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고린도전서 강해(59) -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가족사랑 2026. 6. 6. 09:24

고린도전서13장4~7절□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20세기초, 일본에서 갓 안수를 받은 "나가노"라는 젊은 목사가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기독교인이 거의 없었으므로,

그는 어느 곳에 가서 교회를 개척할 것인가 일본 지도를 펴놓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면서 동서남북 100킬로미터 이내에 단 한명의 교인도 없는 곳을

찾고 보니 북쪽 '가나사와'라는 지역이었습니다.

이 젊은 목사는 곧 그 지역으로 가서,

천막을 치고 개척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아내와 아이 둘을 놓고 창립예배를 드렸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는데 교인이 오지 않았습니다.

6개월이 지났습니다.

6개월 동안 교인이 오지 않아

"하나님 뜻이 아니구나"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나가노 목사는 그 자리를 옮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곳에 보내 주신 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그 자리를 무려 5년 지켰습니다.

5년이 지난 어느 수요일 저녁이었습니다.

예배당 천막의 커튼을 젖히고

첫 번째 교인이 들어왔습니다.

청년이었습니다.

 

나가노 목사는 감격했습니다.  

그날 그는 지난 5년 동안했던 그 어떤 설교보다도 열정적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가 끝난 뒤에 그는 그 청년을 데리고 식탁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식사 도중에 이 청년이 "욱"하더니 피를 쏟았습니다.

그는 폐병환자였습니다.

 

나가노 목사가 순간적으로 속에서 갈등이 일었습니다.

'이런 괘씸한 사람이 있나?

이 사람을 지금 당장 쫒아 버려야 하나,

아니면 내가 이 핏덩이를 쓸어내고 계속 함께 밥을 먹어야 하나?'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네게 보낸 사람이다."

나가노 목사는 자기 손으로 핏덩이를 치웠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가져다가 청년과 다시 먹었습니다.

그 청년은 일본의 유명 정치인의 사생아였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출신이 그랬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괴로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복음을 접하게 되어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신학교를 다니는 도중에 폐병환자가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정학을 당했습니다.

다니던 교회에서 파문을 당했습니다.

이 청년은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거짓말이구나, 예수도 거짓말이다.

나는 누구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에게 나의 치료비를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에게 나의 폐병을 옮길 만큼 경솔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이라도 폐병 환자인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대해 주는 그리스도인을 만나고 싶다.'

그러나 없었습니다.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청년은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자살하려는데 우연히 한 사람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북쪽 가나사와 지방에 가면 나가노라는 목사가 있는데,

거기를 한번 찾아가 보라는 것입니다.

이 청년이 나가노 목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은 그날 저녁에 밥을 먹다가 피를 쏟았습니다.

 

나가노 목사는 피를 닦아 내고 다시 밥을 차려 왔습니다.

그 순간에 이 청년은 다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살아계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청년의 폐병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이 청년은 신학교를 졸업한 뒤에,

그 유명한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가 됩니다.

이후 그는 고베와 도쿄에서 수없이 많은 빈민을 위해

자신의 생을 섬김과 봉사의 삶으로 내어 놓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가장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변비라고 합니다.

항문에 변이 차돌같이 굳어 있어서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장갑을 끼고 손으로 후벼냅니다.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가 그 빈민들의 항문을

손가락으로 후벼 주었지만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러운 빈민의 항문에 자신의 입을 가져다 대고,

차돌같이 굳어 있는 변을 침으로 녹여서 빨아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된 일본 기자가 도요히꼬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도요히꼬 목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배운대로 합니다.

제 선생님은 제가 각혈한 핏덩이를 닦아 주셨습니다.

그분이 하신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같이 한다

기독교 신자가 국민의 1%에 지나지 않지만 일본 기독교는 세계적인 신앙인을 배출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여류 소설가로 수많은 신앙적 작품을 남긴 미우라 아야코가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탁월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일본의 작은 예수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1888-1960)목사입니다.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는 고오베에서 태어나 메이지 대학을 졸업하고 고오베 신학교를 거쳐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는 일본의 기독교 전도자이며, 사회사업가입니다.

그의 인도주의의 열렬한 전도에 감동되지 않는 이가 없을 만큼 전후 일본의 정신적인 지주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도요히코 목사는 일본의 빈민 운동을 비롯해 노동운동, 농민운동, 탁아 운동, 그리고 소비자 생활협동조합과 의료 생활협동조합을 탄생시킨 사회 운동가였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100만부 이상이 팔린 "사선을 넘어서"등 수많은 책을 저술하고 노벨 평화상과 노벨 문학상 후보로도 추천되기도 하였습니다.

