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84)-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가족사랑 2021. 9. 14. 16:43

로마서 강해(84)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로마서 12장 1∼2절 -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1장부터 11장까지와 12장부터 16장까지로 나눕니다.

11장까지를 신학적 부분 또는 교리적 부분이라 한다면 12장부터는 윤리적 부분 또는 실천적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윤리적 부분 또는 실천적 부분의 첫 절을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절)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즉 예배에 대한 권면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복음의 핵심진리와 우리를 구원하시는 계획을 실현시켜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신학적 설명을 성경의 기자들 가운데 그 누구보다도 잘 설명해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신학적으로 설명해 내려가던 끝에 사람이 더 이상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그 신비의 무한히 깊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그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과 지혜 그리고 자신과 모든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확신을 깨닫는 순간 그 신비를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노력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음을 느끼고, 그의 그 위대한 신학적 설명을 그치고 찬양과 경배로 돌아섰습니다.

그의 신학적 논술을 찬양과 경배로 결론지은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돌아선 이유는 하나님과 그가 하시는 일은 우리의 지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전체로 드리는 경배와 찬양의 대상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의 신학적, 교리적 부분의 끝을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3∼36)으로 끝맺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쓴 편지의 앞부분을 찬양과 경배로 끝맺은 사도 바울은 먼저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합니다.

12장의 첫 절인 이 문장 바로 앞에까지 사도 바울이 논한 것이 어떻게 보면 바로  “하나님의 자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비(慈悲)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오이크티르모스(οἰκτιρμός)라고 합니다. 헬라어 원래의 의미는 ‘사람의 불행이나 죽음을 애도하거나 슬퍼하다’는 뜻입니다. 이 의미에서 ‘동정(同情), 연민, 불쌍히 여김’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아시아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 자주 사용했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고후1:3), 빌립보서에서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빌2:1),

골로새서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3:12)

 

‘하나님의 자비’는 죄를 범한 인간에 대해서 벌을 주지 않고 참으시는 데서, 더 적극적으로는 그런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죄 많은 인생들이 망하지 않고 여전히 목숨 붙이고 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이런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소련 스파이 로젠버그를 재판할 때 카프만 (Kaufman) 판사는 사형선고를 내립니다. 피고의 변호사가 “판사님, 공정을 기해주십시오”하고 항의합니다. 이 때 카프만 판사는 “정의와 공정은 이미 집행되었습니다. 당신이 구할 것이 있다면 자비뿐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공정을 따질 자격은 전혀 없습니다.

구할 것이 남아있다면 하나님의 자비뿐입니다.

회개란 실상 나의 결심을 아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태도입니다.

용서는 오직 주님의 자비에 의한 은혜로서만 가능해집니다.

소위 인간이 말하는 높은 윤리나 밝은 양심 따위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소로운 것입니다.

나의 여하한 노력도 나를 구 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서만 구원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무한한 자비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 자비를 누릴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그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럼으로 오늘 우리가 약속의 자녀가 된 것도, 영으로 거듭 나게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로 인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기독교의 복음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다른 종교의 가르침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자비로 인해 허락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종교는 인간이 구원 얻을 자격을 스스로 증명해야 합니다.

그것이 선행이든 수행이든 혹은 계명준수든 한 마디로 내가 잘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자비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이 점을 우리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예수님이 들려주신 비유가 유명한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입니다.

 

둘째 아들은 스스로 아버지 곁을 떠나 철저히 방탕한 삶을 살다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옵니다. 아버지께 받아들여지기를 기대할 수 없었던 그는 그러나 아무 조건도 없이 전적인 아버지의 자비로 다시 자녀로 받아들여집니다. 이 둘째 아들의 모습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실체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는 자들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게 하기로 하신 자비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그 자비를 유대인만 아니라 온 이방인에게도 베푸신 것입니다.

 

로마에 있는 이방인들도 그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새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속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편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온전하게 이해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유다도 그렇고, 베드로도 예수님이 십자가 길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배반했고, 베드로는 부인했으며, 다른 제자들은 모두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는 있습니다.

유다는 뉘우치기는 했으나, 끝까지 자기의 생각대로 행동한 사람이었고, 베드로는 통곡의 회개 후에 예수님의 자비를 기다린 사람입니다.

누구나 하나님께 잘못할 수 있고, 신앙의 걸음에 실수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되었을 때, 끝까지 자기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유다는 끝내 자기의 길로만 갔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기다린 베드로는 이전보다 더 좋은 제자가 되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리는 삶, 자비하심에 내 맡기는 삶이 복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 심지어 배은망덕하고 사악하며 완전히 길을 잃고 절망한 자들, 반역자들까지도 차별하지 않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닮고자 하면, 우리 역시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자연스럽게 정이 쌓인 사람들에게만 자비를 베풉니다.

가족과 친구와 마음에 드는 이웃들에게만 자비를 베풉니다.

우리의 천성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비열한 사람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십니다.

 

배은망덕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내 심령을 감동시키지 않는 한, 우리는 은혜를 모르는 그 사람을 향해 “너하고는 절대 상종을 안 하겠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저버린 사람들에게서조차 등을 돌리지 않으십니다.

 

한 사람이 어린 딸과 함께 산지에 살면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와 딸은 잃은 양을 찾다가 그 양이 가시나무에 걸려 빠져 나오지 못하고 바둥거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그 양을 가시덤불에서 떼어내었으나 그 양은 이미 여러 곳에 긁히고 상처가 나 있었습니다. 상처가 나고 여러 곳에 긁힌 자국을 보면서 어린 소녀는 양이 너무 불쌍하여 울면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저 나무가 미워요. 저 나무를 잘라버려요."
다음날 아버지와 딸은 도끼를 가지고 가시 나무를 잘라 버리려고 그 곳을 찾아갔습니다. 나무 가까이 갔을 때 그 소녀는 작은 새 한 마리가 그 가시나무 위에 앉더니 작은 부리로 양이 가시에 긁히면서 남겨놓은 털들을 쪼아 모으는 것을 보았습니다. 작은 새는 부리 가득히 털을 물고는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자세히 살피던 어린 딸은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하나님께서 왜 이곳에 가시나무를 자라게 하시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나무의 가시들은 작은 새가 집을 지을 수 있는 부드러운 털을 모으는 일을 하는가 봐요."
사실 대자연은 서로서로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한 대가로 얻은 것이 가라지라면 이 얼마나 화나는 일입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라지나 가시나무들일지라도 뽑거나 베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세상의 끝날에 심판하실 이가 따로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가시나무도 가라지도, 좌절과 실패와 죄에 시달린 우리의 형제 자매들도 다 품에 안고 언젠가 우리 주님이 보상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자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너희를 좋게 대하여 주는 사람들에게만 너희가 좋게 대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한다. 
도로 받을 생각으로 남에게 꾸어 주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죄인들에게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좋게 대하여 주고, 또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큰 상을 받을 것이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 누기복음 6장32∼36절(새번역) -

 

우리는 자비의 성품을 연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진정으로 자비를 갈망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오늘 우리더러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촉구합니다

 

- 하늘가는 길, 강릉남대천에서 산돌의집 장득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