몹시 추운 겨울날
최전방 어느 부대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군에 갓 입대한 이등병이 언 손을 녹여 가며 찬물로 빨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순간 그곳을 지나가던 소대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등병의 언 손을 보고 안쓰러워 한마디를 건넸습니다.
“김 이병! 취사장에 가서 뜨거운 물 좀 얻어다가 하지.”
이등병은 소대장의 말을 듣고 취사장에 뜨거운 물을 얻으러 갔습니다.
하지만 취사장 고참은 이등병에게
"야! 이등병 주제에 뜨거운 물이라니!"
고참은 뜨거운 물을 주지 않고, 이등병 에게 군기가 빠졌다고 온갖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아직 정신상태가 덜 됐다고 하면서 이등병에게 '얼차려' 를 시켰습니다.
※ '얼차려'라는 말은 '정신을 차리라!'는 뜻으로
군의 기율을 바로잡기 위하여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비폭력적 방법으로 육체적인 고통을 주는 일.
고된 '얼차려'를 받고 이등병은 빈 손으로 돌아와 다시 찬물로 빨래를 계속했습니다.
이때 중대장이 지나가면서 이등병의 언 손을 보고 안쓰러워 한마디를 건넸습니다.
“김 이병! 그러다 동상 걸리겠다. 저기 취사장에 가서 뜨거운 물 좀 얻어서 해라.”
중대장의 말에 이등병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등병은 취사장에 가지 않았습니다.
가 봤자 뜨거운 물은 고사하고, 혼만 날 것을 알고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등병은 그렇게 계속 빨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인사계 부사관이 그 곁을 지나다가 찬물로 빨래를 하고 있는 이등병을 보았습니다.
부사관은 걸음을 멈추고 말했습니다.
“김 이병! 내가 세수를 좀 하려고 하는데 취사장에 가서 대야에 더운물 좀 받아 와라!.”
이등병은 빨래하던 것을 멈추고 취사장으로 뛰어가서 취사병에게 보고했습니다.
"부사관님이 세수하신다고 더운 물 대야에 담아 오라고 합니다."
취사병은 급히 이등병에게 부사관이 세수할 뜨거운 물을 대야에 그득 담아줘습니다.
이등병은 뜨거운 물을 한가득 받아 부사관에게 왔습니다.
그러자 인사계 부사관이 말했습니다.
“김 이병! 그 물로 언 손을 녹여가며 해라.
양이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동상은 피할 수 있을 거야.”
어느 여 목사님이 목욕을 갔습니다.
목욕탕에 사람이 가득이었습니다.
겨우 자리를 하나 잡고 목욕을 시작하려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목욕물을 끼얹을 바가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목욕탕을 한 바퀴를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 연세 드신 아주머니께서 바가지 두 개를 쓰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조심스레 “어르신! 죄송합니다. 제가 물바가지를 찾는데 돌아보니 한 개도 없어서요. 제가 하나만 써도 될까요?”
그러자 그 아주머니가 돌아보더니 성난 표정으로 “내가 쓰는 걸 왜 달라고 합니까?”라고 하더랍니다.
민망하고 당황스러워서 얼른 자리로 돌아가 목욕을 빨리 마무리하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아까 그 연세가 많은 아주머니도 목욕을 마치고 나왔습니다.
여 목사님은 행여 눈이 마주칠까 봐 몸을 돌려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목욕탕 현관문이 열리더니 어느 분이 그 아주머니를 향해 외쳤습니다.
“어머, 권사님!”
우리가 살아가는데 가장 소중한 것이 남을 위한 배려(配慮)입니다.
배려는 상대에 대한 존중의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배려(配慮)의 사전적 의미는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쓰는것" 입니다.
“배려(配慮)의 배(配)는 아내, 짝, 어미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려(慮)는 생각하고 걱정해주는 마음입니다.
