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강해

주기도문 강해(6)-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가족사랑 2021. 7. 1. 08:56

주기도문 강해(6)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 출애굽기 16장4절 -

 

남미 우루과이에 있는 한 작은 성당 벽에는 다음과 같은 기도문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늘에 계신” 이라고 하지 말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 라고 하지 말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여” 라고 하지 말라/ 아들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지 말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나라가 임하시오며” 라고 하지 말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지 말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하지 말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하지 말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라고 하지 말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하지 말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말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이 기도문은 <주기도문(主祈禱文)>에 반한다고 해서 <반(反)주기도문>으로 불린다고 합니다.

‘반주기도문’은 이기적이고 자기 욕망대로 살아가면서 입으로만 주님을 부르는 그리스도인들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습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목적은 그 기도대로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저 입으로만 주님의 기도를 수없이 반복하고 삶으로는 전혀 기도의 내용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중언부언하는 이방인들의 기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모두 여섯 가지의 청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처음 세 가지는 하나님을 위한 기도로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청원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기도의 시작이 나의 필요를 우선적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기도가 먼저임을 깨우쳐 줍니다.

그래서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부터는 나머지 세 가지 청원인 우리를 위한 기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를 위한 기도의 첫 번째는 11절에 있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입니다.

여기에서 “양식”은 단순히 먹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의 ‘일용할’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피우시오스’(ἐπιούσιος)인데 ‘하루 분의 몫’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또 ‘양식’이라는 말은 우리 육신이 생명을 위해서 먹어야 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영어로 'daily bread'로, 우리 말로도 ‘매일 먹는 양식’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은 날마다의 양식, 매일의 양식으로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양식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셨을 때, 그 말은 구약에서 따 온 것입니다.

이 구절은 출애굽기 16장에 나옵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출애굽기16장4절)

물론, 구약은 히브리어로 쓰여졌고, 신약은 헬라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똑같은 표현인지 아닌지는 비교하기가 곤란하지만, 의미상으로 볼 때 주님께서 말씀하신 “일용할” 양식이란 구약적 의미에서 분명히 ‘만나’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직접 양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양식을 주실 때 한없이 쏟아 부어 주신 다음, “먹을 만큼 알아서 가져가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만나는 매우 엄격하게 “당일의 분량만을” 거두도록 지시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일용할 것”으로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신 이유를 신명기 말씀을 통해서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신명기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광야의 마귀시험 때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장3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나 즉, <일용할 것>으로 먹이신 이유는 먹을 것 즉, 사람의 가장 근본적인 필요에 대해 하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시는 교훈을 보여줍니다. 만나를 먹이신 이유를 신명기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만나는 겉으로는 우리의 육체를 위한 양식이지만, 사실 그것은 사람이 밥을 먹으나 먹는 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신명기는 이 모든 것이 “먹는 것을 통하여 그 먹이시는 주체가 하늘에 계신 분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말합니다.

즉, 그들은 매일의 양식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아! 내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사실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구나!” 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실 떡을 먹으나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통해서 사는 것임”을 발견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단의 시험에 이 구절을 인용하신 이유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40일을 금식하신 후 주님께서는 굶주리셨습니다.

사단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 맥락 안에서 사단을 물리치십니다.

“내가 육체의 굶주림으로 인해 유혹받으나,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니 나는 네 말을 들을 수 없다. 물러가라!”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도 이러한 맥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매일” 하늘로부터 내리는 양식을 거둠으로서, 하나님께서 매일 자신들을 먹이고 계심을 깨닫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양식을 한꺼번에 거두어 비축하는 일은 금지되었습니다.

그들은 아침마다 땅을 덮은 만나를 거두면서, 그들을 매일 먹이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발견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는 기도는 이 맥락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기도를 지시하셨을 때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너희는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아라”, “너희가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내가 다 주마” 이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주기도문의 이 기도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 우리가 매일의 양식을 먹을 때에 하나님을 바라보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가 매일의 양식을 통해, 우리를 날마다 먹이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게 해 주옵소서!” 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이란 직접적으로 우리 육신이 이 세상을 살기 위해서 먹고 살아야 할 음식을 뛰어 넘습니다.

좀 더 확대를 하면 식료품과 식료품을 조리하기 위한 연료가 포함됩니다.

입어야 하는 옷이나 잠을 자야 하는 공간, 매일 매일의 필요, 숨 쉬는 공기부터 물, 음식, 돈, 건강, 마음, 생각, 정신까지도 포합됩니다.

 

이렇게 볼 때, ‘일용할 양식’은 굶주린 배만을 채우는 양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부족하고, 결핍된 것,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들인데, 우리 하나님은 매 순간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는 우리 육신이 이 세상에서 생명을 유지하면서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 의식주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하나님께 드리는 청원의 기도 속에는 “하나님! 나의 생명은 나의 노력이나 수고가 아닌 오직 은혜의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만 보존될 수 있습니다!”라는 신앙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2. 오늘 우리에게(나에게만 아니라) 주옵소서!

