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강해

주기도문 강해(10)-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가족사랑 2021. 9. 30. 23:16

주기도문 강해(10)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마태복음 6장 9∼13절 -

 

주기도는 교인이라면 누구나 암송하고 자주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 가치와 깊은 뜻을 생각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로서, 모든 기도의 표준이며 근본입니다.

주기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은혜가 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말 속에는 굉장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속한 분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높은데 계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우리의 가장 가까운데 계신 “아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우리가 애원하고 부탁하고 아빠라고 부를 때, 사랑과 은혜를 한없이 베풀어주시는 아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기도할 때 맨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는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거룩, 공의, 자비, 긍휼, 사랑 등 다양한 성품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성품은 <거룩(קדש-카데쉬ׁ)>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거룩’이란 세상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도 공의가 있고 자비가 있고 긍휼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룩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이 전하셨던 메시지의 핵심이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첫 설교도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는 말씀이었습니다.

가정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이 있고 더불어 용서가 있고 사랑이 있고 섬김과 나눔이 있다면 우리의 가정이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이 있고 더불어 서로를 용납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겸손히 자신을 낮추며 다른 사람들의 섬기는 사랑이 있다면 우리 교회가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죄 용서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세 번째 기도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기도입니다.

‘뜻’은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첫째로 세상의 구원입니다.

모든 민족이 다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외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둘째로 성도의 성화(聖化)입니다.

성화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가 점차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성결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거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한 존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셋째로 성도의 풍성(豊盛)한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을 얻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세상에서 살아갈 때 성공적이고 축복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풍성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우리가 하나님의 의도대로 거룩하게 살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것은 영원한 삶의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네 번째 기도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입니다.

‘일용할 양식’이란 직접적으로 우리 육신이 이 세상을 살기 위해서 먹고 살아야 할 음식을 말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 순간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고 계십니다.

‘양식’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원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성만찬을 고대하는 기원입니다.

장차 이루어질 그 성만찬에는 우리가 갈구하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결핍을 근본적으로 충족시켜 줄 참된 양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고대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다섯 번째 기도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입니다.

본문을 원어에 가깝게 의역을 하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주었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우리의 죄도 역시 용서해주십시오.”

누가 용서를 할 수 있을까요?

용서를 경험한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자만이 자신에게 잘못한 자들을 용서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진정한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용서를 가슴에 품고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여섯 번째 기도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입니다.

인생은 시험의 연속입니다.

문제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귀에게 유혹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유혹의 시험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또 하나의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에서 ‘악’은 단순하게 하나의 힘이나 세력이 아닙니다.

‘악’은 인격화된 ‘악한 자’ 곧 사탄, 마귀입니다.

마귀는 온갖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죄를 통하여 타락시키고자 성도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갖 죄악으로 공격해 오는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여야 하며 싸워 이겨야 합니다.

우리가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6:11)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 입는 것만이 사탄과의 싸움에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악이 가장 무서워하는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귀를 멸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마귀를 멸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에 도달하였습니다.

주기도문의 여섯 가지 간구를 마치고 주님을 향한 찬양이 우러나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이것은 찬양으로 기도를 마무리 한 것입니다.

이 부분을 마태복음에서는 괄호 안에 놓았고, 누가복음에는 이 부분이 아예 들어 있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이 본문을 괄호 안에 넣은 이유는 신약 성경의 원문이라고 할 수 있는 권위있는 사본 중에 이 부분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의 사본이 수 백 개가 되는데 그 사본 가운데서 가장 역사가 오래 되고 또 초대 교회 때 널리 읽혀지고 인정을 받았던 사본에서는 이 송영부분이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대에 기록된 사본들 가운데서는 이 영광송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영광송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원래의 원문에는 없었으나 초대 교회가 나중에 첨가한 것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입니다.

 

오래 전부터 유대 교회에서는 기도를 드리고 나서 하나님께 올리는 찬양으로 기도를 마무리하는 것이 일종의 전통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찬양으로 마무리한 것이 시편인데, 시편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간구과 탄식을 합니다.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하나님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고 부르짖다가 그 마지막은 ‘할렐루야’ 즉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송영으로 맺고 있습니다.

이 관습에 따라 예수님께서 가르쳐준 주기도문의 마지막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것이 초대교회의 생각이었고, 그래서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송영부분을 주기도문의 마무리 송영으로 고백해왔습니다.

 

1. 나라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이 송영 부분에서 제일 먼저 “나라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고 찬양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그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나라’는 세상의 나라들처럼 통치권을 가지고 다스리는 국가를 말합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앞으로 갈 곳이 아니라 이미 ‘너희에게 와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서는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 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고 하셨습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라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βασιλεια), 혹은 천국(天國)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경험되는 곳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똑같이 이 땅에 살아가고 있지만 어떤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갈 수 있고, 어떤 이는 죄와 사망의 나라에 살고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천국은 앞으로 주님의 재림과 함께 오실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앞으로 올 그 나라 뿐 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 삶 가운데 임하는 나라를 내 삶 속에서 경험해야 합니다.

