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129)-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가족사랑 2023. 5. 13. 16:34

로마서 강해(129)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 로마서 15장 29∼33절 -

 

지난 본문,  로마서 15장 2228절은 사도 바울의 향후 계획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바울은 당시 거하던 지방에서 사역을 거의 마무리했고 오랜 전부터 복음의 불모지라고 할 수 있는 서바나 즉, 현재의 스페인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상황은 로마 제국의 서쪽 끝인 스페인으로 가는 것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는 우선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의 성도들이 예루살렘 성도를 위하여 모금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교회를 가려고 여러 차례 가려고 하였으나 그 때마다 길이 막혀 가지 못 했습니다(22절).

길이 막힌 이유는 전쟁이나 자연재해로 실제 길이 막힌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이 지역에서 일할 곳이 없었고, 복음이 채 들어 가지 못한 지역에 선교 가는 것이 급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23절).

그래서 바울은 다시 로마 방문 계획을 잡았습니다.

그 목적은 이미 세워진 교회에 복음 전하는 일이 아니라 그곳을 베이스캠프로 삼아 서바나(스페인) 선교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24절).

그러나 바울은 그 일을 당장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의 성도들의 헌금을 가난한 예루살렘 성도들에 전달하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헌금은 아름다운 기부이었습니다.

자신들도 어려웠지만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한 헌금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빚진 자들이 조금이라도 그 영적인 빚을 갚는 일이 마땅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26∼27절)

바울은 이 일을 마친 후 로마로 들렸다가 스페인으로 갈 계획이었습니다.

그 때 그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이를 위하여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제 유대로 들어 갈 것인데 그곳에 있는 유대인 대적자들에게 해를 받지 않으며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이 기쁘게 받아 드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28∼31절)

대적자들은 바울의 회심에 대한 복수를 계획하고 있는 과격파 유대교인들입니다.

예루살렘 교인 중에도 아직 바울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바울의 사역에 터무니없는 루머가 돌았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모세를 배반하고 할례를 행하지 말고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사도행전 21장 20∼21절)

바울은 이런저런 이유로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중보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로마로 가려는 바울의 계획을 변경시키셔서 예루살렘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로마를 거쳐 서바나로 가기에 앞서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고린도 교회의 연보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성도를 섬기는 일’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 당시 모든 교회의 모 교회였습니다.

오순절에 성령강림 하심으로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어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교회에서 이들을 위하여 헌금하고 바울의 손에 의탁하여 그 돈을 예루살렘교회로 보내게 된 것입니다.

당시 아시아 지역의 교회 성도들도 극심한 가난과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힘에 지나칠 정도로 기쁨과 감사함으로 연보에 참여했습니다.

아시아 교회들이 무엇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어떻게 여기는지 알고 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았기에 기쁨으로 참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가는 바울

 

바울은 이 연보를 가지고 가면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 안다'고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29절)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은 헬라어로  '엔 플레로마티 율로기아스 크리스투'(ἐν πληρώματι εὐλογίας Χριστοῦ)로 써졌습니다.

영어로는 'full measure of the blessing of Christ.'입니다.

여기서 ''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율로기아스'(εὐλογίας)는 원래 '축복', '관대', '이익'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충복한 복'이라고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축복'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것을 예수님께서 친히 완성하신 축복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골로새서 1장19절)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갈라디아서 3장89절)

"찬송하리로다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에베소서 1장3절)

 

바울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이와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부분적으로 그리스도의 축복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그리스도의 복을 부분적으로 전달하는 사람은 많지만 충만한 분량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전달해주는 사람이 있어야만 충만한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 덕분에 그 아들 이삭이 복을 받았습니다.

이삭이 축복을 해주었기 때문에 그 아들 야곱이 복을 받았습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요셉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복이 임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는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는 간수장이 복을 받았습니다.

요셉이 바로의 궁정에 들어가니까 애굽 전체가 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복을 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를 마칠 때 목사님이 축도로 예배를 마무리합니다.

 

평소의 신앙과 헌신과 희생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요.

헌신이나 희생이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정말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부모의 신앙, 부모의 희생이 당시에는 힘들더라도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 자식에게 충만한 그리스도의 축복을 줄 수 있다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충만한 그리스도의 축복을 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순종하고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좁은 문의 순종,  밀알처럼 썩어지는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

 

바울이 연보를 많이 가지고 가니까 그것이 충만한 복이라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복은 영적인 축복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복을 바랍니다.

부유하게 살았으면 합니다.

건강했으면 합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났으면 합니다.

편하게 살며,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다 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후회 없이 살다가 가기를 원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축복이라고 말하면 건강(장수)이나, 물질적인 번영, 명예, 또는 자녀들이 잘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주기 원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축복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을 축복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의 성도들이 복음 안에서 굳세게 서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잘 정리해서 전달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축복을 전달해 주는 복음의 집배원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로 이웃을 축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유익만 구하지말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웃을 축복할 수 있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축복을 이웃에게 전해주는 복음의 집배원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더 빼앗기 위해서 다투지만,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그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복음에는 이웃을 축복으로 인도하는 모든 비결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복음으로 이웃을 축복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축복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오직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영적인 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권세를 받는 것이 영적인 복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된 것이 ‘영적인 복’입니다.

 

우리는 세상 복을 추구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의 신령한 복을 누리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에베소서  1장 3∼6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은 하늘의 신령한 복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복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의 복을 누리겠다고 하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도 복을 누리겠다고 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복음을 위해 사용하시기 위해 복을 주신다면 그것을 당연히 누려야 하겠지만 그것을 따라가는 것은 하늘의 것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축복 하나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천국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충만한 복음의 빛을 비춰 주셨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비록 가난했지만 그에게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안에 있는 충만한 축복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