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마을에 한 존경받는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도 잘 듣고, 일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일을 하기 싫어했고 매일 돌아다니며 친구들과 술만 마시고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아버지가
"얘! 너도 형처럼 밭에 나가 일을 하려무나!"하고 말해도
둘째 아들은
"쳇! 밭에 나가 하루 종일 고생해서 무슨 재산을 모은다는 거예요?"
"전 사업을 해서 큰 돈을 모을거예요"
그러던 어느 날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와서 돈을 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크게 돈을 벌 수 있는 사업거리가 생겼어요.
이번에 기회를 놓치면 다시 이런 기회가 안 올 거예요"
"이버지! 큰 돈이 필요합니다." "
아버지 재산 중에서 저에게 물려주실 유산을 미리 주세요."
"반드시 큰 돈을 벌어가지고 돌아오겠어요."
작은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나 죽기 전에는 유산은 한 푼도 안 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날마다 아버지를 졸랐습니다.
나중에는 땅바닥에 주저 앉아 엉엉 울며 소리 질렀습니다.
"아버지가 정 돈을 안주시면 전 죽어버릴거예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아버지는 작은 아들에게 손을 들었습니다.
"얘야! 네가 세상 물정을 몰라 사업을 한다고 그러는 모양인데
부디 일이 안되더라도 딴 마음 먹지 말고 아비에게로 돌아오거라."
아버지는 평생 고생하며 절약해 사 두었던 논과 밭을 팔아 큰 돈을 만들어 작은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가 주신 큰 돈을 받고는 아버지 앞에 엎으려 큰절을 하며 말했습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부디 성공해서 돌아올께요. 제가 아버님을 호강시켜드릴거예요!"
둘째 아들은 큰 소리를 치며 집을 떠났습니다.
둘째 아들은 먼 나라에 가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난생 처음 큰 돈을 만지게 된 둘째 아들은 돈 쓰는 재미에 맛이 들렸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매일 도박이나 하고 술집만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얼마 안되어 그 많은 돈을 깡그리 날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니? 벌써 돈이 다 떨어졌잖아!"
돈자루를 뒤지던 둘째 아들은 그제야 자기가 돈 한 푼 없는 거지가 된 것을 알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여보게, 내가 돈이 다 떨어졌는데 돈 좀 꾸어주게나?"
그러나 친구들이나 술집 여자들은 그에게 돈이 다 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
언제 보았느냐는 듯 둘째 아들을 차갑게 대했습니다.
"이 봐 나도 돈 없어, 딴 데나 가봐!"
여러 곳을 찾아가봤지만 다들 한결같이 둘째 아들을 차갑게 대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그제야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먼 나라에서 이젠 꼼짝없이 굶어 죽게 되었으니 누굴 탓할 수 없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할 수 없이 농장에 취직을 해서 간신히 굶어 죽기는 먼했습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 나라에 가뭄으로 흉년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농장 주인은 월급은 커녕 밥도 주지 않았습니다.
"주인님! 배고파 죽겠습니다. 벌써 이틀을 굶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주인에게 사정을 했습니다.
"우리도 먹을 것이 없어 죽을 끓여 먹고 있네. 자네에게 줄 게 없네. 정 배고프면 돼지가 먹는 죽이라도 갖다 먹게."
"저 더러운 돼지 죽을 먹으라구요?"
그러나 배가 고픈데 어쩌겠습니까?
둘째 아들은 할 수 없이 돼지 먹는 죽그릇에서 죽을 떠다가 주린 배을 채우게 되었습니다.
줄째 아들은 죽을 먹다가 급기야 쓰러져 엉엉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땅을 치며 울부짖었습니다.
"아, 나는 하나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어서 이 꼴이 되었구나!
우리 아버지 집에는 일하는 종들도 배부르게 먹는데 나는 여기서 꼼짝없이 죽게 되었구나!"
한참을 땅바닥에 주저 앉아 흐느껴 울던 둘째 아들이 눈물을 멈추고,
"그렇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아버지께로 가서 일꾼으로라도 써 달라고 부탁해보자.
아버지 집의 일꾼으로 있는 것이 여기서 굶어 죽는 것보다 더 낫다!"
둘째 아들은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고향집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며칠이 걸렸을까요?
오랜 후에 둘째 아들은 간신히 자기가 살던 고향집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향집 앞에는 아버지가 문 밖을 내다 보며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멀리서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거지꼴을 한 둘째 아들을 한 눈에 알아보았습니다.
"아니, 저기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저 사람이 내 둘째 아들이 아닌가?"
아버지는 너무 반가와서 집에서 뛰쳐 나갔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을 품에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 녀석아! 지금 오냐. 잘 돌아왔다. 그래, 얼굴을 보니 고생을 많이 했구나!"
