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강해(18)
거룩한 교회를 믿습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 마태복음 16장 13∼20절 -
미국 오클라흐마의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일화입니다.
이 마을에 새로 목사님이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도착하자마자 매우 의욕적으로 집집마다 심방을 다니며 오는 첫 주일에 자기의 설교를 들으러 오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는 정성을 다해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주일이 되자 이 목사님은 흥분된 가운데 마을 사람들을 기다렸지만 막상 예배가 끝났을 때까지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불과 두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었습니다.
다음날 목사님은 지방신문의 광고란에 조그만 안내문을 실었습니다.
“교회가 죽었습니다. 따라서 담임목사로서 장례식을 치르려 하오니 모두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례식은 오는 주일에 교회에서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신문을 보고 모두 놀라고 의아해 하다가 주일이 되자 교회로 찾아왔습니다.
교회의 강대상 위에는 관이 있고 그 위에는 아름다운 꽃이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의식에 따라 장례식을 거행하였고, 그는 마지막으로 떠나시는 분에게 조의를 표하라고 하였습니다.
조객들은 차례로 앞으로 나와 관을 들여다보고는 놀라는 표정으로 물러나곤 하였습니다.
그 관속에는 큰 거울이 들어 있어서, 그 관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각자가 본 죽은 교회는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신경의 <거룩한 공회를 믿습니다>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거룩한 공회>는 영어로는 ‘Holy Catholic Church’이며, 원전인 라틴어로는 ‘상카 에클레시아 카토리카’입니다.
여기서 카톨릭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에클레시아 카토리카’를 '공회'라고 의역(意譯)을 했습니다. 새사도신경은 '공교회'라고 햇습니다.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불러 낸 사람들의 무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불러낸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을 교회라고 합니다.
1.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Credo sancta ecclesiam)
우리는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분리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은 주변 세계와 분리되어 있고 대립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사회의 여러 단체들처럼 상호 간의 계약이나 합의, 필요와 강요에 근거해 있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와 그 계시에 대한 인식에 근거해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전제 위에서만 교회는 거룩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거룩함은 바로 교회의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반영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하여 자신의 교회를 모으고, 세우고, 파송하기 때문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참여합니다.
교회는 스스로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 고린도전서 1장2절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 빌립보서 1장1절 -
거룩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 레위기 19장2절 -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 에베소서 5장26~27절 -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들을 부르시고, 그 죄인을 의롭게 하셔서, 버려진 자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교회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공동체'는 동시에 '죄인들의 공동체'이며, '거룩하게 된 교회'는 동시에 '죄에 빠져 있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셈이 되며, 우리는 더 이상 진리 안에 있지 않다”(요일 1:8)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의 거룩함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친교 안에서 경험됩니다.
교회의 거룩함의 표지는 교회의 고난과 박해, 가난 안에서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비천함과 무력함, 가난과 고난에 참여하는 곳에서 거룩하게 됩니다.
교회의 거룩함은 교회의 가난 안에서 가장 강력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교회'가 될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는 일에 바쳐야 합니다.
2. 보편성을 가진 교회를 믿는다(Credo catholicam ecclesiam)
“우리는 교회가 카톨릭적이다”는 것을 믿습니다.
"카톨릭적"이다는 말은 "보편적"이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보편적이다"는 말은, 교회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그 동일성, 연속성, 보편성은 유지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카토리카>라는 말은 우주적 (Universal), 보편적(General)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에클레시아 카토리카>는 ‘우주적, 보편적 교회’를 뜻합니다.
여기서 보편성이란 인종, 신분, 지역, 언어, 문화, 시대를 초월해서 전 세계적으로 통일되고 하나로 일치되는 것을 뜻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교회들이 산재해 있지만 그것은 한 몸의 지체일 뿐입니다.
루터교회, 감리교회, 장로교회, 성결교회, 침례교회 등 서로 간의 교파(특별한 신앙이나 가르침을 가진 교회조직)가 다를지라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 분께 연합되어 있으며, 그 분의 지체를 이룹니다.
나아가서 이 땅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하늘의 성도들까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를 이루며 하나의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은 제99회 총회에서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위원장:임준식)가 보고한 로마(천주)교회에 대한 연구결과를 총대들이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대위는 보고를 통해 “로마교회에 대해 몇몇 노회가 이단성 여부라든가 우리교단과의 관계성을 질의해왔는데, 입장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결론적으로 우리와 다른 전통을 고수하는 교회로 보자”고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교리적으로 답한다면 로마교회에는 이단적인 요소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개혁자들이 개혁하려고 했던 부패하고 이단적이었던 로마교회가 현실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며 “그러나 로마교회가 반사회적이라거나 반윤리적인 다른 이단집단과 같다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다”는 다소 애매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교회는 서로 통하며 하나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한 몸에 비유합니다.
에베소서4장 말씀입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4~6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15~16절)
그렇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십니다.
머리에는 지체들이 딸려 있으며, 각 지체는 머리의 지시를 받음으로 하나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한 몸의 지체들처럼 오직 한 머리이신 예수님께 연합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지시를 받는 한 체질적 성향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단순히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존재형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특징을 가지기 때문에 어디서나 동일한 바로 그 자신으로 존재합니다.
이 동일성 안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로 입증됩니다.