따라서 배려한다는 것은 남편, 아내, 자식처럼 진실로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마 음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이야기 하지만, 배려 (配慮) 없이는 사랑할 수 없고, 또한 관심이 없으면 배려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관심이 없으면 미움조차 없습니다.
흔히 한 사람의 성숙도는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에 비례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모로 자상하게 마음을 쓰는것을 보고 배려(配慮)한다고 합니다.
'무관심'은 배려의 가장 큰 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배려란 관심이고 헌신이며 행동이고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옛선인들은 길 가던 나그네에게 배려하는 마음으로 나뭇잎을 띄워 물 한잔을 건네주었습니다.
먼길가는 힘겨운 나그네에겐 아무런 댓가 없이 하룻밤을 쉴수있도록 사랑방을 비워주던 아름다운 배려가 있었습니다.
혼자서는 설 수 없는 공동생활에 서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필수조건입니다.
배려와 관심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건강한 사회를 이루게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자기중심적 사고와 판단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오히려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부모들이 자식의 장래를 위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교훈적 충고를 할 때, 그것이 자식에게 단지 잔소리로만 들려진다면 오히려 그 사랑은 설자리가 없어지고 관계를 악화 시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생각할때 좋은 것을 남에게 해주면 이것이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방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일방적인 배려이므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들에게는 반드시'배려'가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배려일지라도 그 파급 효과는 놀랄 만큼 강해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줍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세상일이 대부분 사람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통용되는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상대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덕목입니다.
아프리카에는 다음과 같은 속담이 전해온다고 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함께 가려면 가장 느린 사람의 속도에 맞추어야 하고, 가장느린 사람의 짐을 함께 들어주어야 한다.'
빨리 갈 수 있는 사람이 양보하는 것 같지만, 멀리 가기 위해서는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것이 속도를 늦춘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배려'입니다.
하나님의 배려 - 가죽옷
구약 성경 창세기 3장에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벌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와를 유혹한 뱀에 대하여 팔다리를 없애고 종신토록 배로 기어다니게 하셨습니다.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 먹고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한 하와에게는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고,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에게 다스림을 받게 하셨습니다.
아담에게는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고,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합니다.
주 하나님이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서 네가 저주를 받아,
사는 동안 평생토록 배로 기어다니고, 흙을 먹어야 할 것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 창세기 3장 14∼19절. 새번역 -
아담 부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창세기 3장21절 말씀입니다.
"주 하나님이 가죽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다."
가죽옷을 만들어 아담과 아내에게 입히셨다는 말씀 속에는 이들 부부의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 죽어야 했던 동물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지은 자들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배신한 그 장소, 하나님을 버린 그 죄악의 현장에서, 짐승을 잡아 그 껍질을 벗겨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십니다.
그렇게 인간의 수치를 덮어 주기 위한 가죽 옷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은 동물 한 마리를 죽이셨습니다.
비록 불순종한 아담 부부였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들 부부를 위하여 다른 동물을 희생시키시면서까지 사랑과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동물을 죽이고 가죽을 벗기었으니 피가 진동 하였을 것입니다.
그 피는 바로 인간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피였습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 제사는 피 값이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내려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인간의 죄를 대신해 제물이 되어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여러분의 헛된 생활방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그것은 은이나 금과 같은 썩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되었습니다"
- 베드로전서1장18∼19절, 새번역 -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과 은총의 표식인 가죽옷은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은 신약시대와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일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그 크신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 에베소서 2장9∼10절 , 새번역 -
가죽옷에 담긴 깊고 오묘한 하나님의 배려는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귀결됩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죽음의 길을 자초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아담에게 여자의 후손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아담에게 입히신 가죽옷은 곧 그의 후손 된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되었습니다.
아담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후손 된 모든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보내셨습니다.
그의 희생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옷 입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이 자기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
- 요한일서 4장9 ∼ 10절 -
하나님의 배려가 가죽옷에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배려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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