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128)
지금 나는 성도들을 돕는 일로 예루살렘에 갑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려고 하였으나, 여러 번 길이 막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지역에서, 내가 일해야 할 곳이 더 없습니다.
여러 해 전부터 여러분에게로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내가 스페인으로 갈 때에, 지나가는 길에 여러분을 만나 보고,
잠시 동안만이라도 여러분과 먼저 기쁨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의 후원을 얻어, 그 곳으로 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성도들을 돕는 일로 예루살렘에 갑니다.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낼 구제금을 마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이방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신령한 복을 나누어 받았으니,
육신의 생활에 필요한 것으로 그들에게 봉사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일을 마치고,
그들에게 이 열매를 확실하게 전해 준 뒤에,
여러분에게 들렀다가 스페인으로 가겠습니다.”
- 로마서 15장 22∼28절 -
바울은 3차 전도여행 끝 무렵 고린도에 머물면서 로마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이 서신(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 보면 로마를 방문하여 로마에 있는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곳곳에 묻어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기본 교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입니다.
또 스페인지역(서바나) 전도를 계획하며 로마교회의 협력이 필요함을 알리고 싶었기에 로마를 가려고 했겠지만, 동시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과의 교제가 바울과 그들 모두에게 큰 기쁨과 격려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기에 로마에 잠시라도 들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 방문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또 새로운 전도를 위해 스페인지역으로 가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보다 앞서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연보한 구제금을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바울은 이 일을 ‘성도를 섬기는 일’로 표현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간절히 가고 싶은 곳과 멀어지는 반대 방향의 길이었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가야만 할 만큼 바울에게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구제금을 전달하는 일은 바울의 어떠한 사역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모교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생명의 복음이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에 빚진 자입니다.
사도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영적인 것을 나누어 가졌으므로 예루살렘 교회에 육적인 것으로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서바나 선교 계획의 중간 경유지로서 로마를 바로 가야하지만 도중에 예루살렘을 거쳐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교회의 모(母) 교회로서 교회 지도자들 즉 사도들이 있는 교회이지만 지금은 핍박과 어려움 중에 있는 가난한 유대인 성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위급한 교회를 모든 교회가 협력하여 도와줄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교회에 대해 이방 교회가 지녀야 할 당연한 태도이며 그들이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에서 염두에 두었던 더 중요한 이유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성도들과 기타 이방 교회의 성도들과의 화합과 일치였을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이외의 모든 교회는 대부분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기독교 개종자 사이에는 적지 않은 충돌과 마찰이 있었습니다.
유대 기독교 신자들은 이방인 기독교 개종자 들에게 배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 가운데서 일부는 이방인 기독교 신자들에게 구약의 규례들을 따를 것을 강요하는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사도행전 15장1∼5절)
이러한 형편에서 바울은 이방인 성도들의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예루살렘과 이방 교회 간의 관계가 극복되어 견고한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형성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이전에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교인들을 돌보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하여 바나바와 함께 수리아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로부터 헌금을 거두어서 도와준 적이 있었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사도행전 11장 25∼30절)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사도행전 12장25절)
갈라디아서 2장 10절에 보면 바울은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을 자신이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이러한 이유로 인해 바울의 로마 교회의 방문이 다시 한번 불가피하게 지체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와 같은 사정을 로마 교회에 알림으로 그들로 하여금 양해를 구하고 있으며 또한 그의 이러한 모범을 따르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지금 나는 성도들을 돕는 일로 예루살렘에 갑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교회를 방문하여 가난한 성도들이지만 정성과 기쁨으로 드린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26절에 ‘가난한 자들’로 번역된 ‘투스 프토쿠스(τοὺς πτωχοὺς)’라는 단어는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거지처럼 가난하여 전적으로 동정에 의존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만 보더라도 당시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의 삶이 얼마나 힘겨웠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 예루살렘교회 가난해졌는가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본문은 설명하고 있진 않지만, 사도행전 11장 28절을 통해 유추해 볼 때 큰 흉년이 원인일 수 있었습니다.
