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1년 겨울,
어두운 런던 거리 한 모퉁이에 지친 다리를 끌며 흐느적 흐느적 걷는 한 초췌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꾸부정하게 허리 굽은 모습의 그는 이따금씩 터져 나오는 심한 기침 때문에 한동안 걸음을 멈추곤 했습니다.
조오지 프레데릭 헨델( Georg Friedrich Händel)!
그가 저녁 산책중이었습니다.
헨델은 지난 40여 년 동안 영국과 유럽 일대에 걸쳐 하늘을 찌르는 명성을 누려온 대 작곡가였습니다.
새로운 곡이 발표될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갈채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왕실에서도 그에게 온갖 명예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마치 보잘것없는 길거리의 돌멩이처럼 모두에게서 버려진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지금은 그날 그날의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의 빈궁 속에 빠져 버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4년전에는 뇌출혈이 생겨 오른쪽 반신이 마비되었습니다.
걷기는 커녕 영감이 떠오를 때도 손을 움직여 음표 하나 그릴 수 없었습니다.
의사들은 도저히 회복을 기대할 수 없다고 단정할 정도로 헨델의 병세는 절망적인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헨델은 온천에 매일 1시간씩 몸을 담그고 있으면 차도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헨델은 독일의 '악스 라 샤펠'이라는 온천장에서 목욕을 했습니다.
한번에 계속해서 3시간 이상은 온천 물 속에 있지 말라는 의사들의 경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헨델의 생에 대한 무서운 욕망은 의사들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한번에 9시간 이상씩 물 속에 들어가 있곤 하였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병세가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무기력한 근육에 생기가 돌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손과 발을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헨델은 재생의 환희와 끓어오르는 창작열에 도취되어 연달아 네 편의 오페라를 작곡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다시 갈채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장마 때 잠시 내리쬐는 햇빛처럼 잠시 반짝이다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열렬한 후원자 캐롤라인 여왕이 작고 한 후 공연이 점차 줄게 되고 겨울의 혹한이 휘몰아쳐 왔습니다.
얼음장 같은 극장에 관객은 줄고 공연은 속속 취소되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생활고는 더해 갔습니다.
창의력도 의욕도 감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헨델은 점점 지쳐 갔습니다.
그는 이제 나이 60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정신적인 타격은 노쇠를 촉진했고 이제는 더 이상 희망을 갖지 말자고 스스로를 위안해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럴듯한 깊은 절망감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저녁이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산책을 나서곤 했습니다.
방안에 가만히 누워 있다는 것은 마치 스스로 죽음을 손짓해 부르는 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헨델은 계속 인적이 없는 길을 천천히 걸어 갔습니다.
저 만치 어둠속에서 교회의 종탑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문득 발을 멈추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 앉아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혔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제에게 소생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가 또 사람들로 하여금 저를 버리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제에게 창작 생활을 계속할 기회를 주지 않으십니까?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십니까!"
그는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우러러 나오는 목소리로 울부짖었습니다.
그는 밤이 깊어서야 한없는 슬픔 가운데 초라한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책상 위에 소포 한 덩어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조금 이상스럽게 생각하며 그 소포를 풀었습니다.
내용물은 한 묶음의 오라토리오 가사였습니다.
시인 '찰스 제넨스로 부터'라는 서명이 들어 있었습니다.
헨델은 그 가사 뭉치를 훑어보면서 투덜거렸습니니다.
'방자한 녀석, 삼류 시인인 주제에..."
혼잣말로 불평을 터트리면서, 동봉한 편지를 대충 읽어 내려갔습니다.
편지 내용은 '곧 그가사를 붙여 작곡을 착수해 주기 바란다'
덧붙여 '주께로부터 말씀이 있었다.'고 씌어 있었습니다.
헨델은 다시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헨델은 사실 그다지 믿음이 두터운 편은 아니었고 성격도 워낙 격렬했습니다.
"아니, 그래 뻔뻔스럽게도 제까짓 놈에게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셨다고?
그래 나에게 오페라 대본도 아닌 겨우 이 가사 쪼가리를 보내 주었단 말인가!"
