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과 칼럼

삶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은 어떤 고통도 견딜 수 있습니다

가족사랑 2023. 4. 8. 06:53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클

 

1941년의 어느 날.

미국 대사관은 빅터 프랭클에게 전화를 걸어 '이민 비자를 찾아가십시요.'라고 통보했습니다.

이미 많은 유대인들이 강제 노동 수용소로 끌려간 시점이었습니다.

음산한 기운이 점점 다가오고 있던 그때, 유대인인 그는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로스차일드 병원의 신경과장이었습니다.

미국으로 간다면 삶이 보장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모님이었습니다.

비자는 자신과 아내에게만 허락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미국으로 간다는 것은 노부모를 버린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그는 부모와 함께 빈에 남기로 결심했습니다.

 

유대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령이 속속 시행되었습니다.

그들은 가슴에 유대인임을 표시하는 노란 육각 별을 달아야만 했습니다.

공직에 있는 사람은 직위에서 물러나야만 했습니다.

결혼을 하려면 관공서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전차와 택시를 타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의사 자격을 박탈당했습니다.

 

1942년 9월, 빅터 프랭클은 나치에 의해 가족과 함께 슈페를 김나지움에 소집되었습니다.

소집된 모든 유대인들은 머리를 빡빡 깎였습니다.

며칠 뒤,

그와 그의 가족이 포함된 1300명의 유대인들이 화물차에 실려 체코슬로바키아 북부에 있는 텔레지엔슈타트 수용소에 도착했습니다.

극한의 노동을 요구하는 시설에 수용된 사람이 병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6개월 뒤,

빅터의 아버지 가브리엘이 여든한 살 고령을 견디지 못하고 굶주림과 폐렴으로 죽었습니다.

1944년에는

빅터의 아내인 틸리의 어머니가 나치 수용소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살해되었습니다.

그해 10월, 빅터 프랭클은 이송 대상자로 분류되었습니다.

이송될 다른 곳은 이곳보다 더 나쁜 곳일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탄약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던 아내 틸리는 건강한 편이어서 최소한 2년 동안 다른 곳으로 이송되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 틸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내와 헤어지기 싫었지만 빅터는 틸리에게 자신을 따라 가겠노라고 자원하지 말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아내 틸리는 남편과 함께 가기를 강하게 희망했습니다.

그녀는 이송을 자청했고, 나치는 그녀가 남편과 같은 열차로 이송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기차가 출발했습니다.

수감자들은 자신들의 행선지가 아우슈비츠가 아니길 간절히 바랬습니다.

400킬로미터를 달린 끝에 열차가 멈추자 기차 앞칸에서 비명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이 들려왔습니다.

“아우슈비츠다!”

가스실, 화장장, 살육, 고문…. 갖가지 끔찍한 말로 알려진 죽음의 구역에 도착한 것입니다.

 

기차에서 내린 빅터 프랭클은 남녀를 선별하는 장소에서 아내를 꽉 껴안았습니다.

떨어지지 않는 손을 놓으며 빅터가 말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 남아야 하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틸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빅터는 아내가 경비병들에게 몸을 허락하고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경우, 그렇게 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사흘 뒤, 그는 다시 화물열차에 실려 다하우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혹심한 노동에 시달리며 그는 고통의 의미를 물었습니다.

‘이렇듯 고통 받으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야만 하는 삶의 목적이 과연 있는 것일까?’

어두워져오는 저녁, 땅을 파며 이렇게 묻고 있는 그의 내면 깊은 데서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렇다!”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그가 얼굴을 쳐들었을 때, 그의 눈에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불빛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빛은 멀리 떨어진 지평선 위의 한 농가에서 비쳐오고 있었습니다.

 

1945년 4월27일, 빅터 프랭클은 독일에 승전한 미군에 의해 수용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삶의 의미’를 전도하는 심리학자이자 철학자로 살았습니다.

그는 “삶에는 의미가 있습니다”고 한결같이 말했습니다.

그는 “삶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은 어떤 고통도 견딜 수 있습니다.”고 말하고, 또 말했습니다.

고결한 인간이 되느냐 동물처럼 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라고 프랭클은 말합니다.

