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강해(17)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 사도행전 2장 1∼13절 -
‘사도신경’은 초대교회 신앙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세 가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입니다.
이것을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 하나님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천지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아들 하나님'은 아버지와 함께 창조에 동참하신 그 하나님이시면서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의 몸으로 오시고 자기 몸을 십자가에 못박으신 구속의 주 하나님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아들 하나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바대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오늘까지 믿는 자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고 도와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그 본질에 있어서는 한 분이시지만 그 일에 있어서는 세 가지 모습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행하신 바에 따라 하나님을 때로는 아버지, 때로는 예수님, 때로는 성령님으로 부릅니다.
교회는 이 하나님을 일컬어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1. 성령(聖靈, Holy Spirit)은 하나님이시다
기독교적 이단들에서는 <삼위일체교리>를 부정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초대 신자들, 특히 사도들의 신앙고백이 <삼위일체>라는 교리를 확립시켰습니다.
도저히 이것은 부정할 수 없다는 신앙체험에서 만들어진 것이 ‘삼위일체’입니다.
사도들의 신앙고백을 보면,
첫째로, 사도들은 하나님의 신성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하나님이셨습니다.
둘째로, 이 세상에 그리고 이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사실, 즉 나사렛 예수를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임에 틀림없었지만, 인간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20장26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목격하지 못해 의심하는 도마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내 몸을 만져보고 믿으라’고 했습니다.
이때 도마는 예수님의 몸을 만져보기도 전에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고 고백했습니다.
도마는 3년간 인간적인 관계 속에서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셨으나,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초대 신앙인들에게 예수님은 다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인간이었으며, 또 한편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사도들과 초대 신앙인들은 오순절에 <성령강림>을 체험하고, 계속해서 교회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을 보면서 <성령> 역시 순전히 인간적인 용어로는 설명하거나 해석할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성령에 대한 체험은 성령이 단순히 비인격적인 어떤 힘이나 능력이라고 설명할 수 없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성령의 활동은 너무나 인격적인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초대 신앙인들은 하나님 안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장소가 있다고 하는 것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이같은 생각은 인간의 논리적 방식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의 강림사건 등을 통해 초대교회 성도들이 신앙고백한 것이 정리된 것입니다.
만약 이같은 삼위일체교리가 인간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왔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고쳐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사고에서 나온 것이 아닌, 체험을 통한 고백이어서 비논리적인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로지 이것은 믿음으로만 이해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이성적이 아닙니다.
계산이 아닙니다.
이치적으로 따져보니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보아야만 수긍합니다.
그러나 손으로 만져보지 못하고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은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우주에는 내가 보지 못한 것,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내가 모를지라도 있는 것은 있는 것입니다.
경험하지 못했다하여 없다고 부인해 버리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계산이 아닙니다.
내가 병고침을 받고, 내가 환상을 보고, 내가 계시를 받고, 내 주위에 확실히 이같은 것들이 일어난 것을 확인해야 믿습니다.
그것 역시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앙은 내 중심적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믿어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신 길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야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해 주셔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어 마음 문을 열어 주셔야 하나님을 알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2.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
우리는 성령을 받았다 하면 방언이나 무슨 병고치는 역사가 일어나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하면, 부흥사들의 전유물로 생각했습니다.
또 성령은 인간을 흥분시키는 어떤 신비스러운 물질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령은 부흥사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인간을 흥분시키거나 자극시키는 신비스러운 물질도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게 될 때 우리의 신앙은 혼미한 상태에 빠지게 되고, 정신적으로 병들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옛사람들은 “신들린다, 신접한다, 신내린다, 신쓰인다”는 말을 써왔습니다.
사람이 신접하는 순간에는 자의식이 희미해지고, 본래 가졌던 생각은 다 없어지고 정신이 빠져나가 버립니다.
그리고 신들린 상태에서 귀신이 지시하는 대로 말을 하며 정신이 나갑니다.
이것을 ‘접신현상’이라고 합니다.
이런 접신현상이 성령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신비주의자의 생각대로 한다면 제 정신을 잃어버리고 이상한 행동을 하면 성령충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접신적 개념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성령은 창조의 힘입니다.
창세기 1장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성령은 하나님의 창조의 대행자입니다.
