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112)
비판하지 말라
-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도 받아들이셨습니다 -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 로마서 14장 1〜10절 -
교회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신자들 간에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같은 믿음을 가진 신앙공동체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똑 같을 수는 없습니다. 획일적일 수는 없습니다. 로마교회 성도들은 특히 서로 다른 의견과 생각 때문에 충돌이 많았습니다.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업신여기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서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고 시끄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교회가 과연 어떤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왜 성도들이 서로를 비판하지 말고 서로를 영접해야 하는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당시에 신자들 가운데는 고기를 먹을 것인가 안 먹을 것인가 가지고 논란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시장에 나온 고기 중에는 우상의 제단에 바쳐졌던 고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결케 하신 것이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 하면서 마음껏 고기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예민한 사람들은 ‘어떻게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을 수 있는가? 부정하다’ 하면서 아예 고기를 안 먹고 채소만 먹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끝나면 괜찮은데 자유롭게 고기를 먹은 사람이 못 먹는 사람을 자꾸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믿음이 없어. 괜찮아. 먹어” 하면서 고기 먹는 것을 믿음과 연관시켰습니다.
그러니까 또 고기를 안 먹는 사람은 고기 먹는 사람을 비판하였습니다.
“부정한 사람!. 어떻게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먹는가?”
이로 인해서 로마교회는 고기파와 채소파가 나뉘어서 서로서로 비판하고 정죄하는 분위기가 난무했습니다.
주일예배 끝나고 식사할 때도 고기파는 식당에서, 채소파는 소강당에서 따로 모여서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만 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사건건 의견충돌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곳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어떻게 권면합니까?
3절을 다시 보십시요.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바울은 서로서로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다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용감하게 고기를 먹는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또 채소만 먹는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동일하게 사랑하시고 똑같이 영접하십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나만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저 사람도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각 사람을 세우시는 권능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누구라고 함부로 남의 종을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을 세우고 평가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판단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5절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 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당시에는 음식문제 뿐만 아니라 <날>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구약에서는 날과 절기를 중요시 여겼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안식일, 월삭일, 대속죄일, 유월절, 칠칠철, 장막절 등 중요한 날과 절기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과 절기를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속죄 제사를 다 드리셨기 때문에 절기와 날을 그렇게 중요시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이것들을 중요시 여기고 지키고자 애를 썼습니다.
이로 인해서 '날파'와 '비날파' 사이에 분란이 있었습니다.
이 문제도 누가 옳고 누가 그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증할지니라’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신앙양심에 따라 결정할 문제이지 옳고 그름을 따질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절과 8절을 보십시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우리가 정말 교회에 화평을 원하고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가 없어야 합니다.
자기 생각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자기 스타일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자기 고집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자기 중심성을 극복해야 합니다.
내 뜻대로 하고 싶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내 취향대로 일을 하고 싶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한사코 하나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제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내 취향도 주님 만큼이나 다양해져야 합니다.
내 스케일도 주님만큼이나 커져야 합니다.
내 이해의 폭도 주님만큼이나 넓어져야 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품고 섬기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자기가 온전히 없어지고 철저히 죽으시고 땅에 묻히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로서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넓으신 분이십니까?
산 자와 죽은 자를 다 품으셨습니다.
예수님 품에 안 들어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니고데모에서 사마리아여인까지.
문둥병자에서 세리레위까지.
유대인의 서기관에서 이방인 백부장까지.
남녀노소, 빈부귀천,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다 품으셨습니다.
우리각자도 얼마나 다양하고 문제가 많지만 다 품으셨습니다.
중풍족속, 세리족속, 사마리아 족속, 거라사족속, 돌탕(돌아온 탕자)족속까지 다 품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모든 사람을 다 품으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온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정말 모든 사람을 품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나의 알량한 자존심, 나의 개떡 같은 성격, 내 똥고집. 다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배추가 김치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금물에 들어가서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숨이 팍 죽어야 합니다.
제 아무리 좋은 배추라도 그 뻣뻣하고 쌩쌩한 상태로는 절대로 맛있는 김치가 될 수 없습니다.
배추 그 상태로는 양념을 품지 못합니다.
맛이 배겨들지 못합니다.
배추가 맛있는 김치가 될려면 소금물에 들어가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소금물에 절군 배추는 볼품이 없습니다.
크기도 작아집니다.
그러나 그때에야 비로소 배추가 부들부들해져서 각종 양념도 품고 맛이 배겨 들어서 감칠맛 나는 김치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처음에는 얼마나 까칠하고 자기 주장이 강했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뒤에도 그의 강한 성격 때문에 수시로 동역자들과 부딪혔습니다.
마가를 데리고 선교여행을 가는 문제로 바나바와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먹다가 유대인들이 오자 좀 피했다고 해서 베드로를 막 책망했습니다.
자기보다 훨씬 선배인데 막 야단쳤습니다.
초기의 바울은 마치 뻐신 배추처럼 드세고 거칠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고린도전서 9장 19-2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이방인들에게 이방인같이 되고자 한 것은 이방인들을 얻고자 함이라.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라”
후기에 바울은 정말 부드럽고 온유한 목자가 되었습니다.
엄청나게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자기 스타일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자신을 맞추고자 애를 썼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바울이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겠습니까?
우리가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위장이 좋지 못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마도 여러 종류의 양들을 감당하느라 속병이 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바울은 자기를 부인하고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영접하느라 속앓이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모습에서 후에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냄새가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바울처럼 자기가 죽고 모든 사람을 품고자 할 때에 예수 냄새가 나는 작은 예수들이 될 줄 믿습니다.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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