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강해(3)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마태복음 6장 9〜13절 -
창세기 32장(22절∼32절)에는 ‘천사와 씨름하여 이긴 야곱’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야곱이 그의 아내와 아들 등 일행 모두를 얍복강을 건너게 하고 자기 혼자만 남습니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낯선 사람 즉, 천사가 나타나고 야곱은 천사와 씨름을 합니다.
천사는 야곱이 완강하게 버티자 야곱의 엉덩이뼈를 쳐서 어긋나게 만듭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동이 텄으니 나를 보내주어라.”
그러나 야곱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저를 축복하지 않으시면 못 갑니다.”
이에 천사가 말합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 네, 제 이름은 야곱입니다.”
“그래, 이제 네 이름은 더 이상 야곱이 아니다. 너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네가 하나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다.”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으면서 과거 도망자, 거짓말쟁이, 사기꾼, 꼼수를 부리던 야곱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엄마와 작당하여 형 에서를 속이고, 늙은 아버지 이삭을 속였던 야곱이었습니다.
아내와 재물을 얻기 위해 외삼촌 라반 밑에서 20년이 넘게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야곱이었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모르던 야곱을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만져주시고, 새 이름을 통해서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름은 참 중요합니다.
이름에는 그 사람의 인격, 명예, 생애 등이 걸려 있습니다.
이름을 통해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활 속에서 늘 경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업이 안 되거나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이름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어서 회사 이름이나 자신의 이름을 바꾸기도 합니다.
‘짝퉁’은 잘나가는 회사나 그 제품을 모방하거나 이름을 사용해서 물건을 만들어 파는 것을 말합니다.
일시적으로는 짝퉁에 속을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그 제품의 질을 보면 잘못된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이름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기도할 때 맨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는 기도’를 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지금도 그렇지만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에 이름이란 단지 부르는 이름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이름이란 그 사람의 전 인격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십계명의 3번째 계명에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레위기 24장16절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라고 할 때 모세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애굽기 3장13절)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אהיה אשׁר אהיה, I am that I am).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모세에게 나타난 ‘스스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은 영어로는 “I am that I am”이라고 하는데,
“나는 곧 나다.” “나는 있으니까 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אהיה אשׁר אהיה)”로 되어 있습니다.
그 뜻은 “나는 내 스스로 존재하여 있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 한 마디는 하나님의 자존하심과 영원하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더나아가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과 절대적 신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나는 너희가 찾거나 불러서 존재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 있는 자’, 너희 조상 적부터 너희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모든 것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무(無)에서 유를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초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땅에는 수많은 신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수많은 귀신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귀신들은 그들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제압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을 자신의 휘하에 두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기뻐 찬양해야 할 분이고, 우리에게 경배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저 무릎 꿇고 떨면서 굴복하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기쁨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유물론자들은 우리의 두려움(연약함)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누구도 하나님을 만들 수 없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라고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은 절대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은 이전부터 계시는 분이십니다.
요한계시록 1장 4절과 8절, 2장 8절에 보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 라고 하셨고,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이며 마지막이라”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계셨고 또 현재도 계시고, 미래에도 영원토록 계시는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스스로 계신 분이므로 우리는 그분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적 의존의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궁극적인 문제의 해답을 얻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난 척을 해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의 길이고, 너희의 진리이고, 너희의 생명이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쁨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바로 우리가 원하는 그 무엇이십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인 동시에 우리에게는 백지수표와 같은 분이십니다.
“I am that I am”은 “나는 네가 필요한 그 무엇이다.”라고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18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2절)고 노래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정확히 이해했던 사람입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반석, 요새, 방패, 구원이셨고 그의 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원하는 모든 것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로 번역됩니다.
히브리어로는 ‘야훼(야웨)’로 발음됩니다.
(히브리어: יהוה, 영어: Yahweh)
‘여호와’ 혹은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로 영어로 “I am that I am”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다른 모든 존재하는 것들과는 다른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시작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앞서는 다른 실재도 없습니다.
영원 전에는 공간도, 우주도, 공허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옳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진리에 부합합니다.
하나님은 우주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소중한 실재이자 인격이십니다.
하나님은 전 우주의 그 어떤 존재보다 더 우리의 흥미와 주목과 찬양과 즐거움을 얻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게”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 존재 자체가 구별되어 드러나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온 세계에 드러나기를 하라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아 마땅한 그 자신의 영광을 받으셔야만 한다”는 뜻으로 풀이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본래 영광스럽습니다.
