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과 칼럼

"5달러요. 더 없습니까? 다섯을 셀 동안 아무도 없으면 이 자전거는 어린 신사의 것이 됩니다."

가족사랑 2021. 9. 22. 15:45

 자전거 경매장에서 일어난 일


외국의 어느 자전거 경매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날따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저마다 좋은 자전거를 적당한 값에 사기위해 분주한 모습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이 주 고객인 그 경매장 맨 앞자리에 한 소년이 앉아 있었고, 
소년의 손에는 5달러짜리 지폐 한 장이 들려 있었습니다.

소년은 아침 일찍 나온 듯 초조한 얼굴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경매가 시작되었습니다.

소년은 볼 것도 없다는 듯 제일 먼저 손을 번쩍 들고

"5달러요!"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곧 옆에서 누군가 "20달러!" 하고 외쳤고,

그 20달러를 부른 사람에게 첫 번 째 자전거는 낙찰되었습니다.

두 번 째, 세 번 째, 네 번 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5달러는 어림도 없이 15달러나 20달러, 어떤 것은 그 이상의 가격에 팔려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보다 못한 경매사는 안타까운 마음에 슬쩍 말했습니다.

 

"꼬마야, 자전거를 사고 싶거든 20달러나 30달러쯤 값을 부르거라."

"하지만 아저씨, 제가 가진 돈이라곤 전부 이것뿐이에요."

 

"그 돈으론 절대로 자전거를 살 수 없단다. 가서 부모님께 돈을 더 달라고 하려무나."
"안돼요. 우리 아빤 실직 당했고, 엄만 아파서 돈을 보태 주실 수가 없어요.

하나밖에 없는 동생한테 꼭 자전거를 사가겠다고 약속했단 말이에요."

소년은 아쉬운 듯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경매는 계속되었고 소년은 자전거를 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제일 먼저 5달러를 외쳤고, 어느새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소년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그 날의 마지막 자전거!

이 자전거는 그 날 나온 상품 중 가장 좋은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 경매를 고대했었습니다.
"자, 최종 경매에 들어갑니다. 이 제품을 사실 분은 값을 불러 주십시오."

경매가 시작되었습니다.

소년은 풀 죽은 얼굴로 앉아 있었지만 역시 손을 들고 '5달러!'를 외쳤습니다.

아주 힘없고 작은 목소리였습니다.
순간 경매가 모두 끝난 듯 경매장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아무도 다른 값을 부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5달러요. 더 없습니까?"

"다섯을 셀 동안 아무도 없으면 이 자전거는 어린 신사의 것이 됩니다."

사람들은 모두 팔짱을 낀 채 경매사와 소년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5… 4… 3… 2… 1."  

"와~아!!"

마침내 소년에게 자전거가 낙찰되었다는 경매사의 말이 떨어졌고,

소년은 손에 쥔 꼬깃꼬깃한 5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경매사 앞에 내놓았습니다. 
순간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이 자리에서 모두 일어나 소년을 향해 일제히 박수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훗날 이 자전거를 받게 된 동생은 형의 마음을 알았는지 비가 오나 눈이오나 매일 자전거를 탔다고 합니다. 
이 동생이 바로 사이클을 타고 알프스산맥과 피레네산맥을 넘으면서

프랑스 도로를 일주하는 "투르 드 프랑스"대회에서

최초로 7연패를 달성한 사이클 선수 "랜스 암스트롱"입니다.

랜스 암스트롱 (Lance Armstrong)은 미국의 전 프로 사이클 선수였습니다.

1992년 프로 사이클 선수 생활을 시작해 1993년 처음으로 세계 사이클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1996년 고환암 진단을 받았으나 고환암 수술 이후 처절한 재활을 거쳐

투르 드 프랑스 7연패를 달성하며 인간 승리의 대명사격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과 존경을 받았던 선수로, 한국에서는 ‘암본좌’라는 애칭으로 불러졌습니다. 

 

현대인의 삶이 도시화 정보화되면서 이웃과 정(), 의리(義理)는 상실되고 '내가 우선!'이라는 의식이 팽배해지고 있습니다.

정보화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사회계층간의 갈등과 소외현상을 접하면서 불안으로부터 나를 지키려는 심리가 쌓여가고 있습니다.

나만 생각하게 되고 이웃은 모르겠다는 편협하고 옹졸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외면하며, 돕지 않는 '방관자'가 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방관자 효과'에 함께하는 사람보다는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치, 자전거 경매장에서 5달러를 쥐고 있던 어린 소년에게 경매를 양보했던 사람들과 같은 착한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착한 이웃이 되어야 감동적인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만큼 이 세상은 행복으로 더 충만해질겁니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The Good Samaritan, 1890)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 누가복음 10장 25-37절(새번역) -  

 

▲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야코포 바사노 作(1592).

어느 유대인 상인이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되어 맨몸으로 길바닥에 널부러져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길을 가다 이를 보고는 피해가 버렸습니다.

뒤따라 레위인이 지나갔으나 역시 무시하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반면 유대인들이 멸시해 마지않던 사마리아인은 길바닥의 상인을 보자 응급처치를 하고 여관에 돈을 내며 유대인을 돌보아 줄 것을 부탁합니다.

심지어 비용이 더 들면 자신이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고 하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셋 중 누가 강도 만난 상인의 이웃이냐 묻자 율법학자는 자비를 베푼 이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고 답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이해하려면 우선적으로 사마리아인들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사마리아인은 아시리아에 의해 북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 후 유대인과 타민족의 혼혈로 생긴 종족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의 피를 더럽힌 존재라 멸시받고 박해받았으며, 그 반목은 매우 깊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사마리아인이라도 진정으로 '자비를 베푸는 자는 이웃'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즉 이웃이란 율법학자와 같은 유대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혈통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뜻을 행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어려운 이들을 돕고 사랑하는 자들이란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피해자를 외면한 대의명분은 율법주의적 합리화, 즉 제사를 집례할 책임을 맡은 자로서 시체를 접하지 말아야 할 정결 규례가 그럴 듯한 핑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인의 비유>를 그들이 율법의 정신을 바로 깨달았다면 제사보다 사랑을 실천하는 ‘선한 이웃’이 됐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어쩌면 더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을지 모릅니다.

저 강도만난 사람을 구하고 치료하는 데 필요한 재정적 부담을 내가 왜 감당해야 하는가?

아니, 아직 주변에 숨어있을지 모르는 강도가 나까지 공격하면 어떡하는가?

이미 죽었을지 모르는 사람을 섣불리 돕겠다고 나섰다가 봉변을 당하고 손해를 볼 필요가 있을까?

저 사람이 내 가족이나 지인도 아닌데 굳이 위험 부담과 손해를 자초하면서까지 도와주려는 건 불필요한 오지랖이 아닐까?

이런 우려와 두려움이 이들에게 <선한 이웃>이 되게하는데 어려움으로 다가왔을지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이웃이란 일차적으로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이면서,  ‘뜻을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 매일 만나는 이웃이라도 뜻을 함께 하지 않으면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이웃은 그 모든 이유를 뛰어넘어 그냥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간결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라.”

"그러면 누가 내 이웃입니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자비를 베푸는 그 사람이 네 이웃이다."

그렇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가족이고, 예수님의 형제입니다. 평안!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선생님과 말을 하겠다고 바깥에 서 있습니다."  
그 말을 전해 준 사람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누가 나의 어머니이며, 누가 나의 형제들이냐?" 
그리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고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나의 어머니와 나의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마태복음 12장 4650절 -

 


- 하늘가는 길, 강릉남대천에서. 산돌의집 장득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