹을 것이 없어서 아들과 더불어 마지막 떡 하나를 만들어 먹고 죽음을 기다려는 처절하게 불쌍한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을 위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람나라의 군대장관 나아만에게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나아만의 아내 계집종과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람나라의 큰 강 바르발이나 아마나 강에 함께 하셨던 것이 아니라 작고 보잘 것 없는 요단강에 함께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좀 더 은밀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있을 곳은 화려한 곳, 사람이 들끓는 곳이 아니라 혼자서 고독하고 외롭고, 죽음이 우리 가까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서 천국의 복을 말씀하실 때 “마음이 가난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독한 사람, 마음이 아픈 사람, 절망하는 사람, 그래서 마음이 여릴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찾아오십니다.
마음을 낮추십시오.
마음을 비우십시오.
하나님과 기도의 골방을 갖기 위해 은밀한 분위기를 만드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장 약할 그 때, 내면적으로 가장 외롭고 고독할 그 때, 아무도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혼자라는 생각을 가질 그 때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3.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 골방에서 어떻게 기도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중언부언(重言復言,βαττολογησητε,밧톨로게오)이라는 말은 원래 ‘말을 더듬거나 헛된 반복을 하다’는 단어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여기서는 “생각없이 말을 계속 반복하다”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이 단어는 이방인들이 행하는 주문(呪文)과도 같은 것입니다.
열왕기상 18장에는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들이 1대 450으로 대결을 벌였던 갈멜산상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아침부터 낮까지 자기들이 믿는 신(神)의 이름인 “바알”을 계속 부르며, 단 주위를 뛰놀거나, 칼과 창으로 자기 몸에 상처를 냅니다.
이처럼 부르는 내용도 인격적인 교제도 없는 기도가 바로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기도할 때 전혀 반복적으로 기도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밤새도록 같은 내용을 반복해도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잡히시기 전날 밤 온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습니다.
그 때 반복적으로 같은 내용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합당한 기도입니다.
마땅히 드려야할 기도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지적하시고자 하신 것은 아버지와 아들 즉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간 사이에 있어야 하는 인격적 대화의 상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기서 아주 중요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다 아시면서 기도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기도는 하나님이 잘 알지 못하시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르기 때문에 내가 계속 말을 해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고 또 하나님께서 알 수 있도록 설득시킨다고 하면 그것은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이 모르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다 헤아리고 계십니다.
태초부터 마지막까지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에 무슨 슬픔이 있는지 아십니다.
내 안에 있는 상처가 무엇인지 아십니다.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아십니다.
기도는 내가 말을 많이 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는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는 오히려 거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것을 주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선한 것을 다 우리에게 안겨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어떻게 해야 이 좋은 것을 받아서 제대로 누릴 수 있도록 할까?' 이것이 하나님의 고민입니다.
바른 기도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산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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