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충남 공주 땅 팔봉산 자락에 효심이 지극한 청상과부가 병든 시아버지와 단둘이 살았습니다.
본래 밭고랑 하나 없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다 그나마 시집온 지 삼 년 만에
들일을 나갔던 서방이 벼락을 맞아 죽는 바람에 졸지에 기력 없는 시아버지만 떠안고 말았습니다.
말 잘하기 좋아하는 동네 사람들이 과연 몇 해나 버틸 거냐고 허구한 날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청상과부의 효성은 벌써 일곱 해를 하루같이 변할 줄 몰랐습니다.
시아버지의 병구완은 변함없이 지극 정성이었습니다.
봄이면 날품팔이, 여름이면 산나물과 약초를 캐다 팔아 힘든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아가야, 이제 그만 친정으로 돌아가거라. 그만큼 고생했으면 됐다.
이제 좋은 상처 자리라도 만나 배나 곯지 않고 살아야 하지 않겠니?
세상천지에 널 탓하고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
병든 시아비는 틈만 나면 며느리의 손을 잡고 통사정을 하며 울었습니다.
"아버님, 제 집이 여기인데 왜 저를 자꾸만 내치시려 하십니까? 저는 아무데도 안 갑니다.
살아도 이 집 며느리요, 죽어도 이 집 귀신인 제가 가기는 어딜 간단 말입니까?
제발 그런 말씀 마시고 어서 몸이나 쾌차하십시오. 아버님!"
몹시 흉년이 든 어느 해 가을, 추석 명절이 돌아왔습니다.
그나마 받은 품삯을 시아버지 약값으로 다 쓰고 보니 정작 차례를 지낼 일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틀 후면 한가위인데 아무리 궁리를 해 보아도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빈상에 냉수만 올리고 제사를 지낼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돌아가신 분은 그렇다 손치더라도 병든 시아버지의 낙심을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음날 이른 아침 며느리는 방문 앞에서 시아버지에게 인사를 올렸습니다.
"아버님, 저 읍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며느리가 쪽마루를 내려서는데 시아버지는 그날따라 안간힘을 써가며 문구멍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사립문을 나서는 며느리의 가련한 모습을 보면서 시아비는 피를 토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며느리는 정처 없이 어딘가를 향해 걸었습니다.
땀은 비오듯 쏟아지고 두 다리는 돌덩이를 매단 듯 천근만근으로 무겁기만 했습니다.
걷다 힘이 부치면 냇가 미루나무 아래서 쉬고 추수가 끝난 들녘에서 벼이삭을 주우며 걸었습니다.
하늘을 쳐다보니 더없이 야속하기만 한 서방의 얼굴이 어른거려 쉴 새 없이 눈물만 쏟아졌습니다.
걷고 또 걷고, 얼마나 걸었는지 어느새 해는 한나절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서쪽 하늘이 봉선화 꽃잎을 흩뿌린 것처럼 군데군데 물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큰 재를 넘으니 마침내 오매불망 그리던 친정마을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딸은 실로 몇 해만에 보았을 친정을 내려다보며 큰 절을 올렸습니다.
그리고는 날이 어둡기만을 기다리며 그토록 서럽게 울었습니다.
얼마 후, 딸은 친정 집 광속에서 제법 묵직한 자루 하나를 들고 나와 미친 듯이 재를 넘고 있었습니다.
"되었다. 이만하면 되었다!”
딸은 뒤도 돌아볼 새 없이 정신없이 오던 길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가뭄이 들었다지만 요행히도 친정 집은 아직까지 보릿가루며 보리기울이 넉넉한지라 이고 갈 만큼은 퍼 담았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곡식 자루를 이고 뒷동산을 넘고 있을 때
말없이 툇마루에 서서 물끄러미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친정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딸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뒷동산을 바라보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아이고 불쌍한 것, 어찌 이다지도 박복하더란 말이냐, 오죽이나 살기가 힘들었으면 이 한가위에 친정 울타리를 다 넘었겠느냐,
아이고 불쌍한 내 딸아!"
며느리는 새벽녘이 다 돼서야 온 몸이 땀에 절어 돌아왔습니다.
그 머나먼 곳을 다녀왔지만 그녀는 집을 나설 때와는 달리 하나도 피로한 기색이 없었습니다.
한가윗날 아침에 산나물 반찬에 밀가루 전을 부쳐 흰쌀밥을 올리고 조상은 물론이요, 시어머니와 서방님께 제를 올릴 수 있다고 생각을 하니 고단함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한없이 마음이 설레었습니다.
그리고 추석이 지나 며칠이 되면서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느 날 이른 새벽에 사립문 밖에서 소란한 기척이 들려 밖을 나가보니 서너 말이 됨직한 좁쌀 자루가 놓여 있었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이 흉년에 누가 이 귀한 낱알을 두고 갔을까?"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짐작이 갈만한 구석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궁색한 살림살이지만 남의 곡식을 덥석 축낼 수가 없었습니다.
며느리는 며칠을 새벽 잠을 설치며 전전 긍긍하는데, 어느 날 또다시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습니다.
몇 날 며칠을 기다렸던 터라 며느리는 죽을 힘을 다해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그사이, 등에 지게를 걸머진 남자가 번개같이 담을 돌아 논둑길을 내려서고 있었습니다.
"보셔요, 잠시만 저를 보셔요"
어느새 남자의 등 뒤까지 따라간 며느리는 그만 낚아채던 남자의 팔을 놓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아버지!"
