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153)-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가족사랑 2024. 4. 25. 06:44

로마서 강해(153)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 로마서 16장23절 -

 

에라스도(Erastus, Ἔραστος) 비문 이야기 

 

- 에라스도의 비문 -

 

티투스 케네디(Titus Kennedy) 박사는 "성경의 발굴 : 성경에 생명을 불어넣는 101가지 고고학적 발견(Unearthing the Bible: 101 Archaeological Discoveries that Bring the Bible to Life)"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고고학적 발견들이 성경의 특정 인물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더라도, 당시에 사용된 이름들을 확인하여, 성경 기록의 시대적 정확성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고학적 증거들이 성경적 기록과 일치하는 경우를 여러 발굴 사례들을 들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케네디 박사는 이 책에서 101개의 고고학적 발견들을 이야기하면서 성경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는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오늘 읽은 성경 로마서 16장23절에 나오는 재무관 에라스도(Erastus)라는 이름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을 보면 에라스도는 시 재무관이었습니다.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또한 사도행전 29장에 보면 에라스도는 바울의 선교사역에 중심에 있으면서 디모데와 사역을 함께 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사도행전 19장2122절)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디모데후서 4장20 21절 )

우리는 보통 에라스도에 대해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그러나 케네디 박사는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에라스의 이름에 주목했습니다.

 

1929년 고고학자들이 고린도를 발굴 하던 중 고린도 극장 북동쪽 포장된 지면에서 에라스도의 이름이 새겨진 비문을 발견했습니다.

이 비문은 대략 1세기 중엽의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이 비문은 라틴어 비문이었습니다.

 [ERASTVS. PRO. AED. S. P. STRAVIT] 

이 비문을 풀어쓰면 [ERASTUS PRO AEDILITATE SUA PECUNIA STRAVIT]입니.

"조영관 직책의 보답으로 에라스투스가 자신의 비용으로 이것을 포장하다"란 의미입니다.

여기서 사용한 조영관(Aedile)은 로마의 고위직 직책명으로 일반적으로 공공건물, 도로, 곡식 수급을 담당하였습니다.

발견된 이 비문은 "재정담당(aedileship, 감독)인 에라스도가 자신의 비용으로 도로를 포장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재정담당'이라는 직위는 공공사업과 상업업무를 관리하는 매년 선발되는 시 공무원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것은 로마서 16장23절에서 바울이 사용했던 '재무관(treasurer)'이라는 명칭과 일치합니다.

재무는 헬라어 ‘오이코노모스,οκονμος)’ 입니다.

- 티투스 케네디(Titus Kennedy) 박사 -

고린도의 재정을 담당하던 고위 관리 -  에라스도(Erastus, Ἔραστος)

에라스도의 헬라 이름은 에라스투스(ραστος) 이며 로마식 이름은 Erastus입니. 

로마서의 기록에 근거하여 추정하면 에라스도는 고린도 출신이고 고린도의 재무관이었습니다. 

여기서 에라스도의 직책으로 재무관은 그리스어로 오이코노모스(οκονόμος )입니 .

 ‘오이코노모스,οκονμος)’는 청지기입니다.

그는 고린도 시의 청지기로 회계공무원이었습니다.

고린도라는 큰 성의 회계업무를 총괄하는 사람이로 그는 꽤나 지위적으로 괜찮은 사람입니다.

그는 조영관 직책의 보답으로 도로를 포장하는데 개인 사비를 사용할 정도로 부자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에라스도는 바울이 그 이름을 거명할 정도로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고린도교회에는 에라스도의 형제 구아도(Quartus, Κοαρτος)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형제란 단어의 원어 헬라어는 아델포스(αδελφός)입니다.

형제α(알파)δελφυς(델퓌스) ‘자궁, 의 합성어입니다.

여기서 α(알파)άμα(하마)의 축약형으로 연합의 의미로 적용됩니다.

