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강해(7)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 마태복음 18장 23∼35절
주기도문의 네 번째 간구(우리를 위한 첫 번째 기도)는 인간에게 가장 실질적이고 절대한 필요한 ‘일용한 양식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간구는 ‘죄를 사함 받기 위한 기도’입니다. 마태복음 6장12절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죄를 용서하는 것과 용서를 받는 것은 구원받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못지않게 중요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이 살기 위하여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하셨으며, 영혼이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 사함 받기를 위하여 기도하라 명하셨습니다.
세상에 사는 그 어떤 사람도 완벽하지 못합니다.
다 불완전한 사람이요, 허물을 가득 안고 살아가는 죄인입니다.
한 마디로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누구나 죄인인줄 알고 낮아진 자세로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 기도는 "일용할 양식"과 함께 인간 편에서 참으로 현실적인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는 간구는 신앙생활의 시작의 기초이고 영적 거듭남의 원천입니다.
죄의 용서는 구원 이후 신앙의 성화에 이르는 거대한 신앙의 그루터기와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매일 구하듯 죄 용서함의 기도도 매일 구해야 합니다.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는 간구에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용서 받는 것과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는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우리의 용서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오늘 읽은 마태복음 18장(21〜35절) 예수님이 가르치신 비유(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는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가 나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왕에게 빚진 자입니다.
그런데 왕이 그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즉 용서해주었다는 말입니다.
만 달란트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달란트(Talent)는 저울로 무게를 다는 최대의 단위를 말하는데, 신약시대에는 1 달란트의 무게는 약 20.4kg 정도 되었고 6천 데나리온(드라크마)에 해당되었습니다.
1데나리온은 장정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러므로 1달란트는 장정이 6천일 동안, 그러니까 하루도 안 쉬고 16년 5개월 10일 동안을 일해야 얻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그러면 일만 달란트는 얼마인가요?
6천만 데나리온입니다.
장정이 164,383년 하고도 반년을 더 일해야 얻을 수 있는 돈입니다.
얼마인지 상상이 되십니까?
예수님 당시 갈릴리와 베뢰아 주민 전체가 로마 정부에 내는 세금이 이백 달란트였습니다.
이와 비교해보면 일만 달란트가 얼마나 큰돈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왕에게 이 사람이 일만 달란트를 빚졌다고 했습니다.
이 빚을 자기의 능력으로 갚을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죽어도 못 갚습니다.
그런데 왕이 이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의 죄, 하나님께 대한 빚의 무게가 이렇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우리의 노력과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죄의 무게인데, 하나님께서 값없이 탕감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용서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용서 받은 우리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사람에게는 자기에게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백 데나리온의 빚을 졌습니다.
장정이 백일동안 일해서 얻을 수 있는 돈입니다.
하루에 5만원을 일당으로 받는다고 한다면 5백만 원입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에게 빚진 자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그 빚을 안갚는다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자기는 일당 5만원으로 하면 3조원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빚을 아무 조건 없이 탕감 받은 자가 자기에게 5백만 원 빚진 자에게 탕감은 커녕 무자비하게 대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화가 나서 그 일만 달란트를 다 갚도록 감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이 비유의 끝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14절과 15절은 주기도문에 이어 나온 예수님 말씀입니다.
여기에도 보면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먼저 이웃들을 용서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는 의미입니다.
1.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로 돌아가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흔히 죄로 번역되는 원어가 2개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하마르티아>인데, 이 단어는 ‘과녘에서 벗어나다’라는 의미로 어떤 목표를 벗어나거나, 미달(未達)된 것을 뜻합니다.
누가복음은 <죄>를 이 <하마르티아(המארטיה)로 기록했습니다(눅11:4).
누가는 성경을 헬라어로 기록하면서 성경을 읽게되는 수신자인 헬라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과녁을 빗나갔다는 뜻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죄>를 흔히 빚(debt) 또는 부채(loans)로 번역되는 <오페이레마타(οφειληματα)>로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칠 때 헬라 말이 아니라 당시의 유대인들이 쓰던 아람어였습니다.
마태는 성경을 헬라어로 기록하면서 수신자인 유대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빚(οφειληματ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경제적 채무’를 뜻합니다.
채무란 즉 빚은 당연히 갚아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갚아야지 그렇지 못하면 채권자에 의해 상응하는 대가를 치룰 수도 있습니다(마 18:24~34).
