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강해(22)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시편 133편
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요한일서 5장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오늘로 사도신경의 마지막 진술인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는 사도들의 고백에 도달했습니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전 인류가 언제든지 고대하고 갈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이 너무 괴롭고 귀찮아서 빨리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사람이나, 그 외의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비정상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정상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죽지않고 영원히 살기를 원합니다.
<영생(永生)>은 우리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이요,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망은 시대와 인종을 뛰어넘어 있습니다.
불교의 <영생>은 심리적으로 현실을 피해 보려는 데서 출발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죽음의 공포와 죄악의 세상에서 벗어남으로 해서 영생을 누리고자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절에 가면 불상이 있는데 그 머리가 마치 곱슬머리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달팽이를 형상화한 것인데 달팽이는 번뇌를 상징합니다.
즉 머리에 갖가지 번뇌를 가득 얹고 있다는 뜻입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꽉 차있는 인생의 괴로움을 상징하여 머리를 그렇게 만들어놓았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解脫)-니르바나>라고 합니다.
백팔번뇌가 사라지고 마음의 안정을 이룩한 상태를 말합니다.
<해탈>은 고통에 대한 냉정한 자세를 가지고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고대 스토익 학파에도 영혼불멸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육신의 영생은 믿지 않았습니다.
인격적인 불멸이 아니라 영적인 것의 불멸이었습니다.
플라톤도 영혼불멸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인간은 영혼과 육체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두 가지 중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이라고 했습니다.
육체는 영혼을 잠깐 담아두는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육체의 기능이 다하여 죽으면 영혼은 이런 죽음에 머물지 않고 여러 신들의 도움을 얻어 영주할 복지를 찾아 행진한다고 했습니다.
그곳을 <실재의 평원>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도달하면 행진은 끝나고 안식이 시작되는데 그곳이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모든 영생사상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영생과 다릅니다.
1.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永生)
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때, 영생의 가르침은 구약보다 신약이 훨씬 더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영생사상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의 창조물의 주관자요, 사람을 멸망과 노예생활에서 구출해주신 구속자라고 믿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사람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다는 것보다는 훨씬 낫게 지었다고 합니다.
시편 8편에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 시편8 편 4〜5절 -
전도서 3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 전도서 3장11절 -
이처럼 성경에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멸망에서 구출해 주시고, 천사보다 못하지만 다른 존재보다 낫게 지으시고 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현세를 넘어 내세를 보도록 만드셨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구약이 보여주는 확고한 영생관은 욥기 19장에서 발견됩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 욥기 19장25〜26절 -
이사야 26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 이사야 26장18절 -
다니엘 12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 다니엘 12장2〜3절 -
신약성경에는 영생에 대한 가르침이 구약보다 더 많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구약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영생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몇 가지 견해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죽음 후에는 즉시 기다리는 시간과 영혼의 잠자는 시간이 있으며, 그 후에 일반적인 부활과 최후의 심판이 있다고 합니다.
루터가 이것을 믿었습니다.
이 견해는 여러 번 신약성경에서 죽은 자에 대해 ‘잠 잔다’는 구절에서 나타났습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실 때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마태복음 27장51〜53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기별을 받고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한복음 11장11절)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죽은 자를 잠자는 자라고 했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 데살로니가전서 4장13〜14절 -
이처럼 죽음은 다음 세계를 기다리는 시간이며, 영혼의 잠을 자는 시간입니다.
두 번째 견해는 천년왕국사상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20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천년왕국세계에서는 세계의 종말이 두 단계에 걸쳐서 옵니다.
우선 신앙을 위해 죽은 순교자들의 부활이 있습니다.
이 부활이 천년동안 천년왕국을 기다리는 동안 계속될 것입니다.
이 기간동안 악마는 포박되고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다스립니다.
그리고 천년왕국의 기간이 끝나고 악마가 놓여지고 마지막 최후의 결전이 있는데 그 끝에 가서 악마는 불못에 던짐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부활이 있고, 최후심판이 있고, 악한 자들은 불못에 던짐을 받을 것입니다.
셋째는 죽음과 최후심판 사이에는 상당히 오랜 기간이 있다는 견해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요한복음 14장2〜3절 -
초대교부 오리겐이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성도들이 죽으면 낙원이라고 일컬어지는 어떤 곳에 가서 교실이나 학교에서처럼 교육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청결하고 이해력의 훈련을 받은 자는 일어나 하늘을 지나서 여러 단계를 거쳐 하늘나라에 도달한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본 천국'(펄시 콜레, 1997년)이라는 책에도 이같은 주장이 있습니다.