그는 '인간에게는 시련과 죽음조차도 빼앗아갈 수 없는 태도 결정의 자유가 있다'고,

'그 결정에 의해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의미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빅터 프랭클은 나치 시설을 운영하는 사람 중에도 좋은 사람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한 나치 경비병은 그에게 빵 한 덩어리를 나눠 주었고, 그는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습니다.

그가 감동한 것은 배고픔을 면해서가 아니라 ‘그가 빵과 함께 나에게 준 인간적인 그 무엇’ 때문이었습니다.

튀르크하임 수용소의 소장이 자기 돈으로 약을 사서 병든 수감자들에게 나눠 주었다는 것을 그는 나중에 들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수용소가 해방되었을 때, 유대인 수감자들은 미군에게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낼 때까지 소장을 숨겨 주었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말합니다.

“좋은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집단, 나쁜 사람으로만 이루어진 집단은 없습니다. 어떤 집단에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습니다.”

 

 의미를 발견한 사람

삶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

빅터 프랭클(Viktor Emil Frankl, 1905 ~ 1997)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신경학자이며 심리학자입니다.

빅터르 프랭클은 오스트리아 빈의 한 유대인 공무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심리학에 대한 관심을 일찍부터 드러내었는데, 김나지움 입학 시험의 마지막 시험에서 철학사상 심리 논문을 썼습니다.

1923년에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에, 빈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습니다.

우울증과 자살에 관한 주제에 집중하면서 신경과와 정신과를 전공했으며,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알프레드 아들러와 다른 방향을 추구했음에도 그는 초기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알프레드 아들러의 만남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1924년에 프랭클은 오스트리아의 사회주의 고등학생들을 위한 사회민주주의 청년 운동인 ‘Sozialistische Mittelschüler Österreich’의 회장이 되었습니다.

그가 의대생이였던 1928년에서 1930년 사이에, 고등학생들을 무료로 상담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는 샬롯 뷔울러같은 심리학자들 또한 참여하였으며, 학생들이 성적표를 받았을 때 학생들에게 특히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1931년에 빈의 학생 중 단 한 명도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프로그램의 성공은 프랭클을 베를린으로 초청한 빌헬름 라이히 같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프랭클은 빈에 있는 스타인호프 병원의 신경학과와 정신과에서 그의 레지던트를 마쳤고, 여기서 그는 자살 충동을 가진 3000명 이상의 여성들을 치료했습니다.

1937년, 프랭클은 비엔나 알서 스트라세 32/12에 신경, 정신과 병원을 설립했습니다.

1938년 나치의 오스트리아 인수가 시작되고, 그는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아리안”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을 금지당했습니다.

1940년에 프랭클은 로스차일드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정신과를 담당했습니다.

로스차일드 병원은 빈에서 유대인들이 입원할 수 있는 유일한 병원이었습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잘못된 진단을 하여 나치 안락사 프로그램을 통해 몇몇 환자들이 안락사 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1941년 12월에 그는 틸리 그로저와 결혼했습니다.

1942년 9월 25일, 프랭클의 아내와 부모는 나치 테레시엔슈타트 게토로 추방되었고,프랭클은  그곳에서 종합의사로서 일했습니다.

그의 정신 의학 기술이 알려졌을 때, 그는 정신 건강 관리를 위한 캠프를 설립하면서, B블록 4번 정신 병동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충격과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캠프를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레지나 조나스의 도움을 받아 자살 감시망을 만들었습니다.

1943년 7월 29일, 프랭클은 레오 백의 도움으로 테리엔슈타트에 있는 과학회를 위한 비공식적인 행사를 주최했고, ‘몸과 영혼’, ‘영혼의 의학 치료’, ‘수면과 수면 장애’를 포함한 일련의 공개 강의를 했습니다.

1944년 10월 19일, 프랭클은 아내와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그 해 10월 25일, 그는 다하우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5개월을 보냈습니다.

1945년 3월, 프랭클은 투르크하임으로 옮겼고, 미군에 의해 1945년 4월 27일에 해방되기 전까지 의사로 일했습니다.

