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2023년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살아나셨소!
안식일이 지났을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가서 예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래서 이레의 첫날 새벽, 해가 막 돋은 때에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그 돌을 무덤 어귀에서 굴려내 주겠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그런데 눈을 들어서 보니 그 돌덩이는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 돌은 엄청나게 컸다.
그 여자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웬 젊은 남자가 흰 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다.
그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시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살아나셨소.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소. 보시오, 그를 안장했던 곳이오.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시오."
그들은 뛰쳐나와서 무덤에서 도망하였다.
그들은 벌벌 떨며 넋을 잃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
- 마가복음 1장1∼9절 -
이레의 첫날 새벽, 해가 막 돋은 때에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세 여인이 예수님이 묻힌 무덤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였습니다.
세 여인은 엊그제 돌아가신 스승 예수님의 묘지를 찾는 길이었습니다.
세 여인의 스승 예수님의 장례에는 친구들의 조사(弔辭)가 없었습니다.
그 흔한 만장((挽章)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볼품없이 돌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세 여인은 무덤에 묻힌 이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발라 드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더는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온화하면서도 맑게 빛났던 그분의 눈빛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태산처럼 고요하게 앉아 계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슬픔이 여인들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로 내려앉아 있습니다.
갑작스런 스승의 죽음에 당황한 제자들은 끈 떨어진 연처럼 절망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을 가슴 속 깊이 하나하나의 떨림으로 느꼈던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곱게 수습하고 싶었습니다.
어스름한 새벽길을 가면서도 여인들은 깊은 침묵 속에 있었습니다.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세 여인은 심정으로 이미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윽고 무덤이 가까웠을 때 한 여인이 말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그 돌'을 무덤 어귀에서 굴려내 줄까요?"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은 이미 돌문을 넘어 예수님의 시신을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덤을 막은 그 무거운 돌문을 굴릴 육체적 힘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기서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 돌덩이가 '이미' 굴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여인들은 어리둥절해졌지만 주저치 않고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여인들은 웬 젊은 남자가 흰 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몹시 놀랐습니다.
그 젊은 남자가 말했습니다.
"놀라지 마시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살아나셨소.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소. 보시오, 그를 안장했던 곳이요.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시오."(6∼7절)
여인들은 얼이 빠질 만큼 놀라서 무덤에서 뛰쳐나와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그렇게도 사랑했던 여인들이건만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에 왜 그렇게 놀랐을까요?
그것은 주님이 다시 살아나리라고는 전혀 예기치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첫 놀람과 충격이 지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난 후 여인들을 비롯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이 환상이 아니라 현실임을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 위해 자기를 버리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도 우리처럼 죽음의 현실을 피하고 싶었던 보통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눈물의 기도가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의 고독한 절규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쓴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셨습니다.
부활은 이런 고통과 고뇌와 죽음 이후에 오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는 부활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며칠 후면 부활할 것을 알고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십자가의 비장함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그것은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뜻이다."
- 마가복음 15장33절 -
예수님의 고통은 현실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절규는 예수님의 절대적인 고독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 당신의 영혼을 맡기는 그 마지막 외침은 연기가 아니라 현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는 숨을 거두셨다."
- 누가복음 23장46절 -
부활의 소식은 예기치 않은 소식입니다.
부활의 소식은 기쁜 소식입니다.
부활의 소식은 소망이 되는 소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살다가 어려운 일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겪어내야 하는 고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은 오히려 하나님과 우리의 결속을 굳게 해줍니다.
그 어떤 잔인한 고통이라도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영적 자유를 빼앗아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을 믿는 사람은 이미 승리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난감한 현실을 만납니다.
도무지 문제를 풀어갈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아 막막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속에 사랑이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돌덩이'는 이미 굴려졌습니다.
마음이 꽁꽁 얼어붙은 것 같아 울고 계십니까?
잊지 마십시오!
주님은 이미 그 문을 녹이셨습니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 때문에 낙심하고 계십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이미 그 문제를 아시고, 이미 풀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들은 죽음에서 생의 의미를 찾지만 오직 기독교만은 부활에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사람이 한번 죽으면 다시 살수가 없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아는 가장 보편적인 상식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죽는 것을 제일 무서워합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인류의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한 기록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제자들이나 초대교회의 어떤 필자가 조작해서 쓰여진 것이라는 흔적이 없습니다.
정말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 같이 모든 목격담을 자연스럽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복음서에 나타난 부활의 목격담에는 복음서 나름대로의 의도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빈무덤에 관한 유대인들의 설명에 대해 그것을 부정하는데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누구도 무덤이 비었던 사실은 부정하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넌지시 비치었습니다.
