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85)-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로마서 12장 1∼2절 -
전 세계의 크리스챤들로 부터 존경을 받는 할머니인 코리텐 붐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했습니다.
"소련의 어떤 교회에서 예배시간에 일어났던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 순간, 예배당 문을 걷어차면서 두 명의 소련 군인이 들어 닥쳤습니다. 기관단총의 총 뿌리를 겨누어 흔드는 두 군인은 다음과 같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5분간의 시간을 준다. 예수를 버리고 살 사람은 5분 내로 예배당 밖으로 나가라. 예배당 안에 남아 있는 자들은 5분 후에는 모두 죽음을 맛볼 것이다.' 모든 신자들이 이 무서운 시험에서 이길 수 있는 용기의 믿음을 위해 조용히 기도하며 견디고 있는 순간. 몇 사람이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시계를 바라보고 서 있던 군인들은 다시 외쳤습니다. '마지막 50초다. 또 나갈 사람은 없느냐..' 남아 있는 성도들의 얼굴은 모두 거룩한 표정으로 이제 자기들의 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비장한 모습들이었습니다. 드디어 군인들은 안으로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그러더니 총을 땅에다 내려놓은 두 군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 두 사람은 크리스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 진정으로 헌신하고 주님을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크리스챤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는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 주님께 함께 경배를 드리십시다.'
기독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은 전생애를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로서 살아갑니다.
예배의 용어가 여러 가지 있지만, 간단히 말하면 '예배란 하나님의 영화로우심을 인식하고, 인정하고, 그 영화로우심에 대하여 나 자신의 모두를 드려서 예(禮)를 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무엇보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비에 이어서 예배에 대한 권면을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절)
헬라어 성경은 여기에서 예배를 '라트레이아(λατρεί)'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헬라어 단어는 “섬기다”(serve)라는 뜻을 가졌는데, 신약 성경 다른 곳에서도 발견됩니다.
히브리서 9장에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히9:6) 할 때 섬긴다는 것이 이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다락방 강화를 하실 때 이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16:2)
구약성경 역시 아바드(עבד)라는 단어가 “예배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의 본래 뜻 중 하나가 “섬기다”입니다.
대표적인 성경구절로는 신명기 6장 13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예배와 관련해서 구약과 신약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 섬기며 존경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즉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이 구약으로부터 신약에 이르는 예배의 핵심입니다.
예배(禮拜)를 영어로는 Worship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는 Service라고도 합니다.
이 뜻은 ‘봉사(奉仕)’입니다.
봉사는 생각으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손님접대, 음식시중, 안내와 관리 등입니다.
헬라어로 ‘영적’이라는 단어는 로기코스(λογικός)라고 하는데 이성적인(논리적인), 합당한, 영적 등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영적’이라고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으로 인식을 합니다.
즉 우리의 몸과는 상관이 없는 성실이나 진심, 이러한 것을 영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것은 그저 단순히 주일에 예배당에 모여 기도하고 찬송하고 설교 듣고 헌금하고 오는 예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합당하게”, “참되고 사리에 맞게”, “구속받은 피조물이 드려 마땅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에서는 "영적 예배"를 "합당한 예배"로 번역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온전히 하나님과 함께하는 예배,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온전히 드려지는 예배가 영적 예배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 예배’란 성도들이 합당하게 봉사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전 인격을 다한 희생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영적 예배’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몸”을 드리라 했지만 여기서의 몸은 단지 육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인격체로서의 우리 각자의 존재와 삶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너희 몸을 드리라” 한 것은 “너희 자신을 드리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우리의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말합니다.
우리의 소유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말합니다.
우리의 관심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말합니다.
우리 자신을 온전히 다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우리의 삶의 한 부분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 즉 우리의 생명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유대인들은 제사를 드릴 때 살아있는 제물을 죽여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제물을 드린다는 것은 희생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희생을 드린다는 것은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예배에는 말씀 그대로 희생이 뒤따라야 합니다.
