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인권평화운동가이자 해비타트운동 그리고 평생을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장례식이 지난 9일 워싱턴 국립대성당에서 엄수됐습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추도사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의 신앙을 언급하면서 “지미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바라는 것들의 실체이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로서의 신앙”이라고 밝혔습니다.
특히 바이든 대통령은 “성경의 계명에 근거한 신앙: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고 네 영혼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말하기는 쉽지만, 행하기는 매우, 매우 어렵다."며 그런데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그 계명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포드 전 대통령이 생전에 써놓은 추도사를 포드의 아들이 읽었는데, 그 추모사에서 포드는 “정직과 진실함은 지미 카터라는 이름과 동의어였다. 지미 카터에게 정직은 그저 이상적 목표가 아니라 그의 영혼 자체였다”고 했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의 손자이자 카터센터 이사회 의장인 제이슨 카터는 할아버지를 “공적 삶과 사적 삶 사이의 차이가 없었던 인물”로 회상하며, “그의 정직함은 곧 사랑으로 이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카터 대통령 시절 유엔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의원인 앤드류 영 목사는 카터를 "기적과도 같은 존재"라고 부르며 카터가 해군사관학교에 등록했을 때, 자신의 룸메이트를 그 학교의 흑인 사관후보생으로 요청했다. 그것이 카터를 진정으로 위대한 대통령으로 만든 예민함과 영성이었다. 제임스 얼 카터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였다. 지미 카터는 위대한 미국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된 축복이었다. 그는 떠났을지 몰라도 멀리 가지 않았다"고 추모했습니다.
지미 카터(Jimmy Carter)는 미국 39대 대통령으로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재임한 민주당 소속의 대통령으로 2024년12월 29일 고향 조지아주 자택에서 100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습니다.
지미 카터는 본래 "제임스 얼 카터 주니어(James Earl Carter Jr.)"라는 풀네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 대중들을 대상으로는 애칭인 지미(Jimmy)를 써서 통칭 "지미 카터"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지미 카터는 서명을 하거나 선서를 할 때도 이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지미 카터는 역대 민주당 소속 대통령 중 유일하게 재선에 도전했음에도 단임으로 그친 대통령 가운데 한 명입니다.
1976년 대통령 선거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수렁에 빠진 공화당을 꺾고 8년 만에 민주당 정권 재창출을 이루었고, 재임 중 도덕주의 외교, 볼커 쿠데타라 불리는 연준의 초고금리 정책, 가정폭력청 및 연방 교육부 신설, 캠프 데이비드 협정 등 업적을 남겼습니다.
지미 카터의 정치력 능력에 대한 평가는 좋지 못했습니다.
1933~1995년 미국 의회는 거의 모든 기간 동안 민주당이 제1야당 자리를 독식했습니다.
카터 집권 초기 민주당은 그야말로 하원 의석의 개헌선(2/3)까지 넘긴 거대 여당이었습니다.
카터는 마음만 먹으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카터는 부족한 정치 경험으로 재임 기간 내내 여당 민주당이 통제하는 의회와 갈등을 빚어 그 권력도 제대로 써먹지 못했고, 미숙한 인사 처리로 인하여 백악관 내에서도 권한 분쟁이 잇따랐습니다.
카터는 본인의 부족한 정치 경험으로 인해 러닝메이트였던 월터 먼데일 부통령에게 여러모로 컨설팅도 받고 많은 권한을 위임했는데, 이것이 현대 미국 부통령의 권한과 역할의 시초가 되는 매우 큰 정치사적 영향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퇴임 이후에는 "사랑의 집짓기(해비타트, Habitat for Humanity)" 등 여러 자선활동에 참여하고 비공식적인 외교 활동으로 세계 평화를 도모하는 등의 행보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이에 대한 공로로 2002년 전직 대통령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를 두고 지미 카터를 "최고의 전직 대통령"이라고 농담삼아 부르기도 합니다.
카터는 2024년 12월까지 생존함으로써 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100세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퇴임 후 지내는 시간이 가장 길었던 (43년) 전직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카터는 호스피스 간호를 받던 고향 조지아주 플레인스의 자택에서 사망하며 향년 100세 89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카터는 1924년 대공황 시대에 흑인 소작인과 그들의 자녀들 사이에서 가족 농장에서 함께 일하고 놀며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핫샷(Hot Shot)'으로 불렸던 이른바 '땅콩 농부'는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으로 백악관을 떠난 지 21년 만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카터는 200년노벨평화상 수상식에서 "우리의 공통된 인류애의 유대는 우리의 두려움과 편견의 분열보다 더 강하다"고 말했습니다.
카터는 평생을 교회학교 교사로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친 순수한 삶을 살았습니다.