욥기33장4절에 보면 엘리후가 욥에게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창조와 연관이 있음을 밝힌 것입니다.
에스겔37장에 에스겔이 마른 해골들이 가득찬 골짜기를 보았는데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겔37:5)고 합니다.
성령은 인간에게 지도력의 은사를 줍니다.
창세기41장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창41:38)라고 말합니다.
민수기 27장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민27:18)
사사기3장
갈렙의 사위 옷니엘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전쟁터에 나섰을 때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10절)
기드온도, 다윗도 다 성령을 통하여 지도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성령은 예언자와도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사야61장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사61:1~2)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구절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와 첫 설교를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여러 부분에 폭넓게 활동하십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도 대단합니다.
특히 성령에 대해 많이 언급된 책은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입니다.
요한복음은 개인생활에 대한 성령의 역할입니다.
사도행전은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계속해서 성령이 충만한 교회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역사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서였습니다.
방언을 받은 이유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고,
병고치는 역사는 선교를 위해서였습니다.
사도행전1장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처럼 신앙성경에서 성령은 선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3.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성령님은 어떤 분입니까?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요한복음4장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자신을 넘어서서 모든 것들과 자유로운 관계를 맺으실 수 있습니다.
그것들에게 자신을 개방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들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영으로서의 하나님은 얼굴을 지닌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은 인간에게로 얼굴을 돌리는 영입니다.
인간을 깨우며 활동케 하는 영입니다.
인간에게 힘을 주고 위로하는 영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기도와 영감을 일으키는 영입니다.
이러한 영 속에서 하나님도 자신을 인간에게 열어 보이시고 알리시며 나누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일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도 역시 하나님과 무관한 또 하나의 다른 신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영이신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도 역시 영이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3:17)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부활한 그리스도가 성령 가운데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확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생활’은 바로 ‘성령 안에서 사는 생활’이며, 그 반대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향해 가던 길에 바로 이 ‘영으로 존재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처음부터 바로 성령과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습니다.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아가 시험받았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능력있게 전파했습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새 창조의 기적을 행했습니다.
성령 안에서 ‘아바 하나님’과 기도했습니다.
성령 안에서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주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났습니다.
높이 들림받은 예수님은 이제 성령을 보내며, 성령 가운데서 만물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존재와 활동은 온통 성령에 의해 침투되어 있고, 성령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또 한 분의 하나님>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영’ 일뿐만 아니라 또 한 분의 신적인 존재, 주체 혹은 위격(位格)입니다.
성령을 하나님의 능력, 에너지로 생각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한 분의 신적인 주체로 생각하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위격성(位格性)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이르지 못했습니다.
위대한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조차도 성령을 하나님과 아들간의 사랑을 이어주는 ‘사랑의 끈’으로 생각했습니다.
요한은 성령을 ‘그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 분’이라고 인격적인 용어로 부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 요한복음 15장26절 -
요한이 증거하는 성령은 주체적인 분으로서 활동하는 존재입니다.
즉 성령은 우리를 위로하고, 진리로 인도하며,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고 증거합니다(요14-15장).
요한만이 아니라 다른 증인들도 성령의 주체적인 활동을 증언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가르칩니다.
성령은 우리를 감동시키고 깨닫게 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속이고 훼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욕되게 하고 슬프게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성령의 독자적인 속성과 활동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은 삼위 하나님 가운데 제 3위로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수님께서 객관적으로 이루어 놓은 구원을 예수님을 믿는 사람 각자의 구원이 되도록 적용하는 역할을 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어떤 영적인 힘이나 감화력만이 아닙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다를 바 없이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활동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로마서 8장26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린도전서 12장11절)
이와 같이 성령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요한복음 14장16절에 보면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요한복음 16장7〜8절 -
그리고 성령은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
이 같은 은사들은 교회를 세우고, 교회의 사회봉사를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은사에는 가르침, 예언, 치유, 기적, 방언 및 영 분별(고전 12:4-11; 27-20)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 고린도전서 12장 4∼11절 -
이 모든 은사들은 공동체의 공동선을 위하여 개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부름 받은 바 하나의 몸의 통일성을 강화시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엡4:4〜5).
성령 하나님은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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