이 땅 가운데서 천국을 경험하려면 가정과 직장과 학교와 교회, 내가 속하는 모든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며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순종함으로 따라가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서로를 속이고 짓밟으며 돈과 성공과 일류만을 추구합니다.

섬기는 자가 되라는 가르침 대신 어떻게라도 머리가 되려는 삶을 살고있습니다.

왼뺨을 치면 오른뺨을 내어 주라는 말씀에는 ‘아멘’하면서도 실제로는 강자가 가진 힘과 권력의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을 따르는 대신 “요즘 유행은 무엇일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며 세상을 좇아 소비와 향락의 삶을 살아 가고 있습니다.

삶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녕과 인생의 성공만을 위해 기도하며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 나라의 복음입니다.

반쪽짜리 구원이며 바로 왜곡된 복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십시오.

나의 입술로가 아니라 나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십시오.

 

2. 권세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두 번째 송영은 “권세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입니다.

권세는 두나미스(δυναμις) 곧 ‘파워(power)’입니다.

파워는 힘이며 능력입니다.

모든 파워가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은 하나님만이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린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가 원하는 것은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분입니다.

권세는 통치의 힘이며, 이 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부터 옵니다.

능력(힘)은 자기보다 더 힘센 사람이 오면 질 수밖에 없지만 권세는 아무리 자기보다 힘이 더 강한 자라도 그 권세 앞에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 기록한 예수님의 권세를 보십시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요한복음 1장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12∼13)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8장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28:18∼20)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통치 주권의 회복의 선언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주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모든 인간들 그리고 공동체 가운데 회복되었음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모든 민족’ 가운데 나아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선포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 이 세상의 구석구석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사랑의 법, 순종의 법, 섬김의 법, 공의와 평화의 법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자녀는 그 부모와 동등한 존재입니다.

부모의 판단에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자녀는 그 집안에서의 모든 행동에 제약이 없습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에게는 창세기 1장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①생육하라! ②번성하라! ③땅에 충만하라! ④땅을 정복하라! ⑤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라는 5가지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0장에서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코 없으리라”(19절)고 말씀하십니다.

시험과 악에서의 해방의 능력도 주님으로부터 받았으며,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삶의 능력은 바로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이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단의 힘을 빌어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힘을 빌어 사는 사람입니다.

세번째는 하나님의 능력을 갖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말합니다.

바울은 모든 일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 주님이신 것을 알아 주의 능력으로 일했으며, 일이 성취될 때마다 능력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며, 주님께만 의존하여 인생을 살고자 할 때 그의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외치며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로 살아가십시오.

 

3.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세 번째 송영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세 가지 원칙 중 하나가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지 잘 모릅니다.

 

‘영광’(榮光, δοξα 독사)이라는 말은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를 말합니다.

<영광>이란 최고로 빛나는 것입니다.

 최고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최고로 선한 것입니다.

최고의 가치를 가진 것입니다.

최상의 기쁨 최고의 명예를 말합니다.

영광이 아버지께 있다는 것은 그런 최고의 칭찬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만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했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기도는 모두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기도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좋은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몇 마디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라면 그 기도는 좋은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며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귀중하고 존귀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존귀와 영광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 영광이 가득하게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들 중에 ‘평화’를 온전히 이루시기 위해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 짐승들의 여물을 담는 통인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이처럼 <영광>이라는 말은 하나님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독특한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입니다.

그 이름이 영원히 높임을 받고 영원히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이며, 그리스도의 이적과 그의 인격,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영광의 결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변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 나라는 영원히 지속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잠시 후에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권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영원불변한 권세입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도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 영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께만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그 뜻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과, 죄 용서, 그리고 사탄으로부터의 보호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하나님의 것"이라는 송영은 위대한 찬양인 동시에 기도와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멘,אמן, αμην”은 히브리말로 헬라어로도 역시 ‘아멘’으로 발음합니다.

“아멘”은 ‘진실, 충성, 믿음’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아멘>은 “지금까지 드린 기도가 진실하며 또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우리가 기도한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고백입니다.

 

‘아멘’은 문서를 모두 작성하고 나서 확인 도장을 찍는 것과 같습니다.

아멘은 우리의 기도 내용이 진실하다는 고백입니다.

더 나아가 <아멘>에는 우리가 드린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겠다는 믿음도 담겨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믿음으로 드리십시오.

하나님의 약속대로 성취될 것을 믿고 ‘아멘’하십시오.

순간순간 우리의 생애 속에 놀라운 사건이 매일 매일 일어날 것입니다. 평안!

 

 

- 하늘가는 길, 강릉남대천에서. 산돌의집 장득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