"그러기에 내가 힘들면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오라고 하지 않았냐?"
"이제라도 왔으니 잘 왔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얼굴도 들지 못하고 목이 메어 흐느껴 울며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를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말할 자격도 없습니다."
"이제 아버지 집의 일하는 일꾼으로나 써주시고 밥이나 먹여주세요. 아버지!"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이 녀석아! 일꾼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너는 내 아들이야. 어서 집으로 들어가자!"
그리고는 하인들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얘들아, 우리 둘째 아들이 다시 돌아왔다.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여라. 그리고 새 신발과 새 옷을 가지고 오너라!"
둘째 아들은 새 신발과 새 옷을 입고 손에는 아버지가 준 반지를 꼈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잔치 자리에 앉아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었습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이 이렇게 잔차가 벌어져 떠들썩한 집에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하루종일 밭에서 땀을 흘리고 일하다가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오는 길이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집안이 떠들썩하며 노랫소리가 들려 깜짝놀라 마중 나온 하인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오늘이 무슨 날이길래 이렇게 큰 잔치를 벌였지? 누구 생일인가?"
하인이 말했습니다.
"큰 도련님! 작은 도련님이 돌아오셨어요. 그래서 아버님께서 송아지를 잡고 큰 잔치를 벌이셨어요. 어서 들어가 보세요."
"뭐 잔치를 벌였다구! 아버님이 지금 제 정신이신가?"
"아니, 재산을 말아 먹은 놈인데, 두들겨서 내쫓아도 시원찮은데. 그런 놈을 위해 잔치를 베푸시다니!"
그러면서 첫째 아들은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뛰쳐 나와 첫째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큰 애야! 죽은 줄 알았던 네 동생이 살아 돌아왔어! 어서 들어가자!"
첫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어떻게 저런 놈을 위해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이십니까? "
"아버지는 제 친구들이 왔을 때에는 염소 새끼 한 마리 잡아준 일이 없으셨어요? "
그러자 아버지가 첫째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큰 애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까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
"그러니 얼마 기쁜 일이냐? 너도 같이 들어가서 동생이 돌아온 것을 축하하자!"
탕자의 이야기에 대해 잘 알려진 미술작품으로는 네델란드 대표적인 화가 렘브란트(1606~1669)의 ‘탕자의 귀향’이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중년에 큰돈과 명성을 얻었으나 중년 이후 아들과 두 딸을 잃었습니다.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떴고, 그 후 함께 살던 여성은 정신병원에 갇혔습니다.
렘브란트는 재물과 명성을 모두 잃었습니다.
열광적인 미술품 수집과 규모 없는 생활로 파산을 당했습니다.
렘브란트는 '티투스'라는 아들 하나를 제외하고는 자식들이 모두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들 '티투스'도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그런 렘브란트에게 이 작품은 특별한 의미를 가졌을 것입니다.
고통과 용서와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분위기를 가진 이 작품은 잘 나가던 시절에 그릴 수 있는 작품이 아닙니다.
모든 비극을 다 겪고 나서 렘브란트는 돼지 우리 안에서 생활하며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던 탕자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그는 소망, 재물, 체면, 가족, 자신감 등 모든 것을 잃고 나서 등장인물을 실물 크기로 그린 높이 2.5m짜리 대작 <탕자의 귀향>을 남겼습니다.
‘돌아온 탕자’는 1667년경, 렘브란트가 죽기 2년 전에 완성한 그림입니다.
그의 마지막 대작으로 1766년 러시아로 팔려 오늘날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구, 레닌그라드)의 에르미타슈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하버드대 교수를 지냈던 네델란드 신학자 헨리 나우웬(1932~196)는 이 그림을 분석하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신경쇠약에 시달렸던 '나우웬'은 사는 것이 고통스러워 아무런 것도 할 힘이 없을 때는 렘브란트나 고흐의 그림들을 감상했다고 합니다.
이들 거장의 삶과 예술은 그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상처를 싸매고 다독여준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나우웬은 어둠과 빛의 대비를 통해 등장인물의 내면을 탁월하게 표출했던 렘브란트 그림의 등장인물을 하나하나 자신에 대입해가며 깊은 성찰을 얻어냈습니다.
이 그림에서 거의 눈이 멀다시피 한 아버지는 아들을 '보아서'가 아니라 '어루만져서'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봅니다.
'어루만진다'는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진솔한 방법입니다.
인간 사랑의 첫 경험은 '어루만짐'에서 얻어집니다.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그 사람을 깊이 어루만집니다.
인간을 가장 인간적으로 느낄 때에는 언제나 손이 사용됩니다.
누군가를 인간적으로 만날 때 그는 상대의 손을 잡습니다.
돌아온 탕자인 둘째 아들을 끌어안고 있는 아버지의 손을 자세히 보면 두 손이 다릅니다.
