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강해(24)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3)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마태복음 6장 11~13절 -
남미 우루과이에 있는 한 작은 성당 벽에는 다음과 같은 기도문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늘에 계신” 이라고 하지 말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 라고 하지 말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여” 라고 하지 말라/ 아들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지 말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나라가 임하시오며” 라고 하지 말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지 말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하지 말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하지 말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라고 하지 말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하지 말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말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이 기도문은 <주기도문(主祈禱文)>에 반한다고 해서 <반(反)주기도문>으로 불립니다.
‘반주기도문’은 이기적이고 자기 욕망대로 살아가면서 입으로만 주님을 부르는 그리스도인들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습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목적은 그 기도대로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저 입으로만 주님의 기도를 수없이 반복하고 삶으로는 전혀 기도의 내용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중언부언하는 이방인들의 기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모두 여섯 가지의 청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처음 세 가지는 하나님을 위한 기도로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청원입니다.
이것은 우리 기도의 시작이 나의 필요를 우선적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기도가 먼저임을 깨우쳐 줍니다.
나머지 세 가지 청원은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를 위한 기도의 첫 번째는 11절에 있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입니다.
여기에서 “양식”은 단순히 먹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 일용할 양식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의 ‘일용할’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피우시오스’(ἐπιούσιος)인데 ‘하루 분의 몫’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쉬운 말로 번역하면 날마다의 양식, 매일의 양식, 필요한 양식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말합니다.
또 ‘양식’이라는 말은 우리 육신이 생명을 위해서 먹어야 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이란 직접적으로 우리 육신이 이 세상을 살기 위해서 먹고 살아야 할 음식을 말합니다.
좀 더 확대를 하면 식료품과 식료품을 조리하기 위한 연료나 더 나아가면 입어야 하는 옷이나 잠을 자야 하는 공간, 매일 매일의 필요, 숨 쉬는 공기부터 물, 음식, 돈, 건강, 마음, 생각, 정신까지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은 굶주린 배만을 채우는 양식이 아닙니다.
우리의 결핍된 존재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입니다.
먹는 것·마시는 것·입는 것·거하는 것·농지·자연·가축·돈·좋은 배우자·자녀·좋은 통치자·좋은 정부·평화·건강·명예·좋은 친구·신뢰할 수 있는 이웃 모두 포함됩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 순간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고 계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는 우리 육신이 이 세상에서 생명을 유지하면서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 의식주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단지 '양식을 주시옵고'가 아니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의 '일용할'이라는 단어는 시간의 길이를 의미하지 않고 양(measure)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시험이 되지 않게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의 양만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양식으로 메뚜기와 만나를 내려 주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출16:4)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용한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날마다 공급해 줄 것이니 바로 그것을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manna)”를 주시며, 이것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잘 준행하는지? 아닌지? 알아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애굽에서 불러주셨는데 그들이 과연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는지? 알아보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더 많이 욕심으로 “만나”를 더 거두어 들였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그들의 욕심과 또 이웃을 생각하지 않는 이기심은 그 날의 양식보다 더한 다른 사람의 몫까지 가져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 어김없이 그 다음 날이 되면, 자신들이 욕심으로 더 모아들인 “만나”에서 벌레가 생기거나, 냄새를 나서 “만나”를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출16:20). 매일 매일 내려서 매일 매일 걷어 먹는 것이 만나입니다. 그야말로 일용할 양식만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한 개인의 하나님이 아닌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한 개인의 욕심으로부터 나오는 부당한 축적을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출애굽 만나 이야기를 두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즉, “삶에 필요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양식을 구하며, “그날 필요한” “날마다”의 양식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일용한 양식”을 위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주기도문”에서 가르쳐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구하는 간구의 기도 역시 우리의 욕심에 따른 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루 이상의 만나를 욕심으로 더 거두어 들여도 그것은 결국 자신들을 위한 양식이 될 수 없었던 것을 상기하며 매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감사함과 자족함으로 기도해야 할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하나님께 드리는 청원의 기도 속에는 “하나님! 나의 생명은 나의 노력이나 수고가 아닌 오직 은혜의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만 보존될 수 있습니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 이제부터는 이러한 고백대로 살겠습니다!”라는 신앙의 서원과 결단이 담겨있습니다.
2. 오늘 우리에게
시간과 관련된 단어로 '오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단지 일용할 양식으로가 아닌 '오늘'이라는 시간적 제한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위탁해 준 '오늘'이라는 한 시점에서 우리의 생을 위해 충분히 쌓아 두는 것으로 끝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매점매석하지 말라’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성은 ‘유무상통(有無相通)’입니다.