이 기도를 드릴 때 꼭 기억해야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적 제한이 있는 단어로 <오늘>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위탁해 준 '오늘'이라는 한 시점에서 우리의 생을 위해 충분히 쌓아 두는 것으로 끝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묵상하면 ‘매점매석하지 말라’는 깊은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성은 ‘유무상통(有無相通)’입니다.

유무상통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사도행전 2장44∼45절)

초대교회는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서 다른 사람의 부족함, 다른 사람의 필요, 다른 사람의 결핍을 생각하며 분배하고 나누어 주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호였던 록펠러는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다가 부자로 죽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뉴욕시에 헌납해서 뉴욕시에 사는 시민은 누구나 그 시가 없어질 때까지 물 값을 내지 않도록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키백과 세계 인구(世界人口)7,870,495,000명(2021년 6월7일)

전 세계 인구 통계는 현재 78억 명인데 영양실조를 겪고 있는 사람은 8억5천만명, 과체중이거나 비만인 사람들은 25억명, 매일 굶주림으로 사망하는 사람은 3만명입니다(2021년 6월11일 현재).

올해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5,759,624명, 올해 사망한 5세 미만 어린이는 3,372,374명, 에이즈 감염자 42,779,860명, 에이즈로 사망한 사람 745,854명, 올해 암으로 사망한 사람 3,643,941명입니다.

(실시간 세계 통계 https://www.worldometers.info/kr/)

 

우리는 오늘 먹을 양식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이 말은 그렇게 굶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우리도 굶자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맛난 음식 먹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먹을 양식이 부족하여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지만 우리 주위에는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먹을 것이 없어 매년 천만 명 이상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걸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유엔 기구인 세계식량계획(WFP)은 굶주림에 직면한 기아 인구가 2020년 12월 기준으로 2억6,500만 명에 달한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식량은 모자라지 않습니다.

남아돕니다.

남아도는 식량으로 가축을 더 기르고, 바이오 석유를 만들고 때로는 폐기처분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매년 쌀 수확량이 남아서 고민입니다.

날마다 남아서 버리는 음식쓰레기가 하루에 404억 원, 1년에 15조원입니다.

그런데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습니까?

유엔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 장 지글러가 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에 보면, 권력을 갖고 있는 자들의 탐욕으로 인해 그리 되었다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이득을 위해 어려운 나라에게 보조를 하지 않고 창고에 식량을 썩힌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식량들이 소수의 권력자들과 다국적 기업 등에 의해 휘둘린다는 것입니다.

어쩌다 도움을 주더라도 가난한 나라의 부패한 권력자들이 중간에서 거의 가로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기아는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실에 마냥 분노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똑같이 그런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부족한 것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 음식점에서는 손만 조금 댄 반찬들이 쓰레기통으로 버려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음식을 낭비하며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어느 곳에서는 밥 한 끼, 빵 한 조각을 먹지 못해 죽어가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남아서 버리는 일 없도록 하십시오.

부모도 그렇게 하고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십시오.

밥은 생명이고 하늘입니다.

음식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음식 투정하고 밥을 버리는 것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라고 주신 하나님께 대한 죄입니다.

만나를 거둘 때에 남들보다 더 많이 거두어 결국은 먹지 못하고 버린 이스라엘백성들과 똑같은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먹으십시오!

남기지 말고 버리는 일을 최소화하십시오!

더 나아가 나누어 주십시오!

쌓아두지 말고 나누어 주십시오!

가지고 있다가 버리는 것은 죄입니다.

있는 사람들이 없는 이들에게 나누어주면 이렇게까지는 되지않습니다.

“가난한 것들은 일을 안 해서 그래. 일할 생각을 안 해. 게을러서 그래. 먹을 것을 주면 더 일을 안해.”

이런 말 하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오늘 먹을 빵입니다.

오늘의 일용할 양식입니다.

오늘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가난한 자들에게 너의 손을 펴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15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15:11)

인간의 생명은 쌓아 두고 저장하는 것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로 오는 은혜와 평강으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위해 우리 자신이 수고해서 필요한 것을 취득하지만 성경적 관점에서 그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에서 한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

 

사랑하는 여러분!

‘양식’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모두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 죽어가는 우리 이웃들이 있음을 식탁에서 기도할 때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위에는 오늘도 일용할 양식이 없어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병이 들었지만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고 있는 이웃도 많이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파하는 이웃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영혼의 고갈 가운데 있는 이웃도 많이 있습니다.

불의한 사회 구조 가운데서 불이익을 당하고 억울해서 울고 있는 이웃도 많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양식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는 이 기도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성만찬을 고대하는 기원입니다.

장차 이루어질 그 성만찬에는 우리가 갈구하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결핍을 근본적으로 충족시켜 줄 참된 양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고대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평안!

 

- 하늘가는 길, 강릉남대천에서. 산돌의집 장득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