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고린도전서 강해(57) -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가족사랑 2026. 5. 23. 00:11

고린도전서13장4~7절□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한 아들을 키우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렵게 얻은 귀한 아들이라서

언제나

"잘했다. 오냐오냐." 하며 칭찬만 해주었습니다.

아들이 어떤 나쁜 짓을 해도,

"아니야. 우리 아들.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랬지!"

하면서 아들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아들이 점점 커가면서

나쁜 행동을 더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래도 아들편을 들었습니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 사람이 잘못해서 그랬지!"

 

그렇게 자란 아들이 어른이 되었습니다.

어른이 된 아들은 도둑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타이르지 않았습니다.

 

"괜찮아,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사람이 방황할 수도 있지. 다 때가 되면 돌아와."

 

도둑이 된 아들은 도둑질을 잘해서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아주 대담하게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때는 많은 사람들이 다치기도 했고, 심지어 사람들이 죽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들은 마침내 잡혔습니다.

재판정에서 판사는 아들에게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아들은 결국 사형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사형을 집행하는 집행관이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

아들은 어머니를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사형당하는 것을 슬퍼하며 울던 어머니가 가까이 왔습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귀를 좀 대주세요. 긴히 할 말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귀를 가까이 대자, 그는 갑자기 어머니 귀를 꽉 물어버렸습니다.

깜짝 놀란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냐?!"

이때 아들은 울면서 말했습니다.

"어머니, 왜 한번도 저를 야단 치시지 않으셨어요?

물론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잘못했을 때, 잘못했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이 이야기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뼈아프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덮어 주고, 허용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잘못된 행동을 허용하거나 눈 감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모든 불의와 잘못된 행동을 거부하고 반대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죄악된 행동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요한1서 4장78절 -

그러나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단호하셨습니다.

죄는 당신 백성을 지옥 자식으로 만들기에 불의와 죄에 단호하셨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인간을 영적인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로 인해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죄의 값을 대신 치르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 요한1서 4장10절 -

 

 

사랑은 불의한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음행(淫行)등 불의(不義)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고린도교회는 이같은 불의를 통한히 여기지 않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대해 바울은 불의를 행하고, 형제간의 갈등을 세상 법정에서 해결하려는 세속적인 모습을 강력하게 꾸짖었습니다.

그것은 불의(不義)이고, 죄(罪)이며, 그냥 놔두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그의 머리속에는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떠올랐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불의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로 음행의 문제였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과 6장에 걸쳐 그 내용이 잘나타나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중 하나가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는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첩으로 여러 여자를 두기도 했는데 아마 그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 여자를 취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든 아름답지 못한 모습입니다.

더구나 거룩한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런 악을 행하는 자와는 함께 하지도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린도전서5장11절)

악인과는 함께 사귀지도 말뿐만 아니라 아예 성도 중에서 내어 쫓으라고 단호히 명령합니다.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쫓으라” (고린도전서5장13절)

오늘날 교회가 힘을 잃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교회가 스스로 거룩함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악행이나 불의에 대해서 단호함과 거룩함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함에 있습니다.

한 마디로 교회가 규율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치리(治理)에 실패했습니다.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무서워하고 사람의 눈치를 봅니다.

그 사람이 유력할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교회의 헌금을 유용하고 아무렇게나 써도 그가 목사이거나 장로일 경우는 제재하지 못합니다.

큰 교회를 이끄는 목사님이 공금 횡령과 간음 문제로 사회법정으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본인은 음모라고 하며 전혀 사과의 기색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 상황에서 교회나 교단은 이 불의에 대해서 징계를 내리지 못합니다.

 

교회가 거룩성을 상실하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밟힙니다.

교회가 거룩함을 상실하면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 마태복음 5장13절 -

사랑과 불의는 같이 갈 수 없는 단어입니다.

사랑으로 불의를 합리화 할 수 없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라는 말씀은 사랑이 도덕적 방향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무엇이든지 좋게 받아들이는 그런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진리(眞理)와 한 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불의를 보고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실패를 보며 은근히 통쾌해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실수를 이용해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죄의 소문을 양식처럼 씹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진리가 드러날 때 기뻐합니다.

사랑은 회개가 일어날 때 기뻐합니다.

사랑은 정직이 회복될 때 기뻐합니다.

사랑은 사람을 미워해서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사랑해서 진리를 말합니다.

진리를 말하지 않는 사랑은 결국 상대를 속이는 것입니다.

사랑을 잃은 진리는 결국 상대를 부수는 것입니다.

진정하고 거룩한 사랑은 진리의 빛 아래서만 꽃피웁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악인도, 또 어떤 죄도 다 품을 수 있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우리에게 잘못했을지라도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재물을 방탕하게 창기와 함께 다 써버리고 돌아온 탕자도 기다리시는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아무 책망 없이 받아주시는 따뜻한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우습게보고 만만히 대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만만한 분이 아니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의 성품과 함께 거룩의 성품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거룩'은 한자말로는 '성결(聖潔)'이고, 영어로는 홀리(holy)라고 합니다.

'거룩'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성품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뵈올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감히 그 앞에 접근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 …… 제 삼 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출애굽기 19장12,16절)

두려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구약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두 가지 성품은 사랑과 공의입니다.

이 두 모습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지만 결코 그 앞에 긴장감을 놓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불의한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 οὐ χαίρει ἐπὶ τῇ ἀδικίᾳ - 
(우 카이레이 에피 테 아디키아)

 

“불의(不義)”는 그리스어로 아디키아(ἀδικίᾳ, adikia)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기준에 어긋나는 모든 그릇된 행동, 부정직, 불법, 그리고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악한 행실을 포괄적으로 지칭합니다

이 말은 “옳게 생각되지 않는 것, 드러난 진실 때문에 그러지 말아야 할 것, 잘못된 것, 옳지 않은 것”의 의미입니다.

진실, 진리와 반대되는 모든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한복음 17장17절)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말씀과 맞지 않는 것은 아디키아(adikia), 즉 불의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진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그에 반대되는 것, 즉 불의를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서 가장 화내며 분노했던 것은 그들이 우상을 섬기는 불의한 일을 했을 때였습니다.

호세아서에서는 이런 이스라엘에 대해 ‘바람난 아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음란한 여인으로 대표되는 호세아의 부인 고멜이 바로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사회적이거나 도덕적인 죄보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을 배신한 우상죄를 가장 큰 범죄로 생각하셨고 가슴 아파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마음 중심이 하나님 외에 다른 곳에 한 눈을 팔고 있는 것을 못견디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요한계시록 21장2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신부로 존귀케 해주셨습니다.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 이사야 62장4절 -

‘헵시바’는 “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는 뜻이고, ‘쁄라’는 “결혼한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결혼한 사이입니다.

주님의 기쁨은 바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충실한 신랑으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배신하거나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불의를 행하지 않습니다.

신부된 우리 또한 그 주님을 일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와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가슴 아프게 하는 불의를 행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