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111)-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가족사랑 2022. 7. 20. 17:34

로마서 강해(111)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 로마서 13장 8〜14절 -

 

 

바울이 로마서를 쓸 무렵인 A.D. 50년 후반, 로마의 크리스천 공동체의 가장 큰 현안은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과의 관계문제였습니다.

로마서를 쓸 무렵, 유대 그리스도인은 비록 소수였지만, 로마교회의 창립교인들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교회에 영향을 주려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의 신앙과 정체성의 표현인 율법, 할례, 음식법, 절기 등을 여전히 신앙생활에 유효한 것으로 여겨 계속 유지하려고 했지만, 이방 그리스도인은 이것들을 배제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로마교회의 상황과 관련하여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을 계속 져야 한다는 것과 사랑이 바로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단순히 윤리적인 명제가 아니라 바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구현이기 때문에 바울은 이 사랑을 통해 로마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의에 이를 자가 하나도 없으며, 하나님만이 이 율법의 요구에 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느니라(롬10:4)는 말씀은 사랑이 율법의 완성임을 나타내며, 그 사랑을 이루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임을 의미합니다.

 

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라고 합니다.

사랑의 빚은 져도 다른 빚들은 지지 말고 살아야합니다.

빚을 지면 얼마나 부담이 됩니까?

잠언 22장7절에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빚을 지게 되면 그 빚을 다 갚지 못하는 한 채주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빚을 지고 살면 안 됩니다.

그 빚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빚을 다 갚아버리면 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빚은 질 수 밖에 없고, 성도라면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사랑의 빚을 갚아 낼 수 있다면, 사랑도 갚아버린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조건이요 거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어떤 사랑을 받았습니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갚자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 갚지는 못해도 만분의 일이라도 갚자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갚으라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 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받았기에 빚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랑의 빚은 부담이 아니라 감사입니다.

 

‘빚’은 피차에 그리 유쾌하지 못합니다.

빚이 주는 고통과 괴로움은 우리가 생활 속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빚이든지 빚에 허덕이며 사는 사람은 어서 속히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빚은 우리로 억매이게 하며 자유를 뺏아갑니다.

 

빚을 지지 말라는 것은 받기만 하지 말고 자유 가운데 베풀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빚을 지면 부담스럽지만, 베풀면 자유하고 또 유쾌합니다.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라’고 할 때, “피차”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피차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받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랑받기만 하는 것 아닙니다.

사랑을 줄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가정, 이런 교회, 이런 민족, 이런 세계가 행복합니다.

사람 살만한 공동체, 세상이 됩니다.

 

“빚을 지지 말라”는 부정적인 지침은 서로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훨씬 더 긍정적인 채무로 바뀝니다.

그런 후에 신뢰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기본적인 규범들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9절)는 구약에 있는 모세의 명령으로 종결됩니다.

 

그래서 본문을 잘 살펴보면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사랑 계명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적극적인 사랑 계명이 서로 대조되는 구조를 이룹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10절)

 

본문에서 ‘빚을 지지 않으려는 바람’과 ‘서로 사랑하라’는 두 구절의 결합이 나타내는 효과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책무일 뿐만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받은 사랑에 대해 ‘응답해야만 하는 책무’이기도 하다는 뜻을 분명히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바울이 사랑을 빚이라고 말하는가? 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의 빚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가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 커서 우리가 갚으려 해도 다 갚을 수 없기에 빚이라고 한 것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는 말씀에는 두 가지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처럼 사랑으로 율법이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비롯한 모든 실천윤리의 최고인 사랑을 몸소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셨으므로, 그 사랑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이 됩니다.

둘째는 율법도 지켜야 의미가 있는 것처럼, 사랑도 실천할 때 율법이 완성됩니다.

복음도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는데, 이 사랑의 요구에 순종하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입니다.

 

9절에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고 하는데, 그것은 8절에 언급된 ‘잘 알려진 계명들’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십계명 중에서 7, 6, 8, 10번 계명을 인용합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라고 하는데, 방금 인용한 계명들이 유일한 계명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계약 유대교의 근본적인 계명 또는 십계명 및 여타의 것을 지키는 경건한 유대인에게도 사랑 명령의 중요성을 일깨워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말라”는 계명과 “사랑하라”는 계명을 대조하여 언급합니다.

이것은 네가 율법을 지킬 것이냐 아니면 사랑의 계명을 지킬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자들이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 받은 사랑을 입증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실 이것은 부정적인 형태의 황금률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유익을 적극적으로 도모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말하고 있는 사랑이며, 그것이 바로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고 도리어 유익을 구하여 사랑을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악을 행치 않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를 다 이루셨기에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이웃을 이롭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웃이 이익을 누리도록 돌봐주는 것입니다.

