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99)-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가족사랑 2021. 12. 29. 23:57

로마서 강해(99)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

- 로마서 12장 14〜17절 -

 

 

12절과 13절에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끼리 가져야할 신앙 덕목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고 사는 성도들의 개인적인 의무와 교회에서의 의무에 대한 교훈입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림에 있어서 누구에게나 사랑으로 대하며,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형제, 자매들과 우애하며 존중히 여기고, 봉사할 때에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갖고 부지런히 하라고 했습니다.

좀 어려운 일을 만나면 참고 기도에 힘쓰며, 성도들과 교제하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대접하라고 했습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

오늘 14절에는 우리의 이웃, 특히 불신자와의 관계에서 가져야할 신앙인들의 자세를 말씀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신앙의 사람끼리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불신 이웃과의 관계도 참 중요합니다.

우리의 이웃이 다 좋은 사람들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들, 거래처 사람들, 우리 이웃집 사람들 모두가 좋은 성품의 사람들이 모두 에티켓을 지킬 줄 알고,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이웃 가운데는 이런 사람들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피해자인 사람이 가해자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을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의 교훈은 원수들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도록 합니다.

14절을 보십시요.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여기 ‘축복한다’는 단어, '유로게오'(ελογετε) 는 '좋게 이야기 한다, 잘 말하다'는 뜻입니다.

장례식에서 ‘조사(弔辭, eulogy)’를 할 때, 쓰는 단어가 이 단어입니다.

죽은 사람을 앞에 놓고 조사를 하면서 나쁘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좋게 이야기해야지, 나쁘게 이야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축복하라' 는 단어가 이 짧은 문장 속에 두 번이나 등장합니다.

누구를 축복하라고 하십니까?

나를 박해하는 자들입니다.

 

- 제롬((Jean-Léon Gérôme, 1824-904)이 그린 기독교 순교자의 마지막 기도 -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만해도 예수 믿는다고 하면, 화형장에서나 원형경기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처참하게 순교를 당했습니다.

역사의 박해 현장에서 네로 황제는 기독교인을 원형경기장의 굶주린 사자 밥으로 삼고 즐기며, 그 시신을 불태워 정원을 밝혔습니다. 303년경에 갈레리우스 황제는 다른 신전에 성도들을 산제물로 바쳤습니다.

19세기 프랑스 화가 제롬이 그린 <기독교 순교자의 마지막 기도>라는 그림을 보면 원형경기장 내에 일단의 기독교인들이 모여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한편에는 밀림의 왕자 사자가 그들을 노려보고 있습니다.

기도가 끝나면 사자 밥이 된다는 그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들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할 수 있겠습니까?

저주를 퍼부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비극적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성경을 말합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축복하다'라는 유로게오는  '칭찬'의 의미가 강합니다.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고, 칭찬하고, 좋은 말로 이야기하는 것이 성도가 담아두어야 할 말입니다.

행여 저주나 비난, 또는 멸시하는 말은 입에 담아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이웃을 험담하고, 비난하고, 저주하고 멸시하는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마태복음 5장39-41절).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복음 5장44절)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누가복음 6장28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의 팔복 가운데 마지막 복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의 복>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태복음 5장12절)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욕먹게 되면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은 일 하는 것이 힘드는 것이라기 보다, 일을 마치고 난 후에 왈가왈부하는 성도들의 이야기로 인하여 힘듭니다.

그런 말을 듣고도 참는 것 까지가 힘듭니다.

특히, 헛 소문을 퍼뜨리거나, 헛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처음 들으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장 가서 두들겨 패고 싶습니다.

그런 상황에 말씀은 우리에게 "꾹 참으라!"고 합니다.

오히려 그를 위하여 칭찬할 내용을 찾아 '기쁨으로 칭찬하고, 축복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끊임없는 박해 속에 사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를 지시게 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그늘 아래 쉼을 얻는 우리는 예수님의 발차취를 따라 박해받는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미워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한다는 것은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복수하고 싶은 사람을 오히려 위해 기도하고 축복한다는 것은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에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그를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며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를 좋아하는 사람 열 명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를 핍박하는 원수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하늘에서 상이 클 것입니다.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성경은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합니다.