멋쩍은 듯 웃으며 돌아선 이는 다름 아닌 친정아버지였습니다.
"이것아 집에 왔으면 어미나 보고 갈 일이지.
고구마다, 허기질 땐 꽤나 양식이 되고...
정 힘들면 대낮에 다녀가거라.
네 어미에게는 아직 말을 안 했다!”
"아버지, 절 보셨으면 왜 한 번 불러주지 않으셨어요!"
딸은 서럽게 목 놓아 울고 있었습니다.
"들어가거라, 어서. 동네사람 볼까 무섭다. 어서!"
돌아서는 아버지의 볼에서도 어느새 하염없는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두 자식과 남편을 여읜 채 혼자 남은” 나오미는 남편을 잃은 두 며느리들과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마음먹습니다.
길을 가다가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미래에 대해 아무런 희망도 줄 수 없으니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재촉합니다.
"너희는 제각기 친정으로 돌아가거라. 너희가, 죽은 너희의 남편들과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여 주었으니, 주님께서도 너희에게 그렇게 해주시기를 빈다. 너희가 각각 새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주님께서 돌보아 주시기를 바란다."
나오미가 작별하려고 그들에게 입을 맞추니, 며느리들이 큰소리로 울면서 말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도 어머님과 함께 어머님의 겨레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말렸습니다.
"돌아가 다오, 내 딸들아.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려고 하느냐? 아직, 내 뱃속에 아들들이 들어 있어서, 그것들이 너희 남편이라도 될 수 있다는 말이냐? 돌아가 다오, 내 딸들아. 제발 돌아가거라. 재혼을 하기에는, 내가 너무 늙었다. 설령, 나에게 어떤 희망이 있다거나, 오늘 밤 내가 남편을 맞아들여 아들들을 낳게 된다거나 하더라도, 너희가, 그것들이 클 때까지 기다릴 셈이냐? 그 때까지 재혼도 하지 않고, 홀로들 지내겠다는 말이냐? 아서라, 내 딸들아. 너희들 처지를 생각하니, 내 마음이 너무나 괴롭구나. 주님께서 손으로 나를 치신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다시 한 번 큰소리로 울었습니다.
마침내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맞추면서 작별 인사를 드리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룻은 오히려 시어머니 곁에 더 달라붙었습니다.
그러자 나오미가 다시 타일렀습니다.
"보아라, 네 동서는 저의 겨레와 신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의 뒤를 따라 돌아가거라."
그러자 룻이 대답하였습니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 - 룻기 1장 -
히브리어로 ‘룻(רות)’은 우정, 동반자, 친구, 아름다움 같은 뜻이 담겨있는 여자 이름입니다.
영어로도 룻(Ruth)은 여자 이름입니다.
모압사람인 며느리 룻은 나오미의 귀향길에 동행했습니다.
나오미는 “주님께서 나를 치시어 불행하게 하시고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다”고 한탄했지만, 나오미 곁에는 룻이 있었습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르기로 선택한 동기는 사랑입니다.
룻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곤경에 처해 죽을 도리밖에 없는 사람, 시어머니를 선택합니다.
"죽음밖에는 아무것도 저를 어머님에게서 떼어내지 못합니다"라는 룻의 단호함은 일상생활을 함께 하는 가운데 서서히 다져진 사랑과 존경입니다.
어떤 고난의 길도 함께 가고, 함께 살아내겠다는 시어머니에 대한 며느리 사랑입니다.
시어머니와 어떤 슬픔도, 기쁨도 함께 겪고 나누겠다는 며느리의 결단입니다.
나오미는 룻의 행복을 우선적으로 생각했습니다.
룻 역시 이전에 가졌던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신앙이나 자신의 행복보다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행복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한 두 여인은 친족의 한 사람 보아스를 발견합니다.
룻은 나오미를 선택함으로서 미래가 없는 사람이 되었는데, 이제 나오미가 나서서 룻에게 가정을 꾸려주기 위한 빛과 길을 찾아냅니다.
나오미와 함께 남겠다고 결심한 룻의 행동은 주님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게 했습니다.
보아스는 자기 옷자락으로 룻의 몸을 덮어주어 룻을 신부로 맞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보아스와 룻의 풍요로운 사랑 안에서 구체화됩니다.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습니다.
이웃 아낙네들이 나오미에게 환호를 보냅니다.
"주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자손을 주셔서,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늘 기리어지기를 바랍니다.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며느리, 아들 일곱보다도 더 나은 며느리가 아기를 낳아 주었으니, 그 아기가 그대에게 생기를 되찾아 줄 것이며, 늘그막에 그대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 -롯기 4장14∼15절 -
이웃 아낙네들이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 주면서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다!" 하고 환호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아기의 이름을 오벳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바로 이새의 아버지요,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바로 주님의 인도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지할 데 없는 한 여인, 특히 이방인 과부의 개별적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안에서 구원의 역사로 끌어 올리셨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인간관계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키워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는 앙숙으로 여겨지는 고부간에 대한 세상의 이야기들이나 경쟁의식을 지닌 여성들 사이에서 갖는 선입관을 넘어서서, 진정한 우정과 유대감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서로 도우며 둘이 함께 살아가는 나오미와 룻의 모습은 여성들이 새 시대를 열어 가는 오늘, 우리들의 현실에 가장 필요한 아름다운 동행의 모델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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