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고린도전서 강해(55) -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가족사랑 2026. 5. 9. 10:49

고린도전서13장4~7절□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기원전 328년의 어느 깊은 밤,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현재 우즈베키스탄 지역)의 화려한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대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은

점차 페르시아의 전제 군주처럼 군림하며 자신을 신격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용맹스러운 장군인 클레이토스(Cleitus)는 왕의 오랜 친구였습니다.

그는 마케도니아 귀족 도로피데스의 아들로, 알렉산더보다 나이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클레이토스는 알렉산더 3세에 의해 기병 친위대장에 임명되었습니다.

클레이토스는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알렉산더 뒤에서 덤벼드는

페르시아의 무장 스피토리다테스의 팔을 베어 떨어뜨리고 왕의 목숨을 구한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필리포스 대왕 시절부터 함께한 충신이었습니다.

연회장에서 클레이토스는 술기운을 빌려 왕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의 모든 승리는 아버지 필리포스와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피 덕분이지, 당신 혼자 잘난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을 듣고 알렉산더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습니다.

옆에 있는 근위병의 창을 빼앗아 클레이토스에게 던졌습니다.

사실은 겁만 주려던 것인데 그만 클레이토스의 심장에 창이 꽂혀 죽고 말았습니다.

술이 깬 알렉산더는 자신이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고 절규했습니다.

그는 사흘 동안 방에 틀어박혀 "내가 내 은인을 죽였다"며 통곡했습니다.

심지어 자살까지 시도할 만큼 정신적으로 무너졌습니다.

이 사건은 마케도니아 장군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왕과 신하 사이의 끈끈했던 유대감은 사라졌습니다.

군대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로부터 불과 2년 뒤, 병사들은 더 이상의 원정을 거부하며 회군을 요구했고,

결국 알렉산더는 고독한 통치자로 남은 채 5년 뒤 요절했습니다.

알렉산더는 세상의 모든 적을 굴복시켰지만,

정작 자기 내면의 분노라는 가장 작은 적에게는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 한 번의 분노가 그가 평생 쌓아온 명예(fame)를 깎아내리고(de-fame),

제국의 붕괴를 앞당기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 οὐ παροξύνεται -

 

헬라어 성경은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이 부분에 ‘파로크쉬네타이, παροξύνεται’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 ‘성내다’는 능동태이지만 헬라어 성경에서 이 단어는 수동태로 쓰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직역하면  “사랑은 어떤 것에도 분내도록 자극받지 아니하며” 혹은 “사랑은 무언가에 의해 화가 돋워지지 아니하며”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 단어는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우상을 보고 마음이 격분하였다고 할 때 쓰인 단어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사도행전 17장16절)

“격분(파룩쉬노, παροξύνω, paroxyno)”이라는 단어는 ‘화가 났다’, ‘고난을 당한다'는 의미입니다.

'파룩쉬노'는 “뭔가에 문질러 날카롭게 만들다, 돋우다, 날카롭게 하다, 선동하다, 몹시 화나게 하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발작’(paroxysm)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대해 분노하실 때마다 사용된 단어가 바로  ‘파룩쉬노’입니다.

 ‘파룩쉬노’는 구약적인 배경에서 ‘분노하다’, ‘노하다’, ‘진노하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사도가 사랑의 특성으로 들고 있는 “성내지 아니하며”의 참뜻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분노의 이유는 자기사랑입니다.

자기사랑으로 가득한 사람은 자신의 이익이 침해 받을 때 분노하게 됩니다.

옛날에 시골에서는 새우젓 독에다가 뜬 물을 버렸습니다.

그 안에는 온갖 음식 찌꺼기들이 둥둥 떠다녔고 때가 되면 돼지를 키우는 사람들이 그 물을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이 물을 하루 종일 내버려 두면 부유하던 찌꺼기들은 천천히 가라앉아 표면은 마셔도 좋을 것 같을 만큼 맑은 물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수거하려고 온 주인이 긴 막대기로 그 물을 푹 찌른 후 확 휘두릅니다.

그러면 언제 맑은 물이었던가 싶을 정도로 온갖 더러운 찌꺼기들이 솟구쳐 오릅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은 가끔 성질나면 무섭지만 건드리지 않으면 정말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정말 좋은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좋고 나쁨은 내면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건드려서 언제라도 올라올 찌꺼기가 많은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좋은 사람은 어떻게 건드려도 전과 같이 맑은 사람들입니다.

자기 사랑이 이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손해를 줄 것 같은 자극이 주어질 때 항상 똑같은 방향으로, 똑같은 정도로 성을 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민감해서 돈 문제라면 앞으로의 모든 인간관계를 깨뜨릴 정도입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자존심에 대해 매우 민감하여 명예가 실추되었을 때 매우 큰 고통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양상은 다르지만 이것은 모두 하나의 핵심에 도달합니다.

바로 자기 사랑, 자기 이익입니다.