남을 저주하며 살면 그 저주가 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살게 되며, 이런 사람이 많아질수록 이 세상은 우울해지고 불행해집니다.

그러나 서로 남을 축복하며 살면, 그 축복이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자신도 행복해지고, 이 세상도 행복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21세기 한국에서 우리가 당하는 박해인 언론 편파 보도, 멸시, 비방, 왕따, 조롱, 미움, 시기, 위협, 폭력은 1세기 성도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기지 못하고 대적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가 못난 것이어서 부끄럽습니다.

 

성도는 악에 대항하여 싸워야 합니다.

로마를 대항하여 무력으로 싸우는 것이 아닌, 기도하고 축복하는 게 더 큰 무기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박해조차도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박해를 받으면 드디어 하나님 백성이 됐다는 증거가 나타난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그의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했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또 그들이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의 말도 지킬 것이다."(요한복음 15장20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디모데후서 3장12절)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복음  5장44절)

 

예수께서는 오히려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끝까지 인내하라고 하십니다.

성도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합니다.

박해받았던 초대 기독교인들은 카타콤 지하 묘지에서 생활하며 예배드리고, 물고기 표시인 ‘익투스’ 비밀 신호로 교제했습니다.

성도들의 오래 참음과 지혜가 결국 AD 313년에 신로마제국이 탄생하면서 콘스탄티누스대제가 마지막전쟁 중에 불리했으나, 하늘에 나타난 십자가를 보고 승리하여 칙령을 내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택했습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 속에 6.25 전쟁 때 자기 아들을 죽인 북한군을 용서하고 아들로 삼은 참으로 훌륭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사랑의 원자탄'으로 유명한  손양원목사님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자기 아들을 죽인 북한군이 포로로 잡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원수를 찾아가서 용서해 주었고 자기 집에 데리고 와서 자기 아들을 삼았습니다.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사랑했던 일은 지금까지도 감동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면 가능합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의 원수 용서와 원수 사랑에 대한 눈물의 고백의 말씀입니다.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국에 갔지만, 안재선은 죽으면 지옥 갈텐데,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그를 살려야 한다. 그를 용서해야 한다. 그를 사랑해야 한다. …

동희야 내 말 잘 들어 봐라.

내가 무엇 때문에 5년 동안이나 너희들을 고생시키면서 감옥 생활을 견뎌냈겠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겠느냐?

제 1, 2계명과 함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내 어찌 이 명령은 순종치 않는단 말이냐.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치 않는다면 과거 5년 간의 감옥살이가 모두 헛수고요,

너희를 고생시킨 것도 헛고생만 시킨 꼴이 되고 만다.

그러니 동희야, 가만히 생각해 보아라.

그를 죽여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되겠느냐?

동희야, 용서만 가지고는 안 된다.

원수를 사랑하라 했으니 사랑하기 위해 아들을 삼으려는 것이다.

아들들을 죽인 자를 잡았거든 매 한 대도 때리지 말고, 죽이지도 말라고 해.

내가 그를 구해서 아들을 삼겠다고 해.”

- 손양원(孫良源, 1902 -1950) -

)

 

인간 본능은 핍박을 받으면 저주가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저주하지 말라'고 합니다.

저주하지 말라는 정도가 아니라 축복하라며 적극적인 순종을 요구합니다.

피해를 입고 고통을 당하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말씀입니다.

나에게 핍박을 하면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하는데 이것은 언어에 관한 문제입니다.

특별히 어려움과 고통을 주는 사람에게 입으로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입으로 범죄하지 말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입술로 죄를 짓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우리를 핍박하는 것은 우리가 미워서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15장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18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그들을 축복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들을 축복하면 결국 우리가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10장에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찌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눅10:5〜6)고 했습니다.

우리가 축복한 기도가 응답되면 그들이 복을 누리겠지만, 그들이 복을 누릴 수 없다면 그 복이 우리에게로 돌아옵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