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148)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로마서 16장 19~20절 -
사도 바울은 로마서 16장 1절에서 16절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에게 문안을 합니다.
바울은 무려 30여명의 로마교회 성도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며 개인적으로 안부를 전합니다.
16절에서는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렇게 편지를 끊으려고 하다가 갑자기 분위기를 바꾸어 특별한 걱정거리를 말합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혹시라도 사탄의 세력에 의해 흔들리는 일이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진리를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는 거짓 교사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는 강력한 권면을 합니다.
그 거짓교사들은 그동안 성도들이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열을 일으키거나 실족하게하는 사람들인데,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잘 분별해서 그들에게 떠나라고 한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17~18절)
바울은 18절에서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배만 섬긴다'고 강력하게 정의해 버립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19절에서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더 나아가 20절에서는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고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새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평화의 하나님께서 곧 사탄을 쳐부수셔서 여러분의 발 밑에 짓밟히게 하실 것입니다."고 번역했습니다.
성경은 악한 영이 존재한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 영이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약의 첫 책, 창세기부터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 싸움은 신양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에서 마귀가 지옥에 던져지면서 종결됩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사탄의 머리를 밟아버리심으로써 이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사탄과 원수 관계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으면 구원 얻은 상태 자체가 사탄과의 원수 관계입니다.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어 진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마귀의 종 노릇을 했는데, 이제 마귀를 떠나고 마귀의 말을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마귀와 원수 관계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구원받은 로마교회 성도를 향해 원수 마귀와 원수 관계에 있으니 '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라' 고 당부합니다.
사탄이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미혹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사탄을 쳐부셔서 여러분의 발 밑에 짓밟히게 하실 것이니 담대하게 대처하며 말씀에 순종하라고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
제123문답 : 주기도의 두 번째 간구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16세기에 독일의 선제후령(選帝侯領) 팔츠(Pfalz)에서 종교개혁이 진행되면서 작성된 신앙고백서입니다.
1563년에 쓰여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독일 내 루터교와 카톨릭 안에서 몇 안되는 칼비니스트 신앙의 줄기 중 하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원래 독일 팔츠 사람들의 종교적 연합을 촉진하기 위한 교육 도구로 여겨졌던 요리문답이었는데, 곧 설교를 위한 가이드가 되었습니다.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주일 오후예배에 순서대로 가르쳐왔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을 중심으로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가르치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삼위 하나님에 대한 분명하면서도 풍성한 이해와 신자 개인의 삶에 대한 공감을 기반으로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많은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129개의 문답이 전체 52주일 분량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제1주일은 전체의 서론으로 '위로'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또한 세 주제로 구분됨을 알려줍니다.
* 우리의 죄와 비참함에 관하여 (제2-4주일)
* 우리의 구속에 관하여 (제5-31주일)
* 우리의 감사에 관하여 (제32-52주일)
제2부 가운데 8-22주일에서는 가장 널리 사용되는 보편 신조들 중 하나인 사도신경에 대하여 광범위하게 해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3부에서는 십계명(34-44주일)과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46-52주일)을 다룹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19문부터 주기도문에 대해서 나옵니다.
제 123 문 : 두 번째 간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 “나라가 임하옵시며”라는 간구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더욱 더 당신께 순종하도록 당신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려 주소서.
1. 당신의 교회를 보존하시고 부흥하게 해주소서.
2. 사단의 세력을 부수시며, 당신에게 거역하는 모든 세력을 부수시며, 당신의 거룩한 말씀에 거역하는 모든 음모를 소멸하옵소서.
3. 당신의 나라가 온전히 도래하여서 당신이 만유의 주가 되실 때까지 그렇게 해 주옵소서.
4. 여기서 '나라를 위한 기도'는 하나님께 “마귀의 사역을 멸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성경은 사탄의 패배를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연관시킵니다.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과 육신과 마귀로부터 온전히 벗어난 안전한 상태에서 그분의 축복을 누리는 영역을 가리킵니다.
이런 연관성은 인류의 역사가 처음 시작된 때부터 발견죕니다.
당시에 하나님은 뱀의 머리가 여인의 후손에 의해 상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3:14, 15).
그때만 해도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어렴풋한 약속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구원의 역사가 차츰 진행되면서 그 의미가 점차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이 약속은 엘리야가 바알이라는 거짓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물리친 사건을 통해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열왕기상 18장)
하나님이 아름다운 옷을 우리에게 입혀 사탄의 비난과 고소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스가랴의 환상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 스가랴 3장1∼5절 -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사탄의 패배가 서로 연관성을 지닌다는 사실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누가복음 11장20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내쫓는 사역을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 증거로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곳마다 귀신들은 두려워 떱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 확장되고, 원수 마귀는 두려움에 쫓겨 행동합니다.
때로는 마귀가 두려워 도망하고 많은 사람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날 때가 있습ㅂ니다.
때로는 마귀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정부의 권력을 이용해 신자들을 억압하고 박해하는 상황이 발생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 확장됩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사탄과 그의 수하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발 아래 온전히 굴복하게 될 것입니다.
"평화의 하나님께서 곧 사탄을 쳐부수셔서 여러분의 발 밑에 짓밟히게 하실 것입니다."
- 로마서 16장20절 , 새번역 -
「평강의 하나님께서!」
이사야 57장19절 말씀입니다.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열매는 먹는 사람에게는 양식이고 심는 사람에게는 종자가 됩니다.
열매를 심어 열매를 거두고 그 열매를 종자로 사용합니다.
입술의 열매는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에 따라 창조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일본 사람들이 쓰는 말 중에 언령(言靈)이란 말이 있습니다.
말속에 영이 있다는 뜻입니다.