심히 불쾌한 마음으로 그 오라토리오의 가사 원고를 뒤적거리다가 헨델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습니다.
이상하게 가슴을 찔러 오는 대목이 얼핏 눈을 파고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버림을 받았도다.
그는 자기를 불쌍히 여겨 줄 사람을 찾았건만 그럴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를 위로해 줄 사람은 아무데도 없었다.>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지옥에 버려 두지 않으셨도다.
그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헨델은 글자 하나 하나마다 마치 영혼이 있어 구구 절절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감동으로
그 원고를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 내려갔습니다.
말 한마디 글자 하나 하나가 새로운 의미를 지니고 빛나는 것 같았습니다.
<.. 현명한 지도자. 나의 구주가 살아 계심을 나는 알도다. 기뻐하라. 할렐루야.>
헨델은 황급히 펜을 찾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아무렇게나 앉아 악상이 떠오르는 대로 마구 휘갈겨 악보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놀랄 만한 속도로 음표가 오선지를 메워 나갔습니다.
다음날 아침 하인이 조반상을 들여 올 때까지도 그는 책상에 엎드려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헨델은 날이 밝아 아침이 된 것도, 또 아침밥상이 들어와 있는 것도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충성스러운 하인의 권고에 따라 빵을 집어 들긴 했으나 일에 정신이 팔려 있는 그는
빵을 입으로 가져가기 전에 연신 손으로 부스러뜨려 마룻 바닥에 떨어드리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정신없이 악보를 그리다가 미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방안을 큰 걸음으로 왔다 갔다 서성거렸습니다.
때로는 팔을 쳐들어 허공을 후려치기도 하고 큰 목소리로 우렁차게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일찍이 그분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하인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빤히 바라보시는 것 같은데 그 눈에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어요.
하늘나라의 문이 열린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바로 거기 계신다고 소리치기도 했지요.
그분이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닌가 더럭 겁이 날 정도였다니까요."
헨델의 이러한 광적인 상태는 무려 24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헨델은거의 먹지도, 쉬지도 않고 무섭게 일에만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기진맥진하여 침대 위에 나가 떨어졌습니다.
헨델의 책상 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오라토리오<메시아>의 악보가 마구 흩어져 놓여 있었습니다.
헨델은 혼수상태로 계속 14시간을 자고 일어났습니다.
곡을 완성한 헨델은 런던에서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뻔했으므로
헨델은 작곡한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들고 아일랜드로 갔습니다.
헨델은 자기 작품을 연주하는 데 한 푼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공연에서 생기는 모든 수입은 자선사업 기관에 보냈습니다.
헨델은 이렣게 말했습니다.
"<메시아>는 나를 가장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낸 기적이었습니다.
이제 이것은 온 세상의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1742년 4월 13일, 더블린에서 공연이 있었습니다.
시작 몇 시간전부터 극장 앞에 인파가 장사진을 쳤습니다.
공연은 대성공이었습니다.
더블린에서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하나의 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할렐루야' 합창이 연주될 때 왕 조지 2세는 평소에 헨델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할렐루야 연주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모든 관중도 그를 따라 모두 기립하여 노래가 끝날 때까지 서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에도 '할렐루야' 합창이 연주될 때마다 청중이 일어나 듣는 관습을 만들었습니다.
헨델이 살아 있는 동안 이 곡은 해마다 공연되었습니다.
공연 수입은 모두 파운들링 구제 병원으로 갔습니다.
헨델은 앞로도 이 작품으로 들어오는 수입은 계속 이 병원으로 보내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의 나이 74살, 1759년 4월7일에 그는 <메시아>가 공연되는 자리에 참석하였습니다.
'나팔 소리가 울리리'가 시작될 때 헨델은 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거렸습니다.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그를 부축하여 집으로 데려 갔습니다.
며칠 뒤에 그는 '나는 성 금요일(예수의 수난일)에 죽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4월13일 <메시아>가 초연되었던 성 금요일에 그는 자신의 소원대로 헨델은 눈을 감았습니다.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 이사야 40장1절(새번역) -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야'의 첫머리는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로 시작합니다.