이웃이 이익을 누리도록 돌봐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는 첫 번째 모습은 섬김이 되어야 합니다.

 

1. 사랑은 섬김이다

섬김은 섬기는 사람이 주체가 아니라 섬김은 받는 사람이 주체입니다.

섬김은 높아지는 마음이 아니라 낮아지는 마음입니다.

섬김은 내 것을 챙기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의 것을 챙겨주는 것입니다.

섬김은 내가 먼저가 아니라 이웃이 먼저입니다.

섬김은 자신의 유익을 먼저 구하지 않고 이웃의 유익을 먼저 구합니다.

섬김의 삶은 주인 된 삶이 아니라 종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섬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무리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섬김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0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8절)

예수님은 섬기기 위해서 일생을 사셨던 분입니다.

섬기기 위해서 태어나셨고, 섬김으로 일생을 사셨고, 결국은 자신의 목숨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섬김의 삶이 무엇인지 그리스도를 통해서 배웁니다.

우리 보통 사람의 논리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삶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많은 신앙의 선각자들이 바로 그런 삶을 살다 갔다는 것입니다.

 

-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 1910-1997) -

테레사 수녀는 가톨릭의 수녀원장이자 성녀, 인도의 사회운동가, 노벨평화상 수상자입니다.

1979년 12월10일 노벨평상을 수상하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저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청빈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배고프고, 벌거벗고, 집이 없으며, 신체에 장애가 있고, 눈이 멀고, 질병에 걸려서, 사회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하고 거부당하며 사랑받지 못하며 사회에 짐이 되고 모든 이들이 외면하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 상을 기쁘게 받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어느 날 한 어린이의 상처를 지극한 정성으로 치료해주고 있을 때 이웃 주민이 물었습니다.

“수녀님, 당신은 당신보다 더 잘 살거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편안하게 사는 것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안 드시나요. 당신은 평생 이렇게 사는 것에 만족하십니까”

그러자 테레사 수녀는 “허리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습니다”고 대답했답니다.

테레사 수녀는 젊은 시절 캘커타의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창문 너머로 거리의 한센병 환자들을 계속해서 주시했습니다.

“나는 그들의 눈에서 두려움을 보았습니다. 적절한 의료 혜택을 받아본 적이 없는 두려움,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두려움을 보았습니다”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그녀는 그러한 두려움을 마음속으로부터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마침내 결심했고 수녀원이라는 안전지대에서 벗어나 거리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평화의 집을 지었습니다.

그녀는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약 15만 명의 한센병 환자들에게 의료혜택을 주고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하나님 품에 안겼지만 온 세계 사람들이 종교를 초월해서 그녀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습니다.

남을 위해 봉사하면 삶이  의미 있게 됩니다.

 

2. 사랑은 나눔이다

예수님의 삶은 나누는 삶이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너 가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나누는 것에 인색하여 제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일생동안 자신을 나누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목숨까지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것이 그분의 삶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나눔은 영어로 “도네이션(donation)”이라고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것, 기부 또는 기증이라고 합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 선생이 설교를 하고 있었는데 그 곳에 욕심 많은 한 분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웨슬리 선생은 설교 중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할 수 있는 대로 돈을 많이 버시오!"라고 하자 그는 "아멘, 아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할 수 있는 대로 전부를 저축하라."고 역설하였습니다. 그 때도 그 부자는 얼굴에 미소를 띄고 좋아라고 "아멘."을 연발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웨슬리 목사님이 "할 수 있는 대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말씀하자 그 부자의 입에서는 아멘 소리가 나오지 않고 갑자기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 존 웨슬리(John Wesley, 1705-1791) -

 웨슬리 목사님은 영국 개신교계에서 감리교 운동을 시작한 인물로, 영국과 미국의 감리교 창시자입니다.

19세기 성결 운동과 20세기 오순절 운동 및 기독교 사회복지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유명한 말씀 중에 하나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남보다 더 많은 물질의 축복도 받고, 더 많이 저축을 했다가 할 수 있는 대로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웨슬리의 정신이 현대 기독교의 정신으로 발전되었습니다.

 

나에게서 넘치는 것, 남아도는 것은 쌓아둘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야 합니다.

넘치는 것을 붙들고 있는 것, 그 자체가 죄입니다.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흘러가는 것은 자연의 순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넘치고 있다면 흘려보내야 합니다.

넘치는 것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면 이것을 할 수 있습니다.

내 삶속에서 흘려보낼 것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필요한 것만 남겨놓고 다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가지고 가지도 못할 것을 붙들어 있으면 안됩니다.

흘려보내야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돈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물건일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지식일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기술일수도, 힘일수도, 시간일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 이웃에게로 흘러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어느 계명이 제일 큰 계명입니까?라고 묻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장37〜40절)

이웃을 사랑하면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