서로 사랑 가운데서 다른 사람의 결핍을 생각하며 분배하고 나누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 지상에서의 삶 자체가 매우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 드리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호였던 록펠러는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다가 부자로 죽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뉴욕시에 헌납해서 뉴욕시에 사는 시민은 누구나 그 시가 없어질 때까지 물 값을 내지 않도록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먹을 양식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이 말은 그렇게 굶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우리도 굶자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맛난 음식 먹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지만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으며, 내 아이만한 아이들이 먹을 것이 없어 매년 천만 명 이상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 인구 중 6명 중 1명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 FAO의 발표에 의하면 전 세계 10억 2천만 명이 기아에 놓여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인구수의 20배나 되는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10여 년 전쯤에 기아를 줄이자는 세계 정상회의까지 있었는데 실제로는 기아인구는 줄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매년 4백만 명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요? 이제는 먹고 살만하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만 해도 결식아동 수가 43만 명이 넘습니다.
교과부에서 발행한 <2011년 학교보건/급식 기본방향>에 의하면 학교급식에서 저소득층 지원목표는 91만 명이고, 보건복지부 발표에 따른 지자체를 통한 급식지원대상자는 48만 명입니다. 국민소득 2만 불, 경제 규모 세계 10위권의 G20 정상회의를 치른 품격 있는 나라에서 아직도 43만 명의 아이들이 제때 밥을 먹지 못하는 것이 우리나라 아이들의 현실입니다.
식량이 모자라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남아돕니다. 남아도는 식량으로 가축을 더 기르고, 바이오 석유를 만들고 때로는 폐기처분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매년 쌀 수확량이 남아서 고민입니다. 한쪽에서는 쌀이 남아돈다 하고, 날마다 남아서 버리는 음식쓰레기가 하루에 404억 원, 1년에 15조원입니다. 그런데 정작 43만 명 아이들은 굶고 있습니다.
식량은 모자라지 않습니다. 남아돕니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하루에 10만 명이, 5초에 1명의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습니까? 유엔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 장 지글러가 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에 보면, 권력을 갖고 있는 자들의 탐욕으로 인해 그리 되었다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이득을 위해 어려운 나라에게 보조를 하지 않고 창고에 식량을 썩힌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식량들이 소수의 권력자들과 다국적 기업 등에 의해 휘둘린다는 것입니다. 어쩌다 도움을 주더라도 가난한 나라의 부패한 권력자들이 중간에서 거의 가로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기아는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실에 마냥 분노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똑같이 그런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부족한 것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 음식점에서는 손만 조금 댄 반찬들이 쓰레기통으로 버려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음식을 낭비하며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어느 곳에서는 밥 한 끼, 빵 한 조각을 먹지 못해 죽어가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남아서 버리는 일 없도록 하십시오.
부모도 그렇게 하고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십시오.
밥은 생명이고 하늘입니다.
음식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음식 투정하고 밥을 버리는 것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라고 주신 하나님께 대한 죄입니다.
만나를 거둘 때에 남들보다 더 많이 거두어 결국은 먹지 못하고 버린 이스라엘백성들과 똑같은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먹으십시오!
남기지 말고 버리는 일을 최소화하십시오!
지금도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 죽어가는 이들이 있음을 식탁에서 기억하십시오!
더 나아가 나누어 주십시오!
쌓아두지 말고 나누어 주십시오!
가지고 있다가 버리는 것은 죄입니다.
있는 사람들이 없는 이들에게 나누어 주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습니다.
‘가난한 것들은 일을 안 해서 그래. 일할 생각을 안 해. 게을러서 그래. 먹을 것을 주면 더 일을 안해.’ 이런 말 하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오늘 먹을 빵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가난한 자들에게 너의 손을 펴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15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15:11)
인간의 생명은 쌓아 두고 저장하는 것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로 오는 은혜와 평강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위해 우리 자신이 수고해서 필요한 것을 취득하지만 성경적 관점에서 그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에서 한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
사랑하는 여러분!
‘양식’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 주위에는 오늘도 일용할 양식이 없어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다.
병이 들었지만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고 있는 이웃,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파하는 이웃,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영혼의 고갈 가운데 있는 이웃, 불의한 사회 구조 가운데서 불이익을 당하고 억울해서 울고 있는 이웃, 모두 양식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는 이 기원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성만찬을 고대하는 기원입니다.
장차 이루어질 그 성만찬에는 우리가 갈구하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결핍을 근본적으로 충족시켜 줄 참된 양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고대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산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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