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강해(21)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 고린도전서 15장35∼58절 -
알렉산더 대왕의 병세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왕실은 깊은 시름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허둥대는 주변 사람들과는 달리 알렉산더 대왕은 오히려 침착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병이 점점 더 깊어지자 왕실에서는 그의 마지막 유언이 무엇일까? 하고 궁금해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알렉산더 대왕은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힘겹게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죽거든 묻을 때 손을 밖에 내놓아 남들이 볼 수 있도록 하시오.”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초조하게 그의 유언을 기다리던 신하들은 놀랐습니다.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쥐었던 왕의 유언으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알렉산더 대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단지 세상 사람들에게 천하를 쥐었던 알렉산더도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뿐이요.”
왕이나 여염집 주부나,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노인이나 소년, 그 어느 누구도 죽음 앞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왕도 죽고 지식인도 죽습니다.
부자도 죽고 가난한 사람도 죽습니다.
배운 사람도 죽고 못 배운 사람도 죽습니다.
모든 인생은 죽음 앞에서는 다 똑같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소유하고 있으며 죽음에 포위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의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다>는 고백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하고, 살고 죽을 우리 모두에게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문제를 다룹니다.
미래의 문제, 종말의 문제를 다룹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합니다.
죽은 후에도 다시 사는 길이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1. 끊없는 희망
고대인들의 무덤을 발굴해보면 그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죽은 자의 부활을 고대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죽은 자가 먼 훗날 다시 살았을 때 쓸 수 있도록 온갖 생활필수품을 넣어 놓았고, 심지어는 시중들 사람까지 같이 묻었습니다.
물론 나라와 풍습에 따라서 그 양상은 다르게 나타났지만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은 그들이 사후(死後)의 세계에 대해 지극히 긍정적이고 소망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집트에는 왕들의 피라미드를 어마어마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무덤 속에 왕의 시체를 미이라로 만들어 썩지 않게 해 놓았습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이 언젠가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을 믿기 때문에 그와 같이 엄청난 피라미드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진시황은 인부 70만명을 동원하여 37년이나 걸려 왕성을 그대로 지하에 옮긴 듯이 거대하고 호화로움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중국의 유명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진시황은 지하수를 세 번 지날 만큼 땅을 깊이 파고 녹인 구리를 부어 동판을 깔고 그 위에 안치되었다. 능 안에는 궁전과 누각을 세웠고, 천장에는 하늘의 별과 달의 천문도를 보석으로 장식했으며 아래에는 중국의 산하를 재현하였다. 지하궁은 기계를 이용해 수은이 흐르게 하여 온갖 하천과 강, 바다를 만들고, 인어기름(도롱뇽 기름으로 추정하고 있다)으로 초를 만들어 영원히 꺼지지 않도록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후에 항우가 이곳을 파괴했을 때 30만 명을 동원하여 30일 동안 그 보물들을 날랐다고 할 정도로 그 호화로움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람의 시체를 염할 때 그 시신의 입에다 쌀 세 알을 넣어 줍니다. 죽은 후에도 부활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2. 육신의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죽어도 다시 산다는 부활을 믿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육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영혼의 부활만 믿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은 육신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가 부활할 때 어떤 모습으로 다시 살까요?
35절을 보십시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사도 바울은 앞 부분에서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을 따라 일어날 죽은 자의 부활을 확실하게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설명을 듣고 여전히 고개를 내젓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질문합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산다면 과연 어떠한 몸으로 사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이 없는 고린도인들의 질문에 36절에서 “어리석은 자여!”(36절)라고 탄식하며, 부활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를 씨의 비유, 육체의 비유, 그리고 영광의 비유,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설명합니다.
36〜38절을 보십시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밀이나 다른 씨 자체는 별 볼일이 없습니다. 전문가가 아니면 이 씨가 배추씨인지 무씨인지 구분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씨는 참으로 신비합니다.
분명히 작은 알갱이를 심었는데 그것이 싹이 나고 자라면 커다란 나무가 되고 열매가 맺힙니다.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모습들이 씨앗에서 생겨나서 각양각색의 아름다운 형체들을 만들어 냅니다.
또 39절을 보십시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육체라고 해서 다 같은 육체가 아닙니다.
돼지고기 살과 소고기 살이 다릅니다.
손바닥과 손등의 살이 다릅니다.
부위와 역할에 따라서 육체가 전혀 다릅니다.
새는 공중에서 잘 날아다닐 수 있도록, 물고기는 바다 속에서 잘 헤엄쳐 살 수 있도록 다른 살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 자기가 사는 환경과 역할에 가장 적합한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활의 형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기에 가장 알맞는 형체로 우리 몸이 부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모습으로 부활할 것인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바라던 모습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육체로 변화하게 됩니다.
40〜41절을 보십시오.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모든 피조물들은 나름대로의 영광이 있습니다.
하늘의 천체와 땅의 짐승들의 빛은 서로 다릅니다.
정오의 태양은 강렬한 빛을 발사하고, 정월의 대보름달은 은은한 빛을 발합니다.
새벽에는 샛별이 반짝입니다.
바다 속 고기들도 빛을 발합니다.
각기 다양한 빛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부활할 때에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영광스럽게 빛나게 됩니다.
해나, 달이나, 별과같이 영원토록 빛나게 됩니다.
씨앗과 육체, 그리고 영광의 비유를 통해서 볼 때 부활이야말로 모든 자연 만물의 생존방식입니다.
불변의 자연법칙이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부활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형체를 입을 것인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삽니다.
