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과 칼럼

부활절 -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셨다

가족사랑 2025. 4. 16. 23:08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 요한복음 20장 19∼23절 -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참으로 불쌍한 모습으로 모여 있는 장면이 먼저 눈에 들어 옵니다.

그 모습을 19절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

제자들은 두려웠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유대 사람들이 자신들도 가만둘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그들이 언제 갑자기 들이닥쳐 죽일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공포가 밀려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집에 모여 대문이고 창문이고 문이란 문은 모두 닫아걸고서는 일절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숨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자기들의 선생님은 유대인들의 손에 의해서 잡혀서 돌아가시고, 자기들도 한번씩 혼쭐이 났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딴에 무언가 해보겠다고 잡혀가시는 예수님을 따라 가다가 그만 예수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하고 쫒겨온 바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마가복음 14장66∼72절)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했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마가복음14장50절)

예수님을 따르던 한 청년은 벗은 몸에 홋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잡혀서 베홋 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을 친 일 등, 하여튼 제자들은 지금 혼쭐이 나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몇몇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오더니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 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 등의 이야기를 와서 해 주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한복음 20장18절)

그러나 아직까지도 전체적인 상황 판단이 되지 않는 총체적 난국의 시간입니다.

그러니 자연이 두려운 마음이 들어 문까지 닫고 들어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두려움 속에는 자신들이 이제까지 믿고 따랐던 예수님의 무기력한 죽음과 사라져버린 희망에 대한 허무함이 있습니다.

제자로서의 도리를 다했어야 되는데, 스승 예수께서 가시는 길을 끝까지 따르지 못하고, 이런 저런 모양으로 배신하고 도망쳐 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라는 19절의 말씀은 단지 사람이 드나드는 출입문만이 아니라, 공포과 절망, 어둠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괴로워하고 있는 제자들의 닫혀 버린 마음의 문도 가리키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우리 말에 빛이 없어서 제대로 볼 수 없을 적에 어둡다라 합니다.

빛이 있어서 제대로 볼 수 있으면 밝다입니다.

캄캄하다는 빛이 없고 아주 까맣기에 아무것도 안 보일 적에 씁니다.

어둡다는 빛깔이 짙거나 검은빛에 가까울 적에도 쓰고, 슬픔이나 걱정이 가득하여 마음이 무거운 모습을 가리키며, 눈으로 잘 못 보거나 귀로 잘 못 듣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제자들의 상황이 이같이 어둡고, 캄캄한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캄캄한 자리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어두움 속에 들어서셨습니다.

제자들의 캄캄함 상황에 오셨습니다.

제자들의 닫힌 문, 닫힌 마음 가운데 들어오셨습니다.

제자들의 방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캄캄함으로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의 캄캄한 가운데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한탄과 분노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그 캄캄한 자리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어떤 장애물도 주님의 출입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에게는 그 어떤 장벽도 문제가 되지않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로마서 8장3439절 - 

이것이 부활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닫힌 문으로도 들어오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샬롬!’으로 인사하셨습니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누가복음24장36절)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한복음20장19절)

사도바울 역시 ‘은혜와 평강’이라는 인사말로 대부분의 서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샬롬"은 평안, 평강, 평화라고 번역되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서로 만날 때 자연스럽게 나누는 인사말입니다.

“다윗이 이에 소년 열 명을 보내며 그 소년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사무엘상25장6절)

 

히브리어 "샬롬(שָׁלוֹם)"은 헬라어로는 "에이레네(ειρηνη)"라고 합니다.

"에이레네"도 '샬롬'과 같이 인사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칠십 명의 제자들을 둘 씩 둘 씩 짝지어 전도대로 파송하시면서 ‘샬롬’을 말씀하셨습니다.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누가복음10장3〜6절)

 

"샬롬"이라는 단어는 구약의 제사장들이 축복을 빌어주는 기도문에 사용되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는 축복기원 세 가지 있는데 마지막은 ‘평강’에 관한 것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 민수기6장24〜26절 -

 

'샬롬'은 제사장의 기원에서 엿볼 수 있듯이 단순한 인사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비롯하여 하나님 백성들 사이의 수평적 관계를 규명하는 보다 높은 차원의 신앙적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평안’ 혹은 ‘평강’ 등으로 번역되는 ‘살롬’의 어원적 의미는 ‘온전함’(wholeness)입니다.

하나도 빠짐이 없다는 숫적 온전함에 샬롬을 사용했습니다.

“네겝의 성읍들이 봉쇄되어 열 자가 없고 유다가 다 잡혀가되 온전히 잡혀가도다”(예레미아13장19절)

공정한 저울추에 샬롬이 사용되었습니다.

 

사람은 편안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평안하기를 원하십니다.

환경이 좋고 돈이 많으면 편안한 생활은 하겠지만 환경이 좋고 돈이 많다고 평안한 것은 아닙니다.

편안은 물질적인 공급으로 육체가 누리는 차원이라면 평안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공급으로 마음과 영혼이 누리는 것입니다.

육체가 편안 하다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영혼의 평안이 있어야 행복합니다.

돈이나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마음의 평화입니다.

한 노인이 어떤 젊은이에게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었습니다.

젊은이는 “저는 건강, 사랑, 재물, 아름다움, 재능, 권력, 명예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젊은이에게 “젊은이, 마음의 평화 없이는 이 모든 것을 즐길 수 없다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평안은 환경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평안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서 살아도 주님이 없으면 참된 평강은 없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14장27절 -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에게 올 수가 없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악으로 건널수 없는 강이 있어 하나님이 평화가 우리에게로 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구속의 역사가 일어난후에는 하나님과 인간을 가로막았던 죄악의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의 평강이 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지은 사람이 발 뻗고 잘 수 없다는 우리의 속담대로 예전에는 우리가 죄때문에 발뻗지 못하고 자던 죄인이었으나 이제는 그 하나님의 은혜로 죄인 아닌 자 되어 두발 쭉 뻗고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평안은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실 때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한 평안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중에 평화로다.”(누가복음2장14절)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예언되어 기뻐하는 사람에게 주기로 한 평안의 약속은 언제 이루어졌을까요?

그 시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 요한복음19장30절 -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타이( Τετέλεσται)!'

'다 이루었다!'는 "테텔레스타이"는 '값을 지불했다', '완불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맡기긴 구속사업을 십자가상에서 달려 돌아가시는것으로 다 이루신 것입니다.

'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시점이 바로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평강을 가지고 오게 되는 시점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하시는 것은 '지금까지 너희가 가지고 있지 못하던, 하나님과의 평화가 포함된 그러한 평강, 그것을 내가 다 이루었다. 이제부터 너희는 하늘이 주는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라는 공식 선언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 넣어 예수님의 사역이 수포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으나 오히려 하나님은 그것을 승리로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선언하셨습니다.

사탄마귀로부터의 승리를 공식 선언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사망의 종노릇하였지만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었다. 이제는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는 해방선언을 하셨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찰스 스펄젼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그가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이 보니까 한 어린 아이가 새장 안에 갇힌 새 한 마리를 몹시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 그 새를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그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좀 괴롭히다가 죽여 버리려고 해요.”

목사님은 그 새가 너무 불쌍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돈을 주고 그 새를 새장 채로 샀습니다.

목사님은 그 즉시 새장의 문을 열고서 그 새를 날려 보냈습니다.

그 새에게 자유를 준 것입니다.

그 다음 주일은 부활 주일이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빈 새장을 들고서 강단에 섰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원수 악한 마귀는 우리를 괴롭히다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라는 엄청난 대가로 지불하고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