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세상이 힘들다 해도 나는 괜찮습니다.
내 마음 안에는 소중한 꿈이 있고,
주어진 환경에서 날마다 최선을 다하는
내 모습이 있으니 나는 괜찮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불안하다 해도 나는 괜찮습니다.
내 마음에 작은 촛불 하나 밝혀두면 어떤 불안도
어둠과 함께 사라지기에 나는 괜찮습니다
아무리 큰 파도가 밀려와도 나는 괜찮습니다
든든한 믿음의 밧줄을 걸었고,
사랑의 닻을 깊이 내렸으니 나는 괜찮습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는 의지할 곳이 없다 하여도 나는 괜찮습니다.
내가 의지하는 것은 잠시 지나가는 것들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하는 것들이기에 나는 괜찮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떠나간다 해도 나는 괜찮습니다.
변함 없이 그들을 사랑하면서 이대로 기다리면,
언젠가는 이것이 의심과 미움을 이기리라 믿기에 나는 괜찮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나를 의심하고 미워해도 나는 괜찮습니다.
신뢰와 사랑의 힘은 크고 완전하여,
언젠가는 이것이 의심과 미움을 이기리라 믿기에 나는 괜찮습니다.
아무리 갈 길이 멀고 하다 해도 나는 괜찮습니다.
멀고 험한 길 달려가는 동안에도 기쁨이 있고,
열심히 인내로 걸어가면
언젠가는 밝고 좋은 길 만날 것을 알기에 나는 괜찮습니다.
아무리 세상에 후회할 일이 많다고 하여도 나는 괜찮습니다.
실패와 낙심으로 지나간 날들이지만
언젠가는 그 날들을 아름답게 생각할 때가 오리라고 믿고 있으니 나는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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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플 수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이 치료자이시니 난 괜찮습니다.
나는 무명씨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이 알아주시니 난 괜찮습니다.
나는 경제적으로 쪼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이 공급자이시니 난 괜찮습니다.
나는 약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이 힘이 되시니 난 괜찮습니다.
나는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난 괜찮습니다.
나는 예상치 못한 때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이 나의 영생이시니 난 괜찮습니다.
주님이 변함없는
나의 선한 목자이시니 난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이것이 오늘과 내일을 위한 나의 고백이며 기도입니다.
- 박광철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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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서는 행복의 조건이 좋은 직장·집·배우자를 얻는 것, 즉 성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행복해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의미를 추구하는 삶은 어떻게 다를까요?
의미를 추구하게 되면 단순히 행복이나 편안함·안정감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좀 고통스럽더라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존재 이유를 스스로 찾고 타인에게 기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이때 그 방향이 되어주는 게 내가 사는 이유, 곧 내 삶의 의미가 됩니다.
이러한 의미들은 거창하지 않을지라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확실한 힘이 되어줍니다.
자기 삶 속에서 스스로 찾아냈기에 외부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 않습니다.
내가 바라는 가장 나다운 모습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듯 비록 작을지라도 의미는 확고한 내면의 기둥이 됩니다.
그 의미를 찾은 사람은 시련이 닥쳐도 그 기둥에 기대어 묵묵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의미를 추구하는 삶은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보다 훨씬 성취감이 큽니다.
나무들은 어릴 때에는 촘촘하게 심어줍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커지면 옆 나무와 거리를 두게 해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크질 못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옆에 붙어 있어야 하지만 커갈수록 공간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즉 거리두기를 해야 합니다.
이것을 ‘심리적 공간’이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은 대화로 관계를 만들어갑니다.
그 대화 안에서 심리적 공간의 제공은 아주 중요합니다.
즉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이 심리적 공간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 들어줄 때 상대방은 마음의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끊고 자기 이야기만 쏟아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게 아니고~”하면서 다 듣지도 않고 끼어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대화중에 새치기를 하는 사람들은 왜 그럴까요?
본인의 심리적 공간이 좁아서입니다.
즉 마음그릇이 너무 작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담을 크기가 안 될 때 그런 현상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7장에서 "이 시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 누가복음 7장 32절 -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울지 않았다」
'무관심'과 '완고함'입니다.
무관심(無關心)은 ‘관심이나 흥미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윗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아래 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남이 설계하는 일에는 더욱 마음을 줄 여백이 없습니다.
<완고함>은 마치 엎어져 있는 항아리를 보고 '입이 없네!'라고 투덜거리는 것입니다.
그 엎어져 있는 항아리를 들추어보고 '바닥이 없네!'고 트집을 잡는 것입니다.
완고함의 뿌리에는 비뚤어진 마음과 악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너는 너요, 나는 나다!”
“너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
“네가 피리를 불어도 내가 무슨 상관이냐?”
“네가 애곡하면 했지, 내가 무슨 상관이냐?”
오늘 우리는 이렇게 상대방에게 심리적 공간을 주지 못하는 시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기만 생각합니다.
자기만 제일입니다.
저만 잘났다고 하고 남을 존경할 줄 모릅니다.
남을 아낄 줄 모릅니다.
남의 의견도 내동댕이쳐 버립니다.
남의 계획도 가차없이 발길질해 버립니다.
남은 다 죽더라도 저만은 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이런 속상한 세대에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로마서 12장2절 -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알 때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 것입니다.
세대에 휩쓸리지 않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심리적 공간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심리적 쉼이 있습니다.
주님의 품에서 쉼을 누리십시요. 평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 마태복음 11장 28〜30절 -
- 하늘가는 길, 강릉남대천에서. 산돌의집 장득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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