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강해

사도신경 강해(19)-성도들의 사귐을 믿습니다

가족사랑 2022. 8. 1. 20:57

사도신경 강해(19)

 

성도들의 사귐을 믿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 사도행전 2장 42∼47절 -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는 좀 특이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인간관계를 수평(水平)으로 보기보다는 수직과 서열(序列)적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같은 회사에 입사했다든지, 처음 만났을 때에 학교 다닌 연도(年度), 선후배, 나이, 생일까지 맞추어 서열 속에 관계를 파악하기를 모색하는 성향이 강합니다.

학생들도, 꼭 1학년, 2학년, 3학년을 구별을 지어 놓고 있고, 교수, 부교수, 조교, 전임 강사 등 지식인 사회에서도 결코 이들의 관계는 동료가 될 수 없으며, 선후배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습니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 조직체들은 인간관계가 동료 의식으로 관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서열과 조직 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적이고, 이러한 서열과 수직적 인간관계가 질서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긴 하지만, 사랑과 협력의 공동체를 이루는 데는 결정적인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수직적이고 서열적인 관계는 서로 간의 진실한 교제가 이루어질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 분열을 가져옵니다.

이런 서열의식이나 계급의식(階級意識)이 교회 안에도 자리잡고 있다면 교회는 어떻게 될까요?

생각하기도 끔찍할 정도로 교회는 마치 주식회사와 같이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먼저 믿는 사람들이 터줏대감처럼 앉아 있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태복음 20장2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신경 가운데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것에 대한 말씀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사이좋게 지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서로 사귀고, 서로 교제하고 있습니까?

다 그렇지는 않지만, 너무 가까이 해도 재미없고, 그렇다고 멀리할 수도 없고,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고 지내야지, 괜히 교제한답시고 속에 있는 없는 말 다해 놓고 나면, 나중에 뒤통수를 친다고 하면서 목사도, 집사도, 성도도 가까이 하지 말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거리를 두고 사귀는 것이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1. 성도(聖徒)는 누구인가?

우리는 전혀 다른 환경 가운데서 자랐고,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정도 다르고, 생각도 다릅니다.

그뿐입니까?

관점도 다르며, 방법도 다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 다양한 가운데 모인 공동체 속에서 마음 한번 상하면 “당신과는 이제 끝장이야!” “당신하고는 결코 상대를 않겠어!”하고 핏대를 올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형제사랑, 참다운 우정은 어떻게 형성됩니까?

어릴 때부터 한집에서 같이 살면서 서로 싸우기도 하지만, 미움과 사랑 속에서 정이 들었기 때문에 자란 후에 더욱 사랑이 깊어집니다.

우리는 좁은 공동체 속에서 상처를 주기도 받기도 하고, 용서를 하기도 받기도 하는 가운데서 성숙하게 되며, 믿음과 사랑도 자라 가는 것이지, 서로의 부딪침이 싫어서 뒤로 물러서면 서로의 관계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성도(聖徒)>라고 불리는 우리들에게는 부딪침 가운데서 용서하고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수고가 끊임없이 요구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친히 또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까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장34절)고 저들의 잘못을 용서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聖徒)>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거룩함>이란 뜻의 근본적인 의미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입니다.

구별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은 사람을 성경은 <성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실 구원을 받았으나 늘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부족한 우리에게 ‘성도’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가 생각하면 두렵기도 하지만, 초대교회로부터 교회는 믿는 자를 성도라고 불렀고 이 말은 특별한 거부감 없이 지금까지 교회에서 사용해 왔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성도(ἅγιος, hagios, 하기오스)는 모든 신자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크리스천 형제와 동의어입니다.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골로새서 1장2절).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고린도전서 1장2절)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성도>라고 불릴 자격이 정말로 없습니다.

육신을 가지고 있으면서 세상에서 할 짓, 못할 짓 하면서 죄를 범하는 부끄러운 존재가 우리들입니다.

 

어떤 분이 교회 나오는 성도들의 종류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첫째는 원하는 감투를 안주면 교회에 나오지 않는 감투 교인.