일반적으로 기업이나 사업자들 간에는 종종 채무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때 빚을 진 기업이나 사업자가 원만하게 채무를 상환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 할 때는 부도처리가 됩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흔히들 빚은 살림 밑천이라고 말은 하지만 크든 작든 빚으로 인해 겪는 스트레스와 고통은 여간 감당하기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도 살아가는 동안 빚 없이 살고 싶지만 때로는 주택 구입, 자녀 양육 사업 실패 등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더러는 빚 때문에 치가 떨리는 사람도 있고, 악성 부채는 우리에게 상당한 심적 부담을 갖게 합니다.
오죽하면 빚을 감당 못하여 목숨까지도 내 던지는 일도 생기겠습니까?
간혹 급할 때는 빌려 쓰고서 제때 못 갚다보니 서서히 빚진 자의 마음이 무디어 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 그러면 좀 더 이 기도의 의미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 기도는 직역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빚을 사하여 주옵소서.”가 됩니다.
유대인들은 동족에 대한 채무를 면제하여 주는 규례가 있습니다.
매 칠 년마다 지키는 안식년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족이 빌려 가서 갚지 못하는 ‘빚’을 탕감해주어야 했습니다.
신명기 15장2절입니다.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심지어 돈을 주고 사 온 종이 동족이면 면제년에 그들을 놓아주고 그들에게 후히 주어 보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종 되었던 이스라엘 민족을 값없이 속량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면제년이 가까워져도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꾸어주어야 합니다.
신명기 15장9절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물론 악의적인 마음으로 타인의 재물을 취할 생각으로 빌리는 것을 거부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정말 가난하여 먹을 것을 구하는 동족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앞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와 죄 용서에 대한 기도는 접속사 ‘카이’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일용할 양식은 나만을 위한 것이 타인에 대한 배려와 도움을 가능케 할 만한 물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용서라고 말하면 물질적인 탕감에 대해서는 예외로 여기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년의 규례를 배경으로 ‘빚진 자에 대한 율법적 의무를 다한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것에 대한 탕감을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용서는 일반적인 죄와 더불어 물질적인 부분까지 포함한 용서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기도는 단순히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청원이 아닙니다.
전제(前提)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냥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구하라고 하시지 왜 앞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말을 붙였을까요?
사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 안에 미움이 있고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위한 기도에서 ‘내가 나에게 죄 지은 자, 잘못한 자, 상처 준 자를 용서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하나님은 야박하게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라는 전제조건(前提條件)을 붙여 놓으신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용서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뜻일까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면 그 횟수에 따라 하나님도 용서하신다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만약 이런 해석을 하게 되면 우리의 공로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공로사상이라고 합니다.
공로사상(功勞思想)은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사상입니다.
이것은 내가 선한 행위를 하고 어떤 노력을 해서 하나님께 택함받고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실존은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난 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선은 인간적인 도덕적인 기준에서의 선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선을 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인간은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뼛속까지 부패한 죄덩어리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에베소서 2장 8〜9절)
그렇습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용서(容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용서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용서의 전제조건은 참된 회개(悔改)이고 용서의 근거는 회개를 받으시고 사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주는 행위를 통해 우리의 죄가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청원은 우리의 용서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원어에 가깝게 의역을 하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우리의 죄도 역시 용서해주십시오.”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가 용서하는 행위가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는 전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용서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양해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그냥 못 본 척 넘어가 준다는 것도 아닙니다.
상처를 준 사람과 친구가 되라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털어버리는 것입니다.
다시는 그 잘못된 일들을 곱씹지 말고 기억 속에서 떠올리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시작됩니다.
삐뚤어진 우리 마음과 상처를 가지고 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 용서의 행위’가 진정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값없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하여 주셨기에 우리도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누가 용서를 할 수 있을까요?
용서를 경험한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자만이 자신에게 잘못한 자들을 용서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자만이 하나님께 진정한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믿음 안에서 끊임없이 용서의 은혜를 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허물투성이지만 우리의 방향이 그리스도를 향해 있으면 우리는 정죄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떤 죄를 지적하시며 회개하기를 원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당연히 인정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백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첫 사랑을 잃었을 때 주님은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1〜5).
그러나 주님께서는 현미경을 들이대며 나의 죄를 트집잡는 분이 아니라, 나의 방향이 올바르지 못한 것을 지적하실 뿐입니다.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즉 내가 지금 사함을 받지 못해서 용서받기 위해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나의 죄를 끊임없이 용서하시는 분이심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용서의 은총이 단 한순간이라도 멈추면 허물과 죄투성이인 나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죄사함의 은총을 끊임없이 누리면서 형제들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잘못인가를 상기해야 하고 늘 형제들을 용서하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조그마한 일에 분노하고 원한을 품습니까?