카터의 신앙을 강조하는 것을 포함하여 사랑, 기도, 신앙에 대한 6가지 영감을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 "나는 한 번의 인생과 그것을 무언가에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는 한 번의 기회가 있습니다... 제 신앙은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제가 어디에 있든, 할 수 있을 때마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할 것을 요구합니다.“
2. "사람은 완전한 아가페(Agape / 자기 희생적 사랑)를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회에 기대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은 단순한 정의를 제정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은 나의 개인적인 하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 삶을 보호해 주시거나, 나를 곤경으로부터 지켜 주시거나, 내 개인적인 욕망을 충족시켜 주시거나, 나의 성공을 보장해 주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제게 위로와 확신과 만족과 용기와 희망과 평안을 주십니다.“
4. "하나님은 항상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가끔은 '그래. ' 때때로 대답은 '아니오. 가끔은 '기다려.'“
5. "우리는 오늘 오후에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처럼 삶을 살아야 합니다.“
6.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는 그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장28절) 나는 많은 여성을 욕정으로 바라 보았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여러 번 간음을 범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할 것을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 그리고 저는 그것을 했습니다 –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에 대해 저를 용서하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사람뿐만 아니라 아내를 버리고 혼외 자식과 동거하는 사람을 비난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지미 카터, 세상에서 가장 망치질 잘하는 할아버지
사랑의 집짓기 운동
해비타드(Habitat for Humanity)
카터가 해비타트(Habitat for Humanity)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재선 시도에서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배하고 대통령직을 물러난 이듬해인 1982년부터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원봉사자로서 연장을 들고 나선 것은 1984년부터입니다.
그때부터 그는 매년 최소 일주일은 해비타트 집짓기 현장에서 자원봉사를 하기로 약속했고 이를 계기로 지미카터특별건축사업(Jimmy Carter Work Project:JCWP)이 시작되었습니다.
JCWP는 해마다 미국 본토와 외국을 번갈아가며 카터 대통령 내외의 선도로 1주일 동안 치러지는 대규모 초단기 건축프로젝트입니다. 주택문제가 해결되어야 경제, 교육, 건강, 문화 등 모든 면에서 가정이 제대로 유지되고 전체 사회도 번영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저소득 가정의 주택문제 해결을 위해 세계적으로 활동을 펼치는 해비타트 운동에 그는 깊이 공감하고 적극 동참키로 한 것입니다.
1984년 최초의 JCWP는 뉴욕시에서 실시되었습니다.
당시 열아홉 가정이 살고 있는 6층짜리 건물을 개량하는 공사였습니다.
해비타트는 새 집을 짓는 것 외에도 낡은 집을 고치거나 리모델링도 합니다.
이때 카터는 다른 봉사자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뉴욕에 갔고 잠도 교회당 바닥에서 다른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간이침대에서 잤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교회에 딱 하나 있는 조용한 침실에서 카터 내외가 주무시라고 권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갓 결혼한 부부에게 그 방을 양보했습니다.
그는 한국에 와서도 특별대우 받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집짓기를 하다가 식사 시간이 되면 다른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식판을 들고 줄을 선 다음 자기 차례가 와야 배급을 받곤 했습니다.
한국해비타트 윤형주 이사장은 "2001년 한국에서 건축봉사하던 카터 전 대통령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망치질을 잘하는 할아버지"였다며 "평화와 봉사의 가치를 몸소 실천한 그의 삶은 진정한 리더십의 모델"이라고 회고했습니다.
1976년 미국에서 시작한 해비타트는 전세계 70여 개 국가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5900만 명의 주거취약이웃의 주거환경을 개선했고 89만 5000명 이상의 자원봉사자가 해비타트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카터 대통령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 집안의 땅콩농장에 있는 대장간에서 농부인 아버지를 도우면서 공구를 다루는 일을 익혔습니다.
시집을 포함하여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한 글쓰기 및 그림 그리기와 더불어 목공 일은 그의 중요한 취미활동이었습니다.
카터는 여러 종류의 가구를 만들어 자손과 친지들에게 선물하거나 자선경매에도 내어놓아 모금을 돕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지미 카터는 ‘훌륭한 전직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대통령이 되었던 사람’이라고들 말합니다.
사실 그는 대통령 재임기간보다 퇴임한 후에 국내외적으로 더욱 더 많은 관심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해비타트를 통한 집짓기 자원봉사 활동이 일반대중들에게는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모습이긴 합니다.
그러나 재임시에 있었던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베긴 이스라엘 수상과의 회담 주선을 비롯하여, 퇴임후 김대중 대통령 구명운동, 북한 핵 위기 해소를 위한 김일성 주석 면담, 우간다와 수단의 평화협정 중재, 그리고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노사분쟁 중재에 이르기까지 평화를 위한 그의 노력은 광범위하고 꾸준합니다.
이런 활동들은 누가 시켜서 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고 인류를 위한 문자 그대로의 자원봉사였습니다.
2002년 그에게 수여된 노벨평화상의 선정 사유처럼 그는 ‘평생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 민주주의와 인권 증진·경제·사회 발전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에 헌신’함으로써 최고의 자원봉사자가 된 것이니다.
이렇게 옳은 생각, 좋은 일을 해온 카터를 세상은 존경하고 있습니다.
“나는 빨리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에게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죽음에 대해 적절한 태도를 갖도록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죽음에 대해 절대적이고 완벽하게 편안함을 갖게 됐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더 이상 제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가족과 카터 센터에서 했던 일,
주일학교에서의 아이들을 가르쳤던 일 등 저를 기쁘게 했던 일들은 그리울 겁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주일학교 교사를 하나님이 주신 평생 사명으로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선거 바로 하루 전날도 모든 유세 일정을 취소하고 교사로서의 책무를 다했습니다.
2015년, 90세의 고령에 뇌와 간에 암세포가 발견돼 투병 중이었을 때도 말씀 전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평안!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 디모데후서 4장7∼8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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