만약 교회가 이 동일성 안에 있지 않다고 한다면, 즉 교회가 보편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함으로써, 바로 참되고 보편적인 교회가 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서 살아서 말하고 행동하는 한, 교회는 보편적인 교회입니다.
거꾸로 말해서, 만약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참된 교회는 죽게 되고 거짓 교회, 이교적인 교회로 타락합니다.
"어느 주일에 남아공화국에 있는 어떤 교회이야기입니다.
그 교회는 예배에 백인만이 참석할 수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 주일에 한 흑인이 그 교회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 때 그는 흑인이란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그는 교회 뜰 한 구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얼마 있다가 어떤 사람이 교회 마당에서 서성대고 있었습니다.
흑인이 그 사람을 자세히 보니 예수님이었습니다.
“아니, 예수님! 왜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밖에 서 계십니까?”라고 그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도 백인이 아니어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고 했답니다.
교회가 거룩성과 보편성을 포기해 버릴 때 거기에는 예수님도 역시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경고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편적인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진실되고 참된 것이 되게 하려면, 교회는 자기 시대에서 언제나 모든 사람들을 위해 문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이기심, 분열과 맞서 싸우고, 정의와 평화를 인류 전체의 목표로 지향해 가야 합니다.
3. 거룩한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
그러면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가 되게 하는 그 본질적 요소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배입니다.
예배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 로마서 12장 1절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는 종의 삶으로 표현되는 봉사입니다.
헬라어로는 디아코니아(διακονία)라고 합니다.
봉사야말로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길’ 입니다.
거룩한 교회의 길은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이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가 지향해 가는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그가 선포하신 것도 역시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보다 위에 있습니다.
교회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전망(展望)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행동하고 고난을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의 미래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미래는 세상의 미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이 세상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 안에서 새로운 인류의 시작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미래에서 그 운명이 규정지어진 무리들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들의 공동체로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 가운데 있습니다.
이러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교회,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 서 있는 교회는 그 어느 순간도 이만하면 되었다고 자족할 수 있는 순간은 없습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한 후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주 파선 사고가 일어나고 있는 어느 위험한 해안에 한때 볼품없는 작은 인명 구조대가 있었습니다.
건물이라곤 오두막 한 채뿐이었고 보트도 작은 것이 하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헌신적인 몇 명의 회원들이 끊임없이 바다를 지켰고,
그들은 자신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 밤낮으로 바다에 나가 유실된 자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많은 생명들이 이 훌륭한 작은 구조대에 의해 구조되었으며 그래서 이 본부는 유명해졌습니다.
구조된 자들 중 몇 사람과 또한 인근지역에 사는 여러 사람들은
이 구조대와 연관을 맺고 이 사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의 시간과 돈을 제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보트들을 더 구입했고 새로운 승무원들을 더 훈련시켰습니다.
작은 구조대가 점점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인명 구조대에 가입한 새 회원들 중 어떤 사람들은 건물이 너무 볼품없고 시설이 빈약하다고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다로부터 구조된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기 위해서라도 좀더 편안한 장소가 마련돼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상용 간이침대를 훌륭한 침대로 갈아치우고 확장된 건물 안에 좀더 훌륭한 가구들을 갖다 놓았습니다.
이제 그 구조대는 그 회원들을 위한 대중적인 회합 장소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을 일종의 클럽처럼 사용했기 때문에 그곳을 아름답게 다시 치장했고 멋있게 꾸며놓았습니다.
이제 회원들은 인명을 구조하는 임무를 위해 바다에 나가는 일에는 점점 관심을 잃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인명 구조원들을 새로 채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인명 구조의 주제는 여전히 클럽 장식들 가운데서 돋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클럽 가입식이 거행되는 방에는 여전히 예식을 위한 구조선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 회합 때, 클럽 회원들 가운데서 불화가 생겼습니다.
대부분의 회원들은 클럽의 인명구조 활동이 별로 즐거운 일이 아닌데다가
클럽의 정상적인 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구조 활동을 그만두기를 원했습니다.
어떤 회원들은 인명 구조야말로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하면서
계속 인명 구조대라고 불러야 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투표 결과 결국 패배했으며,
만일 그들이 그 지역에서 조난당한 사람들의 생명을 구조하기 원한다면
아래편 해안에서 그들 나름의 인명 구조대를 새로 세울 수 있다고 통보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면서, 새로 생긴 이 인명 구조대는 옛날 구조대가 겪었던 똑같은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구조대는 일종의 클럽으로 발전해 버렸고 그래서 또 다른 인명 구조대가 새로 생기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계속 반복되었으며, 만약 우리가 오늘날 그 해안을 방문한다면,
우리는 그 해안에 서로 배타적인 수많은 클럽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바다에서는 여전히 파선 사고가 자주 일어나고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대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데오도레 위델(Theodore Wedel)이 현대 교회의 실상을 비유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요점은 생명 구원하기를 포기한 교회 모순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교회는 생명을 건지기 위해, 봉사를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거룩"이며 축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 축복 받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교회를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교회는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움직이는 힘의 원동력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 가운데 있는 교회를 믿습니다.
성령의 능력 가운데 있는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대해 희망을 갖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교회의 크기, 재정의 풍부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에 대한 희망입니다.
이 희망을 가지고 사도신경을 고백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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