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고린도전서 강해(15)-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내가 여러분을 낳았습니다

가족사랑 2025. 5. 20. 06:35

□고린도전서 4장 14~21절□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바울은 앞에서 서로 분열되어 자신들을 높이고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고,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 자신을 비롯한 사도들이 얼마나 현실 속에서 복음을 위해 고생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이미 자신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을 하고 있다고 자랑했고,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과 사도들은 왕이 아니라 걸레와 종이 되어 남을 섬기며, 원형 경기장에 놓인 검투사들처럼 죽음 앞에 놓여 사람들의 구경꺼리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1.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바울의 말을 듣고 마땅히 자신들의 오만함에 대해서 부끄러워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비판으로 인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지나친 수치심에 빠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그들을 비판한 것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14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들을 야단친 것은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들을 권면하는 것”과 같은 사랑의 권고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14절).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자신이 복음 안에서 새로 낳은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영적 부모이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자신이 낳은 영적 자녀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은 있지만 아버지는 많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5절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여기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15절)라고 말함으로써 자신과 고린도 성도들의 관계를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비유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고린도 성도들에게 영적 부모로서 사랑과 헌신을 쏟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낳고 그들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뒤에 온 다른 사역자들은 바울과는 달리 그들의 영적인 선생의 역할을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선생이 있을 수는 있지만, 영적인 부모는 오직 한 사람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제 자신은 복음으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낳은 영적인 부모이고, 그 후에 온 사람들은 자신이 낳은 성도들을 가르친 선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한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강조하는 동시에, 고린도 교회에 대한 자신의 깊은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마땅히 바울의 영적 자녀들로서 부모인 바울의 모범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6절).

이제 바울이 자신이 낳은 영적인 자녀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 있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한 것은 그가 완전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최선을 다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힘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린도전서 11장1절).

그는 말뿐 아니라 삶 전체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모습 속에는 은연중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들도 자신처럼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고난에 참여하는 모습을 본받기를 원했기 때문에 “나를 본받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집트의 한 무덤에서 원형이 거의 훼손되지 않은 미라 한 구가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흥분시킨 것은

3,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미라의 손에 쥐어져 있던 곡식 한 줌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연구를 하면서 과연 이 곡식이 살아 있는지에 대해 토론을 벌였습니다.

말라 버려서 생명의 씨가 죽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와

생명은 강하기 때문에 살아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 사이에 열띤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이것을 보던 농부가 간단한 해답을 주었습니다.

“뭘 그리 논쟁하나? 땅에 심어 보면 알 것을.”

농부의 말을 듣고 곡식을 땅에 심었더니

놀랍게도 70퍼센트의 씨앗에서 싹이 나왔습니다.

 

3,000년 동안 미라의 손에 쥐어 있었던 씨앗은 싹을 틔우지 못했습니다.

죽은 사람의 손에 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씨앗이 옥토에 뿌려지자 싹이 돋아났습니다.

이처럼 생명의 복음도 죽은 사람의 손에 들려 있으면 생명의 복음으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과연 생명 있는 사람의 손에 들려 있습니까?

아니면 미라와 같이 죽은 사람의 손에 들려 있습니까?

 

하나님을 날마다 만나는 우리들이 바울처럼 복음의 열정으로 뜨거운 사람들이 생명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지상 첫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의 뜻이고, 교회의 비전이며, 교회가 갖는 사명입니다.

 

2.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7절을 보십시오.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바울은 무엇 때문에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디모데를 보낸 것일까요?

그것은 바울사도가 각처 각 교회에서 어떻게 가르친 것인지를 다시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가게 되면 그들의 말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을 보겠다는 것입니다.

20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바울사도는 고린도 교회만이 아니라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도하였습니다.

혹시나 자기의 지혜나 자기의 능력으로 전도가 되어 사람의 지혜에 있게 될까봐서 얼마나 조심하였는지 고린도전서 2장(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고 바울사도가 얼마나 조심하였는지 볼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나타남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도한 바울이 과연 무엇을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까?

고린도전서 1장18절을 보십시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란 멸망하는 자들이 볼 때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를 전하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까?

세상에서 보란 듯이 세상의 힘과 세상의 영광을 입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모습, 바울사도와 같은 모습들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 그런 길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이란 자기를 자랑하거나 업적을 과시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십자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습니다.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빛이 났습니다.

이런 사람이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돌이 날아오다 멈추거나 되돌아가서 던진 사람들에게 맞는 것이 아니라 던지는 대로 맞았습니다.

눈이 터지고 머리가 터져가면서 죽어갔습니다.

그 순간에 스데반 집사 혼자 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 주님을 보면서 돌 던지는 자들을 향하여 저들을 용서하여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에서 보이신 예수님의 능력이 성령과 은혜가 충만한 스데반 집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 돌 던지는 현장에 바울이 주도적인 인물로 동참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스데반 집사와 같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향하여 욕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하는 이 능력이 무엇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우리는 흔히 방언, 예언, 신유, 이런 능력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미 고린도 교회에 그러한 능력들은 풍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알아보고자 한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이란 그런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은사들만이 아니라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능력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통하는 능력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들보다 잘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말 그대로 능력이 대접받는 곳입니다.

무능하면 도태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능력이란 것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환영하는 능력이란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무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은 이 세상에서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이 세상에서 끄집어내는 능력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을 보십시오!

비옥한 땅에서 부유한 생활들을 하였습니다.

먹고살만하니 더욱 쾌락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그 성은 유황불로 태워버려야 하는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은 무슨 능력입니까?

그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탈출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이 무엇이겠습니까?

온 세상이 불살라지기 위하여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참된 능력이란 이 세상에서 건짐 받는 것입니다.

이세상이 소돔과 고모라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천하를 얻고도 네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세상에서 떼어내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기에 어느 누구도 사람의 능력으로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아들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능력이 우리모두에게 나타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 하늘에서 불이 쏟아지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