어머니 엘사와 동생 월터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었고, 아내 틸리는 베르겐 벨젠에서 죽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본인의 ‘체험’을 통해 발견한 치료법이 바로 '로고테라피(logotherapy)'입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아들러의 개인심리학과 더불어 정신요법 제3 학파라 불리는 로고테라피 학파를 프랭클 박사가 창시한 이후, ‘드라마틱한 치유 효과’로서 로고테라피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프랭클은 모든 사람에게는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비참한 상황을 극복하고,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의미 없어 보이는 고통도 가치 있는 업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프랭클 연구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사람 중심’이었습니다.

오로지 환자를 통해 배우고, 환자의 말에 귀 기울였던 의사이자 가슴 뜨거운 치유자였습니다.

해방 후 프랭클은 빈 대학병원 신경정신과 과장으로 일했습니다.

1970년 미국 인터내셔널 대학은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 캠퍼스에 세계 최초로 로고테라피 강의를 개설하고 프랭클을 초빙 교수로 모셨습니다.

그는 전 세계 29개의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1997년 93세에 심부전으로 삶을 마감하고, 비엔나 중앙 묘지 유대인 구역에 잠들어 있습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짧은 인생을 아무 생각 없이 무의미하게 보낸다면 죽음 앞에서 얼마나 눈물겹도록 후회스러울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삶이란 쾌락을 느끼고 욕구를 충족시키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의 잠재적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인간은 이상과 가치를 위해서 죽을 수도 살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 찾기를 포기한 사람은 며칠 못가서 죽음에 이르렀다고 증언합니다.

반면,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묻는 사람들은 삶의 의욕을 잃지 않습니다.

인생은 시련과 죽음 없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나는 나의 고통이 의미 없어질 때가 가장 두렵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인생의 의미를 놓아버리는 순간, 나의 모든 시련을 감내해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는 절대 고통으로 변해 버립니다.

삶의 의미를 놓아버린 사람에게 과거는 고통입니다.

그는 세월을 한 장 한 장 뜯겨져 나가 결국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 달력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로 가득 찬 사람에게는, 세월이란 달력 뒷장에다 소중한 사항을 빼꼭히 적어놓고 차곡차곡 쌓아놓은 창고와 같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과거는 오히려 더 행복감을 주는 재산입니다.

과거는 절대 바꿀 수 없도록 완성되었습니다.

그것은 매 순간 순간 내 삶에 소중한 교훈과 의미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빅터 프랭클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책임감'에서 찾습니다.

그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은 책임감과 함께 사랑과 시련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듯이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하려는 바는 첫 번째 인생에서 망쳐놓았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패배감으로 과거를 곱씹지 말고 주어진 현재에 충실하라는 뜻입니다.

이럴 때 실패는 미래를 위한 거름이 됩니다.

빅터 프랭클은 자신을 넘어설 것을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자신에 대한 집착은 병을 만듭니다.

그러나 자신의 모자람에 웃을 수 있는 사람은 튼실한 자아를 갖출 수 있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남 앞에서 긴장하면 땀이 쏟아져서 고민하던 환자와의 상담사례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환자의 긴장을 풀어주기는커녕, 이렇게 권했다고 합니다.

“저 번에는 땀을 한바가지만 흘렸지만, 이번에는 열 바가지 흘리도록 노력해 보세요.”

그러자 환자는 땀 흘리기를 멈췄습니다.

그가 말하는 역설적 의도(paradoxical intention)란 이런 것입니다.

콤플렉스는 피하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점점 더 강하게 나를 옥죄입니다.

오히려 콤플렉스를 받아드리고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을 때. 마음의 짐은 조용히 사라져 버립니다.

신경질환 환자가 자신에 대해 웃을 줄 알게 되면 그가 자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합니다.

백내장에 걸리면 세상은 구름으로 가득 찬 듯 보입니다.

녹내장 환자는 빛 주변에서 무지개를 봅니다.

그러나 건강한 눈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봅니다.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남들과 세상에서 진정 의미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거울 속의 내 모습에서 눈을 떼면 그 밖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문제에 집중하지 말고 남들에게 사랑을 주십시요.

그렇게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어 가면 진정한 일곱빛깔 무지개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평안!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 빌립보서 4장 1113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