가가와 도요히꼬가 쓴 자전 수기 "사선을 넘어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가가와 도요히꼬가 젊은 시절에 빈민굴에서 전도하는 것을 본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가 보니 아무리 봐도 가가오 도요히꼬가 허송 세월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도박꾼, 싸움해서 살인한 사람, 전과자, 창녀에게 전도하여 모아 놓고 예배를 드리는데 모두들 찬송을 부를 줄 모르므로 자기 혼자 찬송을 목이 터져라 부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도박꾼이자 깡패인데 도끼눈을 치켜 뜨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또 뒤에서는 남자들이 와서 예배드리는 중에 창녀를 끌어내면 창녀는 일어나 나갑니다.

그런가 하면 돈을 내라고 사람들이 가가와의 따귀를 때립니다.

그러면 돈을 주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친구는 화가 났습니다.

"저 사람들에게 돈을 주면 가서 도박을 할 텐데 너는 위선이다. 네가 알고 주느냐?"고 가가와에게 따졌습니다.

그때 가가와는 "나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같이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어린이를 키울 때 넘어지면 일으켜 주듯이, 의사가 병자에게 주사를 놓고 또 놓듯이 넘어지면 일으켜 줘야 한다. 다 알고 마지막까지 믿어 주고 참아 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냐?"고 가가와는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와 아내 가가와 하루(賀川ハル, 1888~1982) -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 πάντα στέγει 
(판타 스테게이)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다"는 헬라어로 "판타 스테게이(panta stegei)"입니다.

여기서 '참는다(스테게이, στέγει)'는 단순히 견디는 것을 넘어, 지붕이 비바람을 막아주듯 사랑으로 모든 허물을 덮어주고 보호한다는 능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는다'를 새번역 성경이나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덮어주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판타, πάντα)은 제한이나 예외가 없는 완전한 범위를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3절에 '판타'라는 헬라어(πάντα)가 나옵니다.

πάντα δι’ αὐτοῦ ἐγένετο(판타 디 아우투 에게네토) "만물이 그를 통하여 존재하게 되었다 (지은 바 되었다)."

'판타(πάντα)'는 '모든(all)'을 뜻하는 형용사 '파스(pas)'의 중성 복음 대격 형태로, 사람을 제외한 우주적 '만물' 전체를 지칭합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창세기 1장의 '천지'와 상통하며, 세상의 어떤 피조물도 예수님의 창조 사역을 벗어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사도 바울이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계속해서  '모든 것(판타, πάντα) )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큰 의미가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이 말은 사랑이 현실을 외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실보다 더 깊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든다는 의미입니다.

참는다는 것은 눌러 담는 침묵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실 자리를 남겨 두는 신앙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흔히 참음을 패배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참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자의 용기였습니다.

성경에서 참음은 단순한 수동적 인내를 넘어섭니다.

성경의 참음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악을 선으로 이기고 흔들림 없이 소망을 품는 적극적인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주로 '오래 참음(Longsuffering)''인내(Patience)'로 표현됩니다.

사랑은 단순히 소극적으로 견디는 것을 넘어갑니다.

사랑은 지붕이 비바람을 막아주듯 허물을 보호하고 덮어주는 적극적인 희생입니다.

성경에서 '참음'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악을 선으로 이긴 대표적인 인물은 요셉(Joseph)입니다.

요셉은 자신을 죽이려 하고, 노예로 팔아넘긴 형제들이 앞에 섰을 때, 보복하는 대신 오히려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며 악을 선으로 바꾸는 참된 용서와 인내의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세기 50장15∼21절)

 

예수님께서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한복음13장1절)

‘끝까지’(에이스 텔로스, εἰς τέλος)는 ‘완전히’, ‘절대로’라는 뜻으로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신 예수님의 완전하신 사랑을 의미합니다.

‘끝까지’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완전히 생명을 다할 때까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아낌없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완전한 사랑 앞에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제자들은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참으셨고, 그 참으심이 부활의 아침을 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참음은 현실의 고통을 무시하는 체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개입을 기다리는 능동적 신뢰입니다.

인간의 시간 위에 하나님의 시간을 겹쳐 놓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사랑은 덮어 주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을 덮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덮어주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힘이 듭니다.

모르는 척 하기가 쉽지않습니다.

못 들은 척 하기가 쉽지않습니다.

못 본 척 하기가 쉽지않습니다.

힘이 많이 듭니다.

우리 모두는 덮어주는 사랑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합니까?

누가 우리를 덮어주었습니까?

목수의 아들, 나사렛 예수이십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잘못을 들추어내신다면 누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몰랐을 때에만 죄짓고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있는 지금도, 얼마나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말씀보다는 자기 고집과 욕심과 기분대로 살아갈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렇게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줍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