본래 영광스럽고 거룩하기 때문에 다시 거룩해져야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피조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힘을 당하고 또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피조물들이 자기 눈을 가리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 그것이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거룩’이라고 하는 말은 ‘카데쉬(קדשׁ)라고 합니다.
‘카데쉬’ 는「칼로 베어서 잘라내는 것」을 말합니다.
칼로 베어서 잘라내면 구별되고, 그래서 거룩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주일을, 그리고 예배의 시간을 하나님의 시간으로 잘라내어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주신 물질적 축복 중에서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구별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있습니까?”
“나는 내 입으로 들어오는 모든 악한 것을 구별하고 있습니까?”
“나는 인간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관계와 그렇지 않은 관계들을 구별하고 그에 따라 살고 있습니까?”
“나는 말씀대로 구별하여 살고 있습니까?”
이 잘라낸다고 하는 말이 그대로 내 삶에 적용이 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길 수 있게 됩니다.
청교도 시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한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대부분의 지역 교회에서 그를 그 교회 회원으로 받아 드리기 위하여 교회 위원회와 입교 문답을 하는 관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한 자매가 교회의 나이 든 장로님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매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물론 이 자매는 “예”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장로님은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지금 예수를 믿은 후에는 자신을 어떻게 느끼십니까?” 자매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전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장로님은 다시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은 후에 달라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 다음에 자매가 했던 대답이 아주 유명한 말이 되었다고 합니다. “전에는 제가 ‘죄를 향해 달려가는 죄인’이었지만(a sinner running after sin), 지금은 ‘죄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죄인’(a sinner running from sin)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아직도 죄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죄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중이십니까?
그리스도인라고 죄 문제와의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참으로 누구인지를 깨닫고 예수를 믿고 그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다면 죄사함 받고 구원받은 것은 확실한 성경적 사실입니다.
이것을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성경은 성도들에게 죄와의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아니 오히려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을 넘어뜨리고자 더욱 집요하게 공격하고 유혹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의 승리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죄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배우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좀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거룩해지는 일’입니다.
신학자들은 예로부터 이 과정을 가르쳐 ‘성화(sanctification)의 단계’라고 불렀습니다.
레위기 19장2절에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거룩, 공의, 자비, 긍휼, 사랑 등 다양한 성품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성품은 거룩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거룩’이란 세상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도 공의가 있고 자비가 있고 긍휼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은 없습니다.
타락한 세상은 결코 스스로 거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하십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때도 하나님의 공의나 자비, 혹은 사랑을 노래하지 않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노래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 이사야 6장 1∼3절 -
그렇습니다.
천사들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찬양했던 것은 오직 하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였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이야말로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혼탁한 이 세상으로부터 구별되며, 모든 만물들이 경배하는 기반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룩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반드시 좋은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우리는 이웃에 반드시 좋은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우리의 실생활(말,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지 않아 나쁜 영향력을 끼치면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게 됩니다.
‘너 하나님 믿는다며? 그런데 왜 그렇게 행동해! 아니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래.’
“저 친구 예수 믿는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에서 누가 보든 안 보든 진실되게 살아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폴란드의 음악가 쇼팽은 20살에 예술의 나라 불란서로 유학을 떠날 때였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이런 부탁을 했답니다.“너는 폴란드의 자랑이 되어다오.”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속에 국가를 심어주었습니다. 또한 쇼팽의 선생님 역시 조그마한 은컵에다 폴란드의 흙을 넣어 정성스럽게 싸서 그에게 주며 “어디를 가든지 조국을 잊지 말라. 이 한 줌의 흙을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해 주기 바란다”며 선물을 주었습니다. 쇼팽은 공부하는 동안 힘들 때마다 “나는 폴란드 사람이다. 폴란드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해야지” 하며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불행하게도 3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폴란드의 이름을 높이며 살았습니다. 그의 유언은 “나의 폴란드 흙이 담긴 이 컵을 나의 무덤 속에 넣어주오”라고 조국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죽었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는 구체적인 삶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들에게 꼭 이기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익을 보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손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너무 이기적이면 안 됩니다.
지금 지구상에 한쪽에서는 너무 먹어 비만증에 시달려 살을 빼고자 피나는 투쟁을 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삶을 떠나 서로 나누어 먹는 나눔의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업에 실패하면 모두 도와준다고 합니다.
유태인으로서 이렇게 가난하게 살면 선민으로서의 망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면서도 서로 도와가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가난한 그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기 위해 서로 돕고 살아야 합니다. 평안!
- 하늘가는 길, 강릉 남대천에서. 산돌의집 장득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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