둘째는 심방을 가서 끌어내야만 교회에 나오는 인력거 교인.

셋째는 교회는 오래 다니면서 기도 한마디 못하는 벙어리 교인.

넷째는 일이 잘 됐느니 안 됐느니 채점만 하고 문제만 일으키는 가시 교인.

다섯째는 사업상의 목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광고 교인.

여섯째는 설교만 시작하면 졸기부터 하는 묵상 교인.

일곱째는 가족을 대표해서 혼자 교회에 나오는 국회의원 교인.

여덟째는 교회의 모든 일이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몸살이 나는 사공 교인.

아홉째는 부모님의 장례식을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장례식 교인.

열째는 여가선용 정도로 신앙생활을 하는 엔조이(enjoy) 교인.

열한째는 죽도록 일만하고 말없는 종살이 교인.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참 부끄럽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처럼 부족한 우리들에게 <성도>라는 명칭이 붙여졌습니다.

이것은 비록 우리가 교회의 일원으로써 인간적인 과오나 결점을 가지고 있더라도 성도 각자가 자신의 신분을 인식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타락한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날마다 계속 회개와 순종으로 구별된 생활을 하여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거룩한 변화를 입도록 힘쓰라는 것입니다.

 

2. 성도의 교제

성도의 삶에는 진실한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교제(交際)”라는 말은 헬라어로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펠로쉽(fellowship)이라고 합니다.

필리핀에서는 교회를 펠로쉽(fellowship)이라고 합니다.

“교제”라는 말은 참여한다. 나눈다. 공유한다. 동업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때로는 결혼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적 의미의 <코이노니아>는 일반적인 의미보다 차원이 높습니다.

이 말은 공동(共同), 관여(關與), 재정상의 은혜(恩惠), 참여함, 동정(同情), 기부(寄附) 등입니다.

세상적인 공동체는 비록 민족, 동창, 부부, 친구관계라고 해도 그 근본에 있어서는 한시적이고 남남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세상적 공동체는 언제든지 이해관계에 따라 갈등, 적대감, 분열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성도의 교제>는 그 뿌리가 깊고 신비스럽습니다.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를 라틴어로 옮기면 ‘콤뮤니오(communio)’라고 합니다.

여기서 영어의 ‘communion’이 나왔습니다.

성찬식을 일컬어서 ‘Holy Communion’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나라 말로 옮기면, ‘거룩한 교제’가 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성도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 에베소서 4장4~6절 -

 

성도간의 관계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작된 관계라는 말입니다.

성도간의 교제는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매는 끈’으로 맺어져 있는 관계입니다.

‘한 몸의 지체’로서 연합되어 있는 관계입니다.

‘같은 세례’를 받은 관계입니다.

‘같은 믿음’, ‘같은 가치관’ ‘같은 소망’을 가진 동지적 관계입니다.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영원한 가족공동체의 관계가 성도의 관계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간의 관계는 세상을 초월한 것이며, 위에 계신 하나님께 그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끊어질 수 없는 영원한 관계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나 있는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그러한 교제를 봅니다.

사도행전 본문에 나타나 있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보십시오!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습니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성전에 모여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날마다 더 했습니다.」

이상에 열거한 내용들이 모두 성도의 교제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만약 성도의 교제가 없었다면 이러한 일들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표적, 물건의 통용, 소유의 분배, 떡을 뗌, 하나님 찬양은 외적으로 드러난 교제의 표현들입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에서도 보십시오!

「예루살렘 교회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 했습니다.

이들은 날마다 성전이나, 또는 자기 집에서 함께 모였습니다.

그들은 그 모임에 별로 가고 싶지 않는데 모인 것이 아닙니다.

그 모임 속에는 생명과 기쁨이 있기에 만나고 싶어했고, 함께 찬양하며, 기도하고 싶어했습니다.」

 

- 성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1650-1699) -

초대 교회에 <라우렌티우스의 전설> 이야기가 있습니다.

라우렌티우스(Laurentius)는 초대교회 집사였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빈민을 구호하는 일에 헌신적으로 종사했습니다.