이에 대한 마태의 기록은 “무덤이 봉인되어 있었고 또 경비되어 있었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 마태복음 27장63〜66절 -
마가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예수님의 시신에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가지고 무덤에 갔다가 천사로 부터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여인들은 천사로부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갈릴리에 가실테니 거기서 예수님을 뵈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 마가복음 16장 1〜11절 -
누가복음에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부활 목격담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몸의 실체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 누기복음 24장30절 -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면서도 몸의 실체를 가지고 있었음을 증언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 요한복음 21장12〜14절 -
이 모든 기록들을 보면 그들의 의도는 <부활보고서>나 또는 목격담을 흥미진진하게 만들려는데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의도는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인 초대 신앙인들로 하여금 신앙을 가지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또 교회 안팎에서 적들에 의해 유포되고 있는 거짓말을 대답하기 위해 기록한 흔적이 뚜렷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증거는 복음서 증언말고도 초대교회의 모습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주의 날(the day of the LORD)>
즉 '주일(主日)'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증거입니다.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파생되었습니다.
유대교의 성일은 안식일(安息日)이었습니다.
안식일은 한 주일의 마지막 날인 오늘날의 토요일입니다.
안식일의 특징은 모든 일을 금지하는 날이었다는데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특별한 관습에 대한 설명은 출애굽기20장에 있습니다.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 출애굽기 20장 11절 -
안식일(安息日, 히브리어: שבת 샤밭, 영어: Sabbath, 스페인어: Sábado)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쉬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편하게 쉬는 날'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6일동안 창조의 일을 하고 제7일에 안식하셨다는 내용에서 유래합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이 세상에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신성한 제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금요일 저녁 6시부터 토요일 저녁 6시까지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구약의 율법 하에서 안식일은 매우 엄격하게 준수해야 할 법이었으며 십계명 중에서 4번째 계명에 해당합니다.
이 날은 일체의 노동이 금지되었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 출애굽기 31장13∼14절-
안식일은 유대인들이 일상 생활의 규칙적인 노동에서 벗어나 자유를 행사하는 축제의 날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통해 인생의 영적인 면을 묵상하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를 얻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초기의 기독교 역사에서부터 벌써 그리스도인의 큰 날은 주일(週日) 중 마지막 날이 아니라 그 첫 날이었습니다.
안식일이 아니라 주의 날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하던 중 안식 후 첫 날 모였습니다.
안식 후 첫 날, 설교했습니다.
안식 후 첫 날, 성찬식을 가졌습니다.
이 사실이 사도행전에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식 후 첫 날, 즉 주의 날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위한 정기적인 집회였습니다.
왜 그들이 전통적인 안식일 대신 안식 후 첫날에 모였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삶을 주관해오던 달력에 급격한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해 줍니다.
거룩한 날을 한 주간의 마지막 날인 토요일에서 그 다음날로 옮긴다는 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지시되었고, 조상 대대로 오랫동안 준수되어온 안식일의 날짜를 바꿨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생명을 뒤흔드는 사건, 즉 예수님의 부활이 안식 후 첫날이었음을 밝혀주는 증거입니다.
또 다른 증거는 교회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 부활의 명확한 증거입니다.
확실한 것은 십자가가 제자들에게는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강펀치였습니다.
그들은 체포될까 두려워 모두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모인 곳의 문들을 닫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실망했고, 더 이상 제자라고 행세할 것을 두려워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특히 예수와 가장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베드로마저도 예수님과 모든 관계를 끊기 위해 저주까지 했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지 일곱 주일 지난 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 군중들에게 설교를 하였습니다.
안전하게 도망가겠다거나 예수와 관계를 끊겠다는 생각은 없어지고, 오히려 잡혀가도 좋고, 심지어 죽어도 좋다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도록 한 산헤드린에서 당당하게 심문을 받습니다.
아무 두려움없이 용감하게 그들에게 도전하였습니다.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 사도행전 4장18〜20절 -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어떻게 비겁자가 영웅이 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어떻게 해서 죽기까지 충성하리라고 마음먹는 사도가 될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는 다만 한 가지 설명만이 가능합니다.
그 주간동안에 무엇인가가 일어났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이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말했고, 예수님의 부활을 전도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이면서 또한 신앙이기도 합니다.
부활신앙은 우리의 삶에 무수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궁극적인 운명이 죽음이나 지옥이 아니라는 사실을 예수님의 부활에서 파악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희망 가운데 있는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부활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의 시간이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미래의 시간이 오고 있습니다.
영생의 시간이 오고 있습니다.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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