언중유골(言中有骨)이라는 말은 말속에 뼈가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창세기1장24절 -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입술의 열매가 모든 생물과 짐승을 창조하셨다는 말입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이사야 45장7절)
평강이 있으라!
하나님은 창조 명령으로 평강을 창조하십니다.
창조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평안이 없는 곳에 평강이 있으라!고 명령하심으로 평강이 있게 하십니다.
옛날에는 북소리로 전쟁을 알렸고 종소리로 평화를 알렸습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나 ‘어’나 놀라움의 표현입니다.
둘 다 당황할 때 초조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아’는 ‘아’고 ‘어’는 ‘어’입니다. 느낌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평화를 만드는 말이 있고, 전쟁을 부추기는 말이 있습니다.
어둠의 씨앗이 있고, 빛의 종자가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둡니다.
말은 씨앗입니다.
평안의 씨를 심어야 평안을 거둡니다.
빛이 있으라!는 말이 빛이 있게 했습니다.
우리 입술에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찬양하는 찬송을 매일 부를 때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입술, 성경을 읽는 입술이 주님이 창조하신 입술입니다.
입술이 부정한 자들은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아이고 죽겠다! 망했다!, 못살겠다!, 미치겠다!, 힘들다! 이런 말들이 입에 붙어 있는 사람들은 몸보다 먼저 마음이 지치고 병듭니다.
그리고 몸 역시 아프게 됩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고, 말씀이 없이 적극적인 사고 방식을 외치는 자들은 자기 확신과 영적 망상과 교만에 빠지지만 주님 안에서 말씀을 붙들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도전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는 것은 믿음의 확신이요, 승리의 비결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주님께 칭찬을 받은 것은 그들의 입술에서 나온 선한 믿음의 보고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믿음으로 우리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우리를 붙드시는 주님을 통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때 두려움은 물러나고 평안이 깃듭니다.
우리가 주를 신뢰할 때 주님은 평강으로 지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 날 저녁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숨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겁을 먹고 있었는지 그들은 하나의 문이 아니라, 이중, 삼중으로 “문들을” 닫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두려워 떨고 있던 순간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요한복음 20장19절 -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시고 제자들이 문을 열어준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에 떨며 문들을 겹겹이 걸어 잠근 채 숨어 있는데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무덤에 매장되었던 던 예수님이 갑자기 방안에 나타나신 겁니다.
그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공포 그 자체였을 겁니다.
같은 상황을 기록한 누가복음 24장 37절에 보면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귀신이 아닌가? 놀라서 기겁했다”는 뜻입니다.
놀라고 무서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며, 못에 박힌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이심을 알아보고 기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조금 후에 다시 제자들을 향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1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팔일을 지난 후에 예수님이 다시 그 장소에 나타나셔서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 요한복움 20장26절 -
부활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다른 말씀이 아니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세 번 씩이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제자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평강’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너무 엄청난 사건을 겪은 충격으로 인해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안과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는 다른 것보다도 평안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평강(平康)’은 헬라어로 에이레네(είρήνη)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함께 묶다, 합치다, 함께 짜다”는 의미로 자기 자신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 함께 묶여지고, 짜여지고, 연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에이레네(είρήνη)는 히브리어로는 ‘샬롬(שלום)’이라고 합니다.
‘샬롬’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 소장된 모든 복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안녕, 평화, 행복, 안전, 만족을 담고 있는 최상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근심과 모든 문젯거리로부터 자유하는 것을 의미하며, 온전함, 또는 번영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평강>은 평안하고 강건한 것입니다.
우리 개인과 우리 가정의 전체 상태가 안녕한 것을 말합니다.
육체적인 강건, 정신적인 강건, 영적인 강건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평강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요한복음 14장27절 -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강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아 누리는 그러한 평강을 말합니다.
죄지은 사람이 발 뻗고 잘 수 없다는 우리의 속담대로 예전에는 우리가 죄 때문에 발 뻗지 못하고 자던 죄인이었으나 이제는 그 하나님의 은혜로 죄인이 되지 않고 두발 쭉 뻗고 잘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평강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한 평강입니다.
누가복음 2장 14절에 하늘에서 천사가 찬송을 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여기의 평화가 평강과 같은 말입니다.
이 말씀을 새번역으로 읽으면,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좋아하시는) 사람에게 평강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노인은 노인대로,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살아가는 것이 살얼음 밟는 것 같은 위태로운 삶의 나날입니다.
그 이유는 평강이 없어서입니다.
평안이 없어서입니다.
위로가 없어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크고 작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합니다.
이때 마음에 불안과 초조, 좌절과 절망,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잊지 말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목자이시고 우리는 주의 양입니다.
목자는 결코 양을 사망의 골짜기에 홀로 버려두지 않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헤매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낭떠러지 인생길로 내려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목자 되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생명과 광명으로 변화시키시고 주의 지팡이로 건저 주시고 막대기로 원수를 쳐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초조와 공포 속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바울은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평화의 하나님께서 곧 사탄을 쳐부수셔서 여러분의 발 밑에 짓밟히게 하실 것입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살아가는데 있어서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돈도 필요합니다.
명예도 필요합니다.
권력도 필요합니다.
인기도 필요합니다.
학벌도 필요합니다.
건강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평안이 없이 돈만 있으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평안을 빼앗긴 채로 인기가 많아지면 무얼 할 수 있습니까?
평안을 상실해 버린 채로 권력을 잡고 있으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평안을 누리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이 부러워하는 명예를 가지고 있으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평안은 삶의 가장 근원적인 요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참 평강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참 평강을 주실 수 있는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 마지막 하신 말씀은 다른 말씀이 아닙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장20절)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의 왕좌에 모시어 들이고 평강이 넘치는 성령 충만한 평안의 삶을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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