씨보다 꽃이 아름다운 것 같이, 새가 공중을 날기에 적합한 육체를 가진 것 같이, 해가 힘있고 영광스럽게 빛나는 것 같이, 우리 몸의 부활도 아름답고 영광스럽고 하늘나라에 살기에 가장 합당하게 변화되게 될 것을 믿습니다.
42〜44절을 보십시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썩을 것, 욕된 것, 약한 것 그리고 육의 몸은 현재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런 썩어지고, 욕되며, 약한 육의 몸으로 인해 절망합니다.
욕된 몸의 소욕에 반복하여 넘어지며 마음고생을 합니다.
못나고 약한 의지로 인해 울고 싶어집니다.
사람들 보기가 민망하고 내 모습을 스스로 용납할 수가 없어 그냥 지구를 떠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런 현재의 모습에 기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 문턱을 넘나들던 소년의 천국 체험기 ‘3분’(원제: 천국은 진짜로 있다, Heaven is for Real)이 있습니다. 가족 여행을 하던 중 4살 소년 콜튼 부포(Colton Burpo)는 급성맹장염으로 인해 아주 위독한 상태에서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받습니다. 맹장수술을 받고 회복된 후 몇 달 동안 그 아이가 들려준 이야기는 가족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천국여행이었습니다. 콜튼은 천국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고, 예수님을 비롯하여 예수님의 아버지(하나님)와 성령님을 만났습니다. 또한 가브리엘 천사, 세례 요한, 성모 마리아, 많은 아이들을 보았고, 예수님이 타신 말(어린 나귀)을 비롯하여 강아지, 사자 등 많은 동물들도 봤습니다. 콜튼은 태어나기 25년 전에 돌아가신 증조부 ‘팝 할아버지’를 만났으며, 또한 콜튼의 엄마는 콜튼에 앞서 임신했다가 뱃속에서 유산한 아이 곧 콜튼의 죽은 누나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번쩍이는 각종 보석들로 꾸며졌고 무지개 빛깔로 아름다운 천국에서 사람들은 크고 작은 날개를 갖고 있으며, 아무도 안경을 쓰지 않았고, 아무도 늙은 사람이 없다고 네 살배기 콜튼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의 몸에는 연약한 무릎이나 허리, 각막 건조증, 축농증, 불면증, 우울증, 당뇨병, 고혈압, 무좀, 변비로 고생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활의 몸을 덧입을 때 청춘이 됩니다.
부활의 몸을 덧입을 때 거룩하고 영적인 생각이 팍팍 솟구치고 말도 살리는 말, 공감해 주는 말을 하게 됩니다.
부활의 몸을 덧입을 때 공부를 감당할 집중력과 이해력도 부활하게 됩니다. 우리가 꿈꾸던 것이 더 이상 꿈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됩니다.
부활의 몸을 덧입을 때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우리 손안에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생명의 역사가 어떻게 가능합니까?
45∼47절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첫 사람 아담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산 영이 되었습니다. 아담은 연약하여 여자의 말을 듣고 범죄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썩고 쇠하여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담이 우리에게 준 것은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와 심판받고 멸망을 받아야 하는 영혼뿐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아담 예수님은 영원하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신령한 몸이 되셨을 뿐 아니라 살려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하늘에서 난 것과 같아집니다. 땅의 형상을 갖고 있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예수님께 속하게 되면 이제는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 됩니다.
3. 몸의 부활-죽음을 넘어선 대화
그러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육신의 책임성입니다.
살고 있는 지금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 이 지상에서의 삶이 미래의 나라에서 나의 위치를 결정지어 줍니다.
누가복음 16장에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는 옷이 귀한 시기에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를 베풀며 살았고, 반면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먹으며, 병든 몸을 이끌고 구차하게 살았습니다. 몸이 약하고 병든 거지 나사로가 먼저 죽었고, 그 다음에 부자도 죽었습니다. 죽어서 보니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죽은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는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무엇이 부자를 지옥으로 인도했습니까?
지상에서의 삶의 태도입니다.
“먹고 마시자!”는 그의 무책임적 행동은 영혼은 물론이고 육신까지 지옥으로 끌고 갔습니다.
어떻게 오늘을 사느냐가 내일을 결정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생은 이것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은 죽음을 끝으로 모두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또 다른 몸을 가진 인격으로 서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의 일생이 그 분 앞에 그대로 다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의 지나온 생은 실패, 부족, 수치감, 상처 등 실현되지 못한 생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적인 책임감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용서되고, 치유되고, 보상된 생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몸을 멸시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몸을 만들어주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비록 <몸>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죄>된 몸이긴 하지만 이 몸은 미래의 세계에서 새로운 변화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 몸은 비록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더러움과 부도덕으로 말미암아 창피를 당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몸은 또한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야 할 귀한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로마서 12장1절)
육신이 부활해서 지옥에 가느냐? 아니면 천국에 가느냐? 하는 것은 우리 인생에 가장 큰 문제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요한계시록 20장12〜15절)
성도 여러분!
<육신의 부활>은 기독교적인 구원에 대한 기대의 전체성을 나타냅니다.
성서적인 사고는 <육신의 부활>이란 형식으로써 기독교 희망의 전체적인 현실관계가 결정적으로 강조됩니다.
기독교의 종말론적 희망은 육체적인 것까지 포함하는 희망입니다.
그리고 이 종말론적인 희망은 단순히 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약속하신 폐기될 수 없는 계약입니다.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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