희생이 무엇입니까?
내 손해가 있어야 합니다.
내 아픔이 있어야 하고, 내 불편함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것을 포기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제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것은 눈먼 소나 말이었습니다.
즉 가지고 있어봤자 골치 아프고 없앴으면 좋겠다 싶은 것을 바쳤습니다.
절뚝절뚝해서 데리고 다니기 힘든 짐승을 갖다 바쳤다는 것입니다.
없애고 싶은 동물들만 갖다 바치는데 이게 무슨 희생입니까?
우리식으로 말하면 찌꺼기, 쓰레기 같은 것만 바쳤다는 겁니다.
「영국의 어떤 농부가 소를 기르는데 그 소가 새끼를 두 마리를 낳았습니다. 농부는 송아지가 태어난 것이 너무너무 기뻐서 자기도 모르게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그는 송아지 새끼 두 마리를 낳고서 너무 감사한 나머지 당장 자기 부인에게로 달려가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송아지 새끼가 두 마리야. 하나는 주님의 것으로 하고 주께 드리십시다.” 그의 아내도 “아멘”으로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얼마 후에 송아지 새끼 한 마리가 비실비실 앓더니 죽었습니다. 죽은 송아지를 본 이 농부는 울상이 되어 방안에 있는 자기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큰일났어. 큰일났다고! 주님의 송아지가 죽었어. 주께 드린 송아지가 죽었단 말이야.”」
항상 주님의 송아지는 죽습니다.
우리가 선택해야만 할 때 우리에게 그분의 나라와 영광이 최고 우선순위에 있지 않기 때문에 주님께서 손해보십니다.
하나님 나라에 투자를 하면 이 땅의 것들보다 유익이 훨씬 많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투자는 시세가 오르고 이 땅의 투자는 시세가 하락합니다.
필라델피아의 백만장자였던 스티븐 지라드씨는 어느 토요일에 자기의 직원들에게 말하기를 다음날 나와서 방금 도착 입항한 선박의 짐을 내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한 청년이 창백한 얼굴로 지라드씨 앞에 나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라드씨. 저는 내일은 주일이기 때문에 일할 수 없습니다." "그래. 그러면 나와는 헤어지는 수밖에 없지." "그것은 각오하고 있습니다. 비록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해야 할 입장이지만 주일은 일을 할 수 없군요." "그러면 경리계에 가보시오. 그동안 일한 급료를 계산해 줄 것이요."
청년은 이런 일 후에 삼주일 동안이나 발이 아프도록 시내를 다니며 일자리를 구했으나 얻지를 못했습니다. 어느 날. 필라델피아시의 한 은행 총재가 지라드씨에게 연락해 오기를 새로운 은행을 하나 열어야 하겠는데 좋은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곰곰히 생각한 지라드씨는 해고한 청년을 추천했습니다. 그러자 은행 총재가 말했습니다. "자네는 그 청년을 해고하지 않았나!" 그러자 자라드씨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그랬지. 그 청년이 일요일에는 일을 할 수 없다고 해서 해고했네. 그러나 자기의 처하는 형편에 따라서 신념과 원리를 바꾸지 않는 사람이라야 새 은행의 돈을 믿고 맡길 수 있지 않겠나?" 그 청년은 지라드씨의 친구인 은행 총재에게 발탁 기용되어서 전의 직장보다 훨씬 좋은 자리에 근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일에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부담이 됩니까?
예배시간에 좀 일찍 나오는 것이 부담이 됩니까?
기도회에 참석하는 것도 부담이 됩니까?
거기에 물질이 들어가는 일이 있으면 더 부담스럽습니까?
그러나 사실 부담이 되어야 합니다.
부담이 되는 게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부담이 되는 게 헌신이고 희생입니다.
부담이 안 되는 것을 하나님이 왜 원하실까요?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 앞에 충성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물질적으로, 관계적으로 다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 예배입니다.
- 하늘가는 길, 강릉남대천에서. 산돌의집 장득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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