누군가 막대기로 자신의 내면을 건드리면 찌꺼기들이 확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사랑이 있는 인간이 어떤 자극을 받았을 때 성내는 것은 바로 자기 이익을 지키는 한 방법이 분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현대를 가리켜서 ‘분노의 시대’라고 어떤 사회학자가 정의를 내렸습니다.

‘Age of anger’

또 ‘Angry City-분노의 도시’란 말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화가 치밀어 오르게 되는 요소들이 너무나도 많이 깔려 있습니다.

우리는 아침부터 잠자리에 드는 저녁까지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경험들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심리학적으로 '성내는 것,  ‘분노’는 “가끔 무엇인가 우리를 방해할 때에, 우리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감정의 격동”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드레날린’이라고 하는 효소가 우리의 혈류 속에 분비가 되는데, 이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면 근육이 긴장하게 되고, 혈압이 올라가며 맥박이 빨라집니다.

그래서 속에서부터 어떤 힘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 옛말에 “성난 황소와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난 황소는 그저 사방에 부딪치는 모든 것들을 분별없이 파괴해 버립니다.

그로인해서 황소 자신도 뿔이 부러지고 가죽이 찢어지는 등, 자기 자신도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우리 인간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 내는 것’으로 인하여 빚어지는 참상들을 우리는 연일 뉴스보도를 통하여서 보고 있습니다.

황소가 내는 화는 잠깐이면 끝납니다.

그러나 인간이 성내는 것은 끈질기기 때문에, 거기에서 초래되는 비극은 말할 수없이 큽니다.

우정을 깨뜨려 버립니다.

가정을 파괴시킵니다.

폭력을 유발시키고 원한을 일으키고, 심지어 살인까지 이릅니다.

 

창세기 4장에는 분노로 인하여 가인이 자기의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 창세기4장 5∼8절 -

분노의 결과로 가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고 맙니다.

또 분노로 인해서 모세와 같은 위대한 인물도 실수를 범하고 맙니다.

'모세의 분노'는 성경 민수기에 기록된 사건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끊임없는 불평에 격분해 하나님의 지시를 어기고 반석을 두 번 친 사건을 말합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 민수기 0장1011절 -

이 혈기로 인해 모세는 평생의 소원이었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 외에도 분노는 수많은 성경의 인물들을 희생시켰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위에서 분노가 일으키는 파괴의 모습들을 우리는 매일같이 보고 있습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οὐ παροξύνεται

 

로마시대에는 스토아 사상이 사람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이 사상은 세상에 있는 모든 물질의 변화와 사람의 인연을 덧없는 것이라고 보고, 인간의 가장 높은 덕은 환경에 의해서 어떠한 흔들림이 없는 바위와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뻐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증오하고, 분노하는 것은 전혀 가치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라고 말했을 때 지칭하던 의미는 그들처럼 어떠한 감정에 흔들림도 없이 분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분노의 이유와 관계가 있습니다.

 

성전을 정결케 하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서 돈을 바꾸며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광경을 보시고 그들의 상을 엎으며 화를 내셨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무리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며 그 마음 안에는 인간이 도달할 수 없을 정도의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생애는 어떠한 감정의 흔들림도 없는 무정한 생애가 아니었습니다.

기뻐하실 때도 있었습니다.

눈물 흘리실 때도 있었습니다.

안타까워하신 적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의 참뜻은 아가페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모든 분노가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한 사람의 신자가 주님을 만나 참된 사랑으로 충만하면 분노의 이유가 바뀐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내려오셨을 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자기 안에 충만하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무덤덤한 인생을 사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울고, 웃고, 분노하고, 사랑하며, 열정적으로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분을 따라 아가페 사랑이 마음 안에 충만할 때 그렇게 살게 됩니다.

주님이 눈물 흘리셨던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주님이 분노하신 자리에서 분노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비록 가진 재물이 없고 남에게 있는 탁월한 지식이나 건강이 없더라도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있으면 주님이 살라고 허락하신 세상에서의 날들 동안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 분의 뜻을 따라 사는 자녀들로 인하여 이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이 됩니다.

 

 

사랑이 무너질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증상은 말의 변화입니다.

말은 날카로워집니다.

설명은 늘어납니다.

변명은 정교해집니다.

그러나 사랑이 살아 있을 때 말은 줄어듭니다.

사랑이 살아 있을 때 침묵은 깊어지며, 이해의 공간이 넓어집니다.

바울이 사랑을 설명할 때 대부분 부정형으로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은 무엇을 더 말하는가보다, 무엇을 말하지 않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은 상대를 규정하는 언어를 멈추고, 하나님께서 일하실 여백을 남겨 둡니다.

이 여백이 사라질 때 공동체는 숨이 막힙니다.

그러나 이 여백이 살아 있을 때 공동체는 비록 느리게 가더라도 함께 갑니다.

사랑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성공으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신실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보내실 때, 그들의 성공률을 계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순종의 길을 묻지 성과의 길을 묻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오해를 감수합니다.

사랑은 손해를 감당합니다.

사랑은 외로움을 견딥니다.

그러나 이 외로움 속에서도 사랑은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길을 먼저 걸으셨기 때문입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