주님의 αδελφός(아델포스) ‘형제는 하나님 나라의 δελφυς(델퓌스) ‘자궁, 곧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하나님의 자녀들을 말합니다.

한 자궁에서 나왔다는 의미로 '아델포스'는 예수의 피로 나눈 한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2장11절에는 주님께서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신다고 기록했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성경은 주님과 우리가 한 분 하나님께로 태어났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우리 사이는 바로 친형제 사이가 됩니다.

구아도는 예수를 통해 에라스도와 친형제였습니다.

 

로마서를 대필한 더디오와 구아도는 그 이름에서 특별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더디오는 "셋째"라는 뜻이고, 구아도는 "넷째라는 뜻을 가진 로마식 이름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도 옛날에 자식을 많이 낳아서 지을 이름이 마땅히 않으면 일식이 이식이 삼식이 일중이 이중이 삼중이 이런 식으로 이름을 짓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시대에 첫째 둘째 셋째라고 이름을 지은 사람들은 노예들이었습니다.

노예들에게 이름을 주는 것까지 마땅히 않게 생각을 해서 그냥 첫째 노예, 둘째 노예, 셋째 노예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아마도 노예 중에 좀 대우를 받는 노예는 첫째라고 하고, 그 다음은 둘째...이렇게 했지 않았나 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이 더디오와 구아도는 노예 중에서도 첫째 둘째에도 들지 못하는 셋째 넷째로서 노예 중에서도 참 별 볼일이 없는 천덕꾸러기였을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초창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말씀이 고린도전서 1장에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 고린도전서 1장2629절 - 

 

고린도교회는 천한 노예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가이오 같은 부자도 있었고, 에라스도 같은 고관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 같이 자기의 신분에 관계 없이 자신이 가진 달란트를 최대한 이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교회를 세우는 일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력이 협력하여 하나님의 귀한 뜻을 이루어서 이 복음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들의 수고와 헌신으로 오늘날 우리가 이 귀한 복음을 받은 자들이 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부자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가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노예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저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이렇게 다양한 구성원들로 되어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돈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많이 배워 좋은 회사에서 많은 월급으 받으며 잘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배움이 짧아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는 우리의 어떤 조건을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누구든지 주님을 믿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교회 내에서는 빈부나 귀천의 차이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와 함께 있고, 형제라고 불러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권력자가 비천한 종을 노예를 형제라고 불러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평안!

 

 

 

에라스도(Erastus, Ἔραστος)의 이해를 돕기 위해  벤 위더링턴 3(Dr. Ben Witherington III)가 쓴 '고린도에서 보낸 일주일'을 소개합니다.

 

로마령 고린도의 두 개의 비문에는 성서를 충실히 읽는 기독교인이라면 유심히 볼만한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바로 에라스투스(에라스도)! 성서에 기록된 도시 재무관(조영관) 에라스도와 고린도 비문에 기록된 ‘도시 재무관(조영관) 직분을 얻기 위해’ 공을 들였던 에라스도가 같은 인물이지 않을까?

저자는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 당시 도시 재무관(조영관)으로 근무했던 그리스도인 에라스도의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서사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가상인물 니가노르다.

니가노르는 선택하는 인물이다. 도시 재무관(조영관)이 되려고 하는 두 인물이 있다. 자신의 주인이었고 여전히 그에게 신의를 베풀고 있는 그리스도인 에라스도과, 그의 반대편에 서있는 전형적인 교활한 로마 귀족 정치인 아이밀리아누스. 니가노르가 에라스도를 선택할 것인가, 혹은 에라스도를 배반하고 아이밀리아누스를 선택할 것인가는 질문은 본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힘이다.

뿐만 아니라 니가노르는 에라스도의 가정에서 모이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변방에 머물러있다. 서사의 중심은 에라스도와 아이밀리아누스의 정치적 대립이지만,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시의적절하게 등장하여 니가노르의 선택에 중요한 변곡점을 제시한다. 이와 함께 니가노르는 에라스도냐 아이밀리아누스냐의 선택과 동시에 기독교 신앙을 선택할 것이냐의 기로에 서게 된다.

