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76)-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가족사랑 2021. 7. 7. 13:23

로마서 강해(76)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 로마서 11장 1〜5절 -

 

11장은 “구약시대의 선민 이스라엘을 향한 약속이 아직도 유효한가”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거부하는 완악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아예 버리셨는가?” 하는 질문에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2절)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은 구약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셨다고 확신에 차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로 자신의 구원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런 자신이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셨다면 이스라엘 사람인 바울 자신도 당연히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예수를 핍박하던 자요, 예수 믿는 자와 교회를 박해하던 박해자였습니다.

그런 자신도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셨다면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바울의 주장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엘리야 시대 이야기를 들어 설명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여기서 바울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미리 아신’이라는 것은 인간의 시각으로 볼때, ‘미리아시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아시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이것을 예지(豫知, foreknowledge)라고 합니다.

신학적으로 <예지>란 하나님이 단번에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미 감지하여 아시는 행위라고 정의합니다.

그렇다고 예지가 하나님께서 단순히 미리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감지하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지>란 하나님의 사랑과 관련되어있는 아주 아름다운 사상입니다.

<예지>란 하나님이 인간을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각별히 사랑하시기로 미리 정해놓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이 누구를 사랑하기 전에 그 마음 속으로 '나의 이상형은 이런 사람이야!'라고 정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기로 마음에 정하시는 행위, 바로 그것이 예지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안다’라고 할 때, ‘지식적인 앎’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구약에서 ‘안다’라는 말은 ‘야다(ידע)’라고 합니다.

이 말은 ‘체험적인 앎’을 뜻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 ‘야다’를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동침하는 행위를 표현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창세기 4장1절).

신약성경에서는 이 체험적인 앎을 개인 대 개인의 인격적인 친숙한 관계를 표현할 때 사용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이 ‘안다’를 기노스코(γινώσκω)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히브리어 야다(ידע)를 번역한 것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요한복음 10장14절).

 

이처럼 예지란 하나님이 우리를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시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19절에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로마서 8장29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되 미리 아셨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아멘’하며 주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하기 훨씬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미리 아셨습니다.

 

로마서 5장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 이미 이전에 사랑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사랑이 십자가에서 비로소 확증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이미 우리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으시고 우리를 아셨습니다.

이것이 미리 아심, 즉 예지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미리 사랑하심이라고 바꾸어 표현해도 좋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택하여 부르신 첫 번째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은 처음으로 하나님을 안 민족이요, 처음으로 하나님께 쓰임받은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은 아주 특별한 존재이듯이 하나님께도 이스라엘 민족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민족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이 바울의 확신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을 하나님은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거부할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며 우리의 확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바울은 엘리야 시대의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아합왕의 통치기입니다.

이 시기는 우상숭배가 극에 달했던 시기이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한 것처럼 보이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다 죽이고 주께 제사하던 제단들을 다 헐어버렸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고발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서 엘리야는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주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로 오시는 통로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아갔습니다.

제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로 가는 통로입니다.

아합왕과 이세벨이 주의 선지자를 죽이고 주의 제단을 헐어버렸다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단절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나만 남았습니다’고 하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4절입니다.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엘리야 시대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기는 것처럼 보이던 시대, 오직 엘리야 자신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느껴지던 그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해 바알에게 굴복하지 아니하고 신앙의 정절을 지킨 사람 칠천을 남겨두셨던 것입니다.

 

어느 시대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해 소망의 씨를 남겨두십니다.

중국이 개방되었을 때 서방교회는 중국에 더 이상 믿는 자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중국이 열렸을 때 그 땅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해 남겨둔 엄청난 수의 남겨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남겨진 자들로 인해 오늘 중국이 변화되고 있습니다.

소련이 붕괴되고 동구 유럽이 개방되었을 때 그곳에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해 남겨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북한 땅에도 그루터기 신앙인들의 규모는 전국적으로 30만 명 정도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월남한 수많은 기독교계 인사들이 북쪽에 남겨놓고 온 가족들과 그곳에서 순교한 신앙인들의 후손들입니다.

이들은 70년 가까이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정부당국과 가족들의 냉대 속에서도 꾸준히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미국의 기독교 박해 감시단체  ‘오픈 도어즈’는  “북한 내 기독인들은 완전히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해야 하며, 발각될 경우 수용소로 끌려간다”며. “최소한 5만 명의 기독교 신자가 현재 수용소에 수감 중인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들은 북한땅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남겨둔 소망의 씨앗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무를 베더라도 그루터기를 남겨 둠같이 이 세상이 아무리 죄악이 가득하고,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을지라도 새로운 생명을 옴돋게 할 수 있는 그루터기는 남겨 두십니다.

하나님은 이 그루터기 신앙인을 통하여 미래의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여러분이 이 시대에 하나님 앞에 더 귀하게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그루터기 신앙으로 마지막까지 승리하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남겨둔 자가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평안!

 

- 하늘가는 길, 강릉남대천에서. 산돌의집 장득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