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과 칼럼

"원장은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가족사랑 2023. 10. 7. 14:08

 

어느 문제 수도원에 한 늙은 수도사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늙은 수도사가 왔다는 소문에 젊은 수도사들이 밖으로 우~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백발이 성성한 노수도사를 보고 말했습니다.

"노수도사가 왔구려! 어서 식당에 가서 접시나 닦으시오."

노수도사가 숨 돌릴 여유도 주지 않고 젊은 수도사들이 노수도사에게 말했습니다.

이 수도원에서는 처음 부임한 수도사에게 그런 허드렛일을 시키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노수도사는 머리를 숙이며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답하고는 곧장 식당으로 갔습니다.

노수도사는 한 번도 불평하지 않고 한 달, 또 한 달, 그리고 또 한 달을 접시만 닦았습니다.

젊은 수도사들은 말없이 그리고 불평하지 않고 일하는 노수도사를 얕잡아 보고는 그에게 멸시와 천대와 구박을 쉬지 않았습니다.

석 달이 지난 즈음에 수도원 감독자가 이 수도원을 방문하였습니다.

젊은 수도사들은 책잡힐 일이 있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며 감독 앞에서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감독은 수도원의 원장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고는 그 수도원의 원장을 찾았습니다.

"원장님은 어디 가셨는가?"

수도사들이 대답했습니다.

"원장은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감독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니 무슨 소린가? 내가 로렌스 수도사를 이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하였고 또 이곳으로 파견한지 벌써 3개월이나 되었는데?"

이 말을 듣고는 젊은 수도사들이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노수도사가 원장이란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두 식당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에 늙은 수도사가 식기를 닦고 있었습니다.

그 노수도사는 너무나 유명한 브라더 로렌스(Brother Lawrence)이었습니다.

 

- 로렌스(Brother Lawrence, 1611~1691) -

본명이 니콜라 에르망인 수도사 로렌스(Brother Lawrence, 1611~1691)는 38세 되던 해에 프랑스 파리의 ‘멘발의 까르멜 수도회’에 수사로 들어가 80세까지 수도사로 살았습니다

. 그는 평생을 평수사로 있으면서 부엌일과 샌들 수선하는 일을 하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는 아무리 힘들고 미천한 일을 맡아도 푸념하지 않으며,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지닌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어느 겨울날, 그는 잎이 모두 떨어진 앙상한 나무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얼마 후에는 싹이 돋고 잎이 나고 꽃도 피고 열매도 맺히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에 대한 숭고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깨달음은 평생 그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날의 깨달음은 그를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떼어놓았고, 하나님을 향한 지극한 사랑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날 이후 로렌스는 하나님 아닌 다른 모든 것에 철저히 무관심하였고, 그래서 자유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런 철저한 무관심과 완벽한 자유의 삶이 로렌스의 일생이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는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에게는 모든 장소, 모든 임무, 모든 것이 동일하였습니다.

부엌에서 허드렛일을 하든지, 낡은 샌들을 수리하든지, 골방에서 기도하든지 언제 어디서나 그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깊은 고독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을 일상의 임무 수행 한가운데서 만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였으므로 특별히 별도의 경건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로렌스의 삶과 영성은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누리며 살 것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예배나 기도드릴 때만이 아니라, 노동하는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도,  일상의 잡다한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누릴 수 있습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0: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마태복음 20장 25∼28절 - 

 

‘섬기는 자’로 번역된 헬라어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 는 ‘심부름을 가다’라는 의미를 가진 ‘디아코’(diaco)에 어원을 두고 있는 ‘시종인,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 종, 수행자, 대사’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소유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의 권력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마태복음 20장25절).

세상의 집권자들은 지위가 높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바라던 것과 같은 권세를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의 통치의 자세는 자신의 힘으로 권세를 과시하거나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당시의 헤롯은 자신의 강한 힘으로 사람들을 억압하거나 심지어는 자신에게 맞서는 자들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로마 황제는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려고 자신의 우상을 만들어 통치하는 나라에 신전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상에 절하지 않는 자들을 핍박하거나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정복한 나라의 사람들을 노예로 삼거나 세금을 수탈하여 자신들의 부의 축재의 도구로 삼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을 아시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들은 세상과 다른 가치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태복음 20장26-27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진정으로 크고자 한다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제자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한다면 종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은 헬라어로 둘로스( (δουλος)입니다.

종은 섬기는 자 보다 더 낮은 신분은 노예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가장 낮은 신분으로서 배에 묶여 노를 젓는 노예를 ‘둘로스’(δουλος)라고 불렀습니다.

노를 젓는 종으로서 ‘둘로스’는 한마디로 ‘나는 없습니다, 나는 존재도 아닙니다.’라는 의미”입니다.

 둘로스 (δουλος)는 노예인데, “종은 고용된 존재이고 노예는 소유된 존재”라고 둘을 구분합니다.

'노예와 당나귀는 주인을 위해 노동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노예는 말을 할 줄 알고 당나귀는 말을 할 줄 모른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고 설명합니다.

종은 자신의 권리를 주인에게 양도하여 철저하게 섬기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철저하게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야고보와 요한처럼 최고의 높은 자리를 의미합니다.

가장 높은 자(first)가 되고자 한다면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의와 권리를 포기하여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 (διακονέω)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διακονέω)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0장28절, 마가복음10장45절)는 말씀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닌 섬기러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섬기는 자(διάκονος)이신 예수님의 섬김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빌립보서 2장8절)으로 나타났으며, 바로 그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고 ‘그리스도’로 살게 되었습니다(갈라디아서 2장2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