끝내 고린도에서 보낸 일주일의 마지막날인 일요일, 니가노르는 에라스도와 아이밀리아누스 사이에서,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신흥종교에 대한 회의 사이에서, 자신의 인생을 가로지를 선택을 하는 이야기로 본 이야기는 끝이 난다.

벤 위더링턴 3세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흥미진진한 이유는 메인 서사에 있다. 교활한 로마 귀족 정치인 아이밀리아누스는 강자의 자리에서 서사를 종횡무진한다. 반면 그에 비하면 언더독이라 할 수 있는 에라스도는 아이밀리아누스의 계략에 판판히 깨어진다. 하지만 끝내 에라스도는 계략을 이겨내고 승리한다. 익숙하면서도 매력적인 전개는 독자를 잡아끄는 서사의 힘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전략적으로 서사 곳곳에 그레코 로만 사회의 문화와 풍습을 배치한다. 흩어뿌려진 문화와 풍습에 대한 정보엔 친절한 보조 아티클이 따라붙어 설명을 덧붙인다.

물론 본 책은 서사의 재구성이란 측면에서 아쉬운 점도 눈에 띈다. 예컨데 ‘에라스도와 같은 고위직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이교 신전 운영도 도와야 하는 도시 재무관(조영관) 직분을 이행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지킬 수 있었는가?’라는 저자의 마지막 질문의 해답은 본 책 속에서 찾을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본 책은 서사, 재구성된 흥미로운 서사로 이뤄져있기 때문이다. 몇몇 역사적 단편을 바탕으로 흥미롭게 서사를 재구성하다보니 당대의 정황에 대한 치밀한 묘사일 수 없으며, 곳곳에 비약적으로 건너뛰는 부분도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당대의 기독교 신앙, 회심, 교회의 모습에 대한 재구성은 단선적일 수 밖에 없다.

본 책은 부제인 ‘바울 사역의 사회적, 문화적 정황’을 탐색하는데는 적격이다. 독자를 몰입시킬 수 있을만큼 흥미롭게 서사를 재구성하면서도, 바울의 사역을 이해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정보들을 곳곳에 배치했다. 아갸아 총독 갈리오 앞에서 재판당하며, 회당장 소스데네가 두들겨 맞는 장면(행 18:12-17)에 대한 재구성은 본 책이 ‘에라스도’도 아니며, ‘니가노르’도 아닌, 바로 바울과 관련된 책임을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일요일, 에라스도의 집에서 바울은 고린도 13장을 언급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설교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니가노르의 선택을 추동한 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어졌고, 에라스도의 가족에게서 니가노르에게 흘러넘친)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은연히 그려내는 본 설교는 당대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서 ‘바울 사역’의 핵심이 무엇이었는지 그려낸다.

본 책은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책 자체로도 충분히 재밌게 읽을 수 있고, 본 책을 읽은 후에는 신약성서를 더욱 재밌게 읽을 수 있을테니까.

출처: https://sinhakdo.tistory.com/19 [신학도의 道:티스토리]

-  벤 위더링턴 3세(Dr. Ben Witherington III) -

 

※저자 소개

벤 위더링턴 3(Dr. Ben Witherington III) 는 고든콘웰 신학교(M. Div.)와 더럼 대학교(Ph. D.)에서 공부했으며, 애슐랜드 신학교, 밴더빌트 대학교, 듀크 신학교, 고든콘웰 신학교에서도 강의했다. 현재 애즈버리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이다. 전 세계적인 강사이며 블로그 patheos.com을 운영한다. The Jesus Quest(1995), The Paul Quest(1999), Invitation to the New Testament(2017), Biblical Theology(2019) 등 신약학계에 유의미한 여러 책과 신약 주석을 저술했다. 국내에 번역된 책으로는 고린도에서 보낸 일주일,평일의 예배, 노동, 예수님의 경제학 강의, 예루살렘 함락 후 일주일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