또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핍박이 또 다른 원인일 수도 있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분명한 사실은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 가운데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생계유지가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위해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구제금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8장에 보면, 구제금을 마련한 그들은 부유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케도니아 여러 교회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여러분에게 알리려고 합니다.
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
내가 증언합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하였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구제하는 특권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우리에게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기대한 이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먼저 자신들을 주님께 바치고, 우리에게 바쳤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1~5절 새번역)
마게도냐 사람들은 큰 시련과 극한 가난에 처해있던 자들이었지만, 예루살렘의 어려운 소식을 듣자 오히려 그 성도들을 구제하는 특권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자원하여 간청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5장 26절도 ‘그들이 기뻐서 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런 사실을 편지에 담아 보내며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26- 27절입니다.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복음을 통해 영적인 부를 누리게 하심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를 통해 복음을 나누게 하셨으니 서로 어렵고 힘들 때 도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 물리적인 거리나, 이방인과 유대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을 떠나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일체감을 예루살렘 교회도, 로마교회도, 또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교회도 모두 깊이 인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려고 하였으나, 여러 번 길이 막혔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려고 하였으나, 여러 번 길이 막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지역에서, 내가 일해야 할 곳이 더 없습니다.
여러 해 전부터 여러분에게로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내가 스페인으로 갈 때에,
지나가는 길에 여러분을 만나 보고, 잠시 동안만이라도 여러분과 먼저 기쁨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의 후원을 얻어, 그 곳으로 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성도들을 돕는 일로 예루살렘에 갑니다."
- 로마서 15장 22∼25절
바울은 로마 교회에 가려고 여러 번 애를 썼습니다.
가서 아름다운 믿음의 열매가 맺히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번번이 그 길이 막혔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바울도 계획대로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바울은 물론 이 일을 계획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신중하게 작정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와 유사한 경험을 종종 하게 됩니다.
나름 고민하고 실행한 일들이 잘 안 풀리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했던 일들이 자꾸만 막힙니다.
오랫동안 숙고하고 수고한 일들이 수포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이럴 때는 정말 낙심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계획들이 하나님을 위한 일일 때는 더 낙심이 됩니다.
바울도 로마 교회를 위해 로마에 가고자 했지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인 일이 아닌 로마 교회를 위해 가려는데 자꾸만 길이 막히니 더 기운이 빠졌을 것입니다.
계획이 틀어지고 자꾸만 길이 막힐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더 놀라운 계획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장9절)
사람이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걸음을 인도하십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큰 계획이 있을 때는 내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길이 막힐 때는 뒤를 보아야 합니다.
계획한 대로 되지 않을 때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려던 계획이 여러 번 막혔지만 나중에 결국 로마에 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가게 되었습니까?
비록 죄수의 신분이었지만 로마 병사의 호위를 받으면서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비록 죄수의 신분이지만 로마의 고위층들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마 바울이 나중에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를 로마에 보내시려고 그 전에 막으셨구나!”
그렇습니다.
내 계획과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나를 위한 하나님의 더 놀라운 계획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길이 막힐 때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요셉도 술관원의 꿈을 해석해 주고 감옥에서 나가려던 계획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술관원이 요셉을 잊어버림으로 길이 막혀 버렸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창세기 40장23절)
그런데 이것이 후에 바로 왕 앞에 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감옥에서 나가는 길을 막은 것은 요셉을 위한 더 놀라운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길이 막혔습니까?
내 계획이 틀어졌습니까?
내 뜻이 실패로 돌아갔습니까?
괜찮습니다.
때때로 우리 인생길에는 모든 길이 막히고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생각으로 문제를 보게 되는 기회입니다.
육신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으로 문제를 볼 수 있는 때입니다.
길이 막할 때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막힌 길 저편에 서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순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볼 때, 막히고 풀리지 않는 일은 어려운 일이고 나쁜 일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분별하려면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기도로 서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하면 나를 위한 하나님의 더 나은 계획이 보입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게 됩니다.
길이 막혔습니까?
내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십시요.
하나님 앞에 기도로 기다리십시요.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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