왼손은 우락부락하게 힘 센 남자의 손이고, 오른손은 섬세한 여자의 손입니다.
왼손은 고통을 이해하는 아버지의 손이고, 오른손은 위로와 사랑으로 가득한 어머니의 손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핵심은 아버지의 손에 있습니다.
이 손에 모든 빛이 모여 있고 이 그림의 다른 두 목격자들의 시선도 아버지의 손에 쏠려 있습니다.
그 안에는 자비와 화해. 용서와 치유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어루만지는 아버지의 손'과 '다 떨어진 신발마저 벗겨진 아들 발'의 대비 또한 감동적입니다.
먼 길을 걸어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은 아들의 발은 처량합니다.
서양화의 전통에서 남자가 맨발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엄청난 수치를 상징합니다.
아들의 불효를 심장으로 끌어안아주는 아버지 앞에서 아들은 아무 것도 감출 것이 없습니다.
눈이 거의 먼 아버지와 그의 심장 바로 아래에 이마를 대고 있는 아들의 표정 또한 기가 막힌 대조를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표정은 깊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고, 아들은 사랑으로 가득 찬 심장의 고동소리를 듣습니다.
아들이 오른쪽 허리에 차고 있는 단검은 그래도 그가 좋은 가문 출신으로서의 자부심은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서로 다른 것을 주시하는 오른쪽 세 사람의 눈길도 여러 가지를 시사합니다.
맨 오른쪽 붉은 옷과 화려한 모자를 쓴 채 지팡이를 들고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형의 표정은 렘브란트가 특히 잘 다루는 명암대조법으로 질투와 시기심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방황은 집을 나가 떠도는 것이고, 귀향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자기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집에는 부모님의 사랑과 지혜와 보호가 있습니다.
부모는 낳아서 기르고 가르쳐준 것만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며 자식에게 영원한 것을 주려고 합니다.
가정은 구성원들에게 원초적인 힘을 주는 본향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가정을 천국의 모델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에 관한 이야기는 구속사의 중요한 장면입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아들을 기다리고 맞이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인간의 구원을 바라는 하나님의 심정을 대변합니다.
아들이 저 멀리 나타났을 때부터 아버지는 그를 알아보고 달려와 반겨주었습니다.
자식의 나약함을 알고 있었던 아버지는 그가 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매일 마중 나왔던 것입니다.
그들이 포옹했을 때, 아들은 후회의 말을 하려고 했지만 아버지는 말렸습니다.
아들을 꼭 껴안은 아버지는 하인들에게 좋은 옷을 마련하고 살찐 송아지를 잡으라고 합니다.
이렇게 아버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아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줍니다.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 누가복음 15장 11∼32절 -
탕자의 비유의 초점은 죄인을 찾고 계신 하나님입니다.
잃어버린 동전과 양을 찾는 주인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탕자의 비유에는 죄인의 회개와 회심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아들의 자리를 회복시킬 수 있는 분은 아버지뿐입니다.
죄인이 죄를 짓고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 단계가 있고 또 회복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회복하는 길에는 세 가지 단계가 필요합니다.
첫째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죄가 가져오는 비극 중의 하나는 자기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탕자는 자기의 죽음의 현실을 발견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17절).
오늘도 자기의 현실 존재를 오해하며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행한 인생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고,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지은 죄에 대한 정직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집 나간 아들, 탕자는 눈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회개하며 아버지에게 종으로 써달라고 아버지 앞에 나갔습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18-19절)
탕자는 아담과 이브처럼 핑계대지 않습니다.
자기의 죄를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습니다.
탕자는 자신이 하늘과 아버지께 범죄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 라고 자기의 죄를 정직히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다윗이 눈물로 회개한 것처럼 죄를 범한 인생들은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셋째로 회개의 자리에서 일어나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탕자는 회개의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께로 갔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19절)
마음으로 회개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일어나 아버지께로 나아갔습니다.
단순히 회개의 눈물로만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올 때 아버지와 온 동네 사람이 기뻐하는데 유독 형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27절)
큰아들은 자신만이 아버지 앞에서 신실한 아들이며, 방탕한 것이 없는 자라고 자만했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29-30절)
큰 아들은 소견이 좁은 자였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함께 기뻐하고, 고난 속에 빠져 있을 때 함께 눈을 흘리며 염려해 주는 것이 신령한 형제의 관계입니다.
아버지는 ‘네 동생이 죽었다가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2절)
‘네 동생’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의 동생이 아니라, ‘바로 네 동생’이라고 하며 동생과 형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 앞에서 아들의 관계를 회복한 것처럼 형제와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하늘나라의 잔치 자리에는 이처럼 관계를 회복한 형제들로 북적거리고 있습니다. 평안!
- 하늘가는 길, 강릉남대천에서 산돌의집 장득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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