AD 258년 기독교 박해 때 그는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있는 하늘의 보화를 관리한다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황제는 그 보화들을 내놓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라우렌티우스는 돌아가서 그가 돌보아준 사람들을 불러모았습니다.

그들은 병자들, 불구자들, 마비된 자들, 절룩거리는 사람들, 간질병 환자들, 나병환자들이었습니다.

라우렌티우스는 그들과 황제 앞에 나아갔습니다.

“황제께서 탐내는 황금은 수많은 범행의 원인입니다. 그 빛은 사람들을 속입니다.

진짜의 보화는 세계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황제의 눈에는 이들이 비참한 무리로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빛의 자녀들이고, 교회의 보화이고, 교회의 금, 진주, 보석입니다.”

총독은 이에 격분하여 불타고 있는 장작더미 위에 석쇠를 얹고

라우렌티우스를 그 위에 구워 죽이는 참혹한 형벌에 처했습니다.

라우렌티우스는 오랫동안 고통을 겪은 뒤,

! 한쪽은 다 익었으니 좀 뒤집어주시오.” 하였고,

잠시 뒤에는 “이제 다 익었으니 잡수시오.” 하고 농담을 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렇게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이 이야기는 교회에서 성도의 교제는 어떤 방향이어야 하는가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공동생활이 어떤 현실적 관계를 가져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연대적인 형제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초대교회는 서로를 위해 살았습니다.

모두를 위해 살고 모두를 위해 존재했습니다.

거기에는 모두를 위한 즉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인, 부자와 가난한 자의 자리가 있습니다.

이 형제적인 공동체는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구체적인 관계에 있는 가난한 자들, 실패한 자들, 버림받은 자들, 차별대우를 받는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관심만이 아니라 그들과 삶을 함께 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이 공동체에서 이들은 교회의 보화들이었습니다.

 

3. 우리의 교제는 어떠해야 하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성도들 간에 사귐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사귐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이 집 저 집에 모여 떡을 나누면서 성도들의 사귐을 끊임없이 계속했습니다.

이것이 복음 전파와 교회발전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성도들과의 사귐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까?

혹시 성도들 간에 불화를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미워하고 시기하지는 않았습니까?

서로 돌아보며 사랑하는 일에 무관심하거나 귀찮아하지는 않았습니까?

지금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무관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일등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살벌한 구호가 우리의 의식을 옭매는 무한 경쟁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교회 공동체도 인간적인 욕망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교회는 현실적으로 분명히 온전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 철저하게 깨닫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무미건조한 세상에서, 자기만 아는 교회에서도 서로의 허물과 부족함을 사랑으로 덮어주고, 진리 안에서 살아가게 용기를 북돋워 주는 성도들이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도들의 사귐을 믿습니다”는 고백에서 새로운 희망의 삶을 내다봅니다.

우리는 낙심하거나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겁쟁이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을 통해서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뻔뻔스럽게 스데반을 비롯한 성도들을 순교의 자리로 내몰았던 사울을 통해서도 세계 선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모순투성이인 현실 교회를 통해서도 당신의 일을 차근차근 이루어가십니다.

물론 하나님께는 우리말고도 다른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세상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우리들, 세상 사람들에게 왕따 당하는 우리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계속하십니다.

 

오늘날 세상에서는 성공, 성취, 권력, 돈, 가치 있는 것들을 추구합니다.

대개의 경우 부자, 특권자들, 성공한 자들,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중심에 놓습니다.

가난한 자들과 노인들, 약한 자들과 실패자들, 비생산적인 자들은 변두리로 밀려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변두리로 내몰려 있는 작은 이들이 교회의 중심입니다.

가장자리에서 쪼그리고 있는 작은 자들이 교회의 보화입니다.

그 난장이들이 중심에 설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사랑받는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날로 증가하는 가정 붕괴와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인간생활에 가장 필요한 사귐의 능력을 상실해 가는 시대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는 믿는 우리는 오늘도 ‘성도들의 사귐을 믿습니다’고 고백한 사도들의 전통을 이어가는 성도로 살아갑니다.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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