주기도문을 하면서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은 너무 가증스럽습니다.
형제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것이 용서받는 자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인권과 자유와 평화를 위해 평생 헌신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를 아십니까?
만델라는 1918년 남아공 남쪽 지역의 토착 템부족 족장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대학 재학 중 시위를 주동하다 퇴학당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는 일생을 건 흑인 인권운동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합니다. 합법적인 투쟁을 위해 변호사 자격을 따고, 남아공 최초로 흑인 전용 법률상담소를 열어 조직적인 인권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리정책) 반대운동에 나서는 등 본격적으로 흑인 인권운동에 참가했고, 1956년에는 반역죄로 155명의 인권 운동가와 함께 체포됐습니다. 1960년 3월 69명의 흑인이 경찰에 살해된 '샤프빌 흑인 학살사건'을 계기로 그는 평화시위운동을 중단하고 무장투쟁을 지도하다가 1962년 다시 체포돼 5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리고 1964년에는 범죄 혐의 추가로 재판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의 나이 46세때였습니다. 그후 27년동안 감옥에 있다가 1990년 당시 대통령이던 FW. 드 클레르크의 특별 사면으로 석방됐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73세의 노인이었습니다.
1990년 감옥에서 나온 만델라 앞에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무력으로 백인 정권을 타도하자'는 ANC(아프리카 민족회의) 동료들의 요구였습니다. 만델라는 이 요구에 대해 “우리는 백인들이 우리나라의 발전을 위해 이룩해 놓은 것에 감사를 표한다.”고 공언하는 것으로 답했습니다.
4년 후, 1994년 4월27일 실시된 남아공 최초의 자유선거를 통해 만델라는 그해 5월27일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습니다. 그는 대통령 취임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시간이 왔습니다. 우리를 갈라놓은 공간들을 채울 다리를 놓을 시간이 왔습니다. 새 시작을 할 시간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저희는 마침내 법적인 평등을 이뤄냈습니다. 저희는 모든 사람이 가난, 탈취, 고통, 성적 차별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의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협동하지 않고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국의 조화, 재건과 새로운 세계의 협동을 위해 반드시 협력해야 합니다. 이 아름다운 나라에 사람에 의해 사람이 억압받는 일이 결코, 결코, 결코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이 나라에 자유가 흘러넘치도록 합시다."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 백인 가해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지만, 만델라는 흑인과 백인이 함께 함께 잘 살아가는 새로운 나라, 여러 색깔로 이루어진 무지개가 아름답게 빛나듯이 아름다운 '무지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용서하고 화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용서하되 잊지는 않는다'(forgive without forgetting)는 과거사 해결의 원칙으로 응했습니다. 이를 위해 설립한 법률의 이름도 '국민 통합 및 화해 촉진법'이었습니다. 이 법에 따라 6800명의 가해자가 진실을 고백하고 사면을 받았습니다. 만델라는 고백하지 않은 가해자들도 끝내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백인들은 기득권을 잃었지만 ‘피의 보복’을 막아 주는 지도자로 만델라를 받아들였습니다.
만델라 대통령은 백인 정권의 직전 대통령을 부통령으로 임명했습니다. 흑인 탄압의 핵심이었던 정보책임자, 자신에게 종신형을 구형했던 검사를 자택으로 초대해 정중히 대접했습니다. 백인 교도관 세 명은 대통령 취임식장에 초대해 귀빈석에 앉혔습니다.
흑인 단체가 백인 문화를 대표하는 럭비 대표팀 해체를 요구하자 오히려 만델라는 흑인이 단 한 명뿐인 럭비대표팀을 찾아가 격려했습니다. 감동한 백인 선수들은 1995년 남아공에서 열린 럭비 월드컵에서 결사적으로 뛰어 예상을 깨고 우승하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결승전이 끝나자 경기장에 모인 흑인과 백인이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넬~슨, 넬~슨"을 연호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면서 용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용서 없이 하나님의 나라는 없다는 것입니다. 남아공의 만델라가 자기와 자기 민족을 박해한 그 백인들을 용서했기에 남아공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은 무엇이었을까요?
용서였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스데반도 돌로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앞에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했습니다.
용서가 복음이고, 용서 안에 하나님의 평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가슴에 품고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평안!
- 하늘가는 길, 강릉남대천에서. 산돌의집 장득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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