이사야 40장 1절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본문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유다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유대 민족이 기원전 587년경에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 민족의 고통과 슬픔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오랜 세월동안 어둠 속에서 절망하고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도록 하셨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처지는 너무도 비참합니다.
최악입니다.
만리타국인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노예살이를 한 지가 10년 20년도 아니고 벌써 반 세기가 훌쩍 넘어 70년이 다돼 갑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곧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오래지 않아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겠지 하며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 지쳐서 모든 희망을 접고, 그저 자조와 탄식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뿐입니다.
바벨론 포로 1세대는 거의 다 죽고 그 포로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2, 3세대가 대를 이어 노예살이를 하며 절망 속에서 체념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언제 가장 낙담하고 절망합니까?
<이제 하나님마저도 나를 버리셨구나, 포기하셨구나>하고 느낄 때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사실 그때가 가장 심각한 순간이고, 가장 큰 위기인데, 이스라엘이 바로 지금 그런 최악의 절망과 회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희망의 메시지가 바로 오늘 이 이사야 40장 말씀입니다.
<너는 가서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위로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의 백성들이 낙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사야가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선포할때는 언제였습니까?
그때는 이스라엘민족이 우상숭배와 육체에 속한 악한 죄로 인해 바벨론에게 나라가 멸망한 때입니다.
그때는 대부분의 이스라엘백성들이 바벨론으로 잡혀가는 징계를 경험한 때입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이미 먼저 선포하신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심판’이 성취된 때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에 대한 징계를 받는 과정에서 깊은 좌절과 낙심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들에게 위로의 메세지를 강하고 시급하게 선포하시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가장 먼저 말씀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내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너희가 너희의 죄로 인해 징계 받았다고 결코 낙심해서는 안된다."
"나의 징계의 회초리는 너희를 파괴하는 것도, 죽이는 것도 아니요 너희를 치료하고 살리는 것이다. 징계가 없으면 너희는 사생아요, 고아인것을 명심해라”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그 어떤 것도 우연은 없습니다.
재수없어서 당하는 어려움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어떤 고통과 어려움이라 할찌라도, 그것은 나를 낙심과 절망가운데 가둘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통해 내가 하나님께서 나를 찢으시는 고통이 있다할찌라도 반드시 나를 치료하시고 회복케하시는 완전한 계획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외쳐야 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 42편5절)
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위로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의 백성들에게 참된 소망이 있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낙심과 좌절 가운데 빠져 있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분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뜻은 무엇 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함으로서 그분이 우리를 그 모든 불과 같은 용광로를 통해 우리를 새롭게 빗으시고 치료하심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허락하신 소망이 얼마나 큰지를 점점더 우리의 영적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 보고 들을수 있는 것 입니다.
이 소망은 바로 구약에서 여러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두신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2700여년전, 이사야가 위로의 말씀을 선포했던 이스라엘 민족뿐만이 아닙니다.
이 소망은 모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동일하게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낙심과 좌절을 벗어나 승리의 면류관을 향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줄수 없는 평화와 위로를 누릴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로해야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일러주어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고, 지은 죄에 비하여 갑절의 벌을 주님에게서 받았다고 외쳐라."(이사야 40장2절)
내 백성을 위로하는 이유는 이제 노예처럼 끝없이 힘겹게 노동해야만 하던 고난의 날이, 바로 영적 전쟁의 날이 끝이 났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는모든 무거운 죄가 용서함 받고 그 죄가 갑절이나 형벌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2000년 전에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 형벌을 온전히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무거운 죄의 형벌을 갑절이나, 아니 비교할수 없는 충분함으로 넘치게 갚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그의 독생하신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이유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산 소 -망을 갖게 해 주셨으며,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을 물려받게 하셨습니다.
이 유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 베드로전서 1장3-4절 -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의 자녀를 살리심으로 ‘산소망을 주시고,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때에 칭찬과 존귀를 얻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 살아있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이 소망으로 살아갑니다.
이 소망으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넉넉하게 견대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고린도후서 4장710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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