네 번째, 죽자마자 중간적인 단계도, 잠도 시련도 없으며, 영혼은 즉시 축복의 세계 또는 수치의 세계에 가게 된다는 견해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23장43절)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 빌립보서 1장 23〜24절 -
히브리서 9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장27절)
이처럼 신약성경에는 크게 4가지 영생에 관한 견해가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죽은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바로 <이것이다>고 얘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죽은 후에도 생명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확실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후(死後)의 삶이 언제 시작하며, 그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성경은 '사후의 세계는 존재한다'고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2. 희망의 미래 - 죽음 후의 삶
신앙 안에서 보는 죽은 후의 삶은 무덤에 들어가서 썩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친교 가운데 있는 희망의 미래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미래가 열려져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생을 살아갈 때 무덤만 보고 살아가는 사람과 무덤 저편 영원한 생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미래가 있습니다.
영원한 지평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습니다.
영원으로 이어지는 길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 그 유한의 장벽을 넘어 영원한 삶을 약속으로 받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 우리의 생의 과거, 현재, 미래가 어떻게 달라딜까요?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 골로새서 3장1〜4절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생은 이 현실의 생으로 마지막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은 죽음을 끝으로 모두 폐기(廢棄)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몸이 다시 사는 것 뿐 아니라 영원히 삽니다.
죽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폐기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삶을 그 어떤 피조물도 와해시킬 수 없습니다.
영원 가운데 있는 우리의 삶은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 가운데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교제는 오직 사랑 그 자체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죽음 후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 고린도전서 13장12〜13절 -
그렇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영원한 삶과 연결됩니다.
영원한 삶은 사랑이 없이 생각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영원한 삶의 기초이고 근본 성격입니다.
요한일서 4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 요한일서 4장16절 -
사랑은 띠입니다.
오늘의 삶과 내일의 삶을 연결해 줍니다.
어제의 그리스도 사건과 오늘의 기독교적인 삶 사이를 연결해주는 다리가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3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 요한일서 3장4〜5절 -
오늘과 그리고 마지막 날에도 이웃이 없는 영원한 삶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삶을 믿는 우리 공동체의 방향은 다른 곳이 아닙니다.
형제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그들을 껴안는 것입니다.
형제자매(兄弟姉妹)를 무시하는 그곳에는 영원한 삶에 대한 열정이 깊다하더라도 영원한 삶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 133편은 짧지만 우리에게 깊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모든 것이 부분적이고, 또한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세계가 분명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으며, 그 세계는 희망의 시간이며, 사랑의 장소가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설레는 기대감으로 영원한 세계를 기다리십시오!
마지막으로 <죽음을 바라보며>라는 기도를 들려 드리면서 말씀을 마칩니다. 평안!
죽음을 바라보며
제게 손을 놓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승의 삶을
부여잡으려는
저의 환상과
두려움과 집착과 열망을
당신은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저는 믿습니다.
당신께서 보시기에
가장 좋을 때
당신께서 저를 부르실 것이라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당신 사랑이 제가 미처 끌어안을 수 없는 기쁨을
제게 마련하시리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저의 모든 잘못들을 용서하시리라는 것을.
그런데, 그런데,
아직도
부서진 장난감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아이처럼
저는 손을 놓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고 낯선 까닭에 무섭습니다.
당신이 제게 빛을 약속하신 그곳에서
저는 단지 어두움만을 바라봅니다.
참 삶이 시작되는 그곳에서
저는 단지 삶의 끝장만을 바라봅니다.
당신은 저의 인간적인 집착을 이해하십니다.
저의 불안전한 감각을 이해하십니다.
저를 지으시고 자라게 하신 분은 바로 당신이시기에.
제게 느낌과 환상을 주신 분도 바로 당신이시기에.
당신은 보고 계십니다
제가 붙잡혀서,
이끌려서
제가 알지 못하는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함을.
저의 기력은 쓰러지고
저의 총명도 소용이 없습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저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당신만이, 오로지 당신만이
끝없는 사랑이시기에
늘 그러하셨듯이 제 곁에 함께 계실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고독한 여정의 황혼에서.
당신께서 저를 붙잡으시고
저를 이끄시며,
저를 받아들이시고
저의 부서진 형체를 다시 맞추실 것입니다.
저는 아무런 비밀이 없습니다
두려움이나 부족한 답변을 감추지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약함과 힘없음과 두려움이
당신 앞에서는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것도 부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다시 태어나기를 원합니다
당신 팔 안에 잠들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빛 안에서 깨어나기를.
저는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무한히 자비하신 나의 하나님
저는 믿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눈이 볼 수 없고 귀가 듣지 못하는 것을
당신께서 죽음 너머에 저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것을.
당신 이름 안에
저는 내어놓습니다
생의 남은 시간을.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여기 대령하였나이다
저의 마지막 여정에 내내 함께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영원히 당신과 함께 머무를 집으로.
- 조 만나스-Joe Mannat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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