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고린도전서 강해(12)-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가족사랑 2025. 4. 26. 07:45

□ 고린도전서 4장 1~5절 □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하나님의 비밀」

특사(特使)는 특별한 임무를 갖고 외국에 파견되는 외교 사절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대사나 공사 등은 외국에 상주하여 자국의 이익을 대표하는 외교관인 반면, 특사는 특정 현안에 한하여 해당국의 정부 혹은 정부수반을 대표하여 파견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직업 외교관보다는 거물급의 전현직 정치인, 혹은 저명한 민간인을 파견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 경우 해당국 정부수반의 친서를 휴대 및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슷한 의미를 가진 단어에는 밀사(密使)가 있습니다.

밀사는 몰래 보내는 사절만 의미하지만 특사는 공식적으로 사절을 보내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특사입니다.

그는 특사이면서, 또한 밀사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복음의 비밀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복음전파라는 특정 현안, 곧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이루기 위한 창조주의 대위임령을 부여 받았기에 하나님 나라의 수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합니다.

 

비밀은 헬라어로 뮈스테리온(μυστήριον)’이라고 합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실, 숨겨져 있어서 외부에서는 알 수 없는 사실을 뜻합니다.

비밀(秘密)이란 공개해서는 안되는 어떤 사실이나 또는 알려지지 아니한 어떤 사실입니다.

이 단어는 초대교회에서 신성한 의식이나성례전을 뜻하는 말로 쓰여졌습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관계된 엄밀한 지식이나 숨겨진 하나님의 경륜을 뜻하는 의미로 쓰여졌습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로새서 1장26∼27절)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구속 경륜, 그리스도의 재림, 하나님의 나라, 복음 등이 비밀에 속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태복음 13장1113절)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에베소서 6장19절)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0장7절)

 

복음이 비밀이요, 그것을 전파하고 증거하는 것이 비밀인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께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비밀을 공개하시지 아니하면 누구도 그 내용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에 대하여 잘 아는 것 같아도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원이란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임을 알지만 정확히 예수가 누군지,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천국을 왜 가야하는지 등등 설명해주어야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더구나 그 설명의 과정이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언뜻 보면 쉬운 것 같지만 알수록 어려운 것이 기독교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래서 사실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라 영적으로 이해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상식과 지식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나 기적들로 체험되어지기에 기독교는 신비입니다.

그래서 신비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바울사도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던 일,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병든 자가 말 한마디로 고쳐지는 일들이 다 이 같은 신비입니다.

이렇게 신비라고 여겨지는 것들의 본질적인 이유는 보이지 않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비밀이 갑자기 나타나 보일 때 우리는 신비롭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세군 창시자 윌리암 부스 대장이 마차를 타고 전도하러 가는데 갑자기 한 환상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검푸른 바다에 파도가 높이 솟아올랐다가 부서져 내렸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 바다에 빠져 살려달라고 큰 소리로 울부짖다가 물 속으로 들어가서는 나오지 못하곤 했습니다.

이때 큰 바위가 바다에서 솟아 올라와 넓은 자리가 마련되니까 물 속에 빠져 죽어가던 사람들이 바위에 올라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위에 올라 목숨을 구한 사람들이 바다에 빠져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을 못 본체 하면서 먹고, 마시며 춤추며 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넓은 바위는 십자가에 피흘려 우리를 구원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다에 빠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떨어져 멸망 당하는데 놀라운 구원의 비밀을 깨달은 자들이 그 잃어버린 영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지내며 세상이 주는 즐거움만 탐닉하는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담 이후에 인류의 가장 큰 문제는 죄와 사망의 문제입니다.

죄는 인간의 희망을 송두리채 앗아갔습니다.

죄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가장 불행한 동물로 전락시켰습니다.

마치 푸줏간에 끌려가는 소가 눈물을 글썽이듯 모든 인간은 멸망으로 나아가는 짐승과 같습니다.

 

- 윌리엄 부스 (William Booth, 1829-1912) -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위대한 계획, 그 감추어져 있던 비밀이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예수님으로 나타났습니다.

비밀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나사렛의 목수였던 예수님이 그 감추어졌던 비밀이라고 설득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바울사도 또한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사울이었을 때에는 그랬을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지식과 경험이 최고의 선이라고 믿었던 그에게 예수를 따르는 무리는 거짓과 허상을 숭배하는 신비주의자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하나님의 감추어졌던 비밀이 신비롭게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는 자신의 모든 생각들이 오히려 거짓이요 허상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눈으로 보여지는 하나님의 비밀이요, 그 놀라우신 계획과 계시의 실체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다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성도들에게 보여졌습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골로새서1장26절)

보이지 않던 비밀이 눈에 보이게 나타나고 또 성도의 마음속에 확실하게 들어오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늘의 비밀은 세상의 비밀과 다릅니다.

사람들은 비밀을 혼자 몰래 간직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비밀은 혼자 움켜 쥐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나 혼자 결코 독점해서는 안되는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아는 즉시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목이 터져라 외쳐야 하는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평생동안 전파해야 하는 비밀입니다.

인간의 비밀은 밝혀지면 밝혀질수록 죄와 수치가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밀은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소망이 넘치고 생명이 넘치고 구원이 넘칩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성경은 복음의 일꾼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비밀은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습니다.

믿을만한 사람을 특별히 선택해서 맡깁니다.

‘맡은 자’는 '집을 관리한다'는 뜻의 합성어로, 헬라어로 오이코노모스, oikonomos”라고 합니다.

'오이코스노모'는 "집"을 뜻하는 오이코스oikos”와 "경영, 관리"를 뜻하는 네모nemo” 합성된 명사입니다.

그러므로 오이코노모스oikonomos”는 집을 경영하고, 관리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고대 희랍-로마 세계에 있어서 오이코노모스는 노예들 중에 그 충성심과 능력을 인정받아 주인의 집과 재산을 관리하도록 책임 지워진 청지기였습니다.

'오이코노모스'는 대저택의 특별한 분야의 우두머리를 가리키기도 하고, 재산 관리인, 회계 책임자와 같이 특정분야의 책임을 맡은 자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전반적으로는 주인의 소유를 맡아 주관하는 종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집을 관리하는 한 '청지기, 오이코노모스'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 더 지혜로움이니라(누가복음16장1∼8절)

 

‘맡은 자’, "오이코노모스(οiκονόμος)는  집을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청지기(Steward) 위에는 주인이 있고, 밑에는 노예가 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모든 것을 맡아 관리합니다.

청지기는 큰 집의 가사를 책임지고 돌보는 일을 맡은 자로서 주인의 식탁에서 시중을 들고 집안의 여러 종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주인을 대신하여 가사의 비용과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이 어떤 사람에게 청지기직을 맡기겠습니까?

자기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청지기의 긍지가 있습니다.

주인으로부터 가장 신뢰를 받고 있고, 그래서 주인의 가장 비밀스런 부분까지도 다 맡았다는 긍지, 이것이 청지기의 자긍심입니다.

청지기는 주인 앞에서는 매인 자이지만, 노예 앞에서는 자유를 가진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의 자유는 주인의 권한 안에 있는 자유입니다.

일을 하지만 자기 것은 없습니다.

이처럼 자기 자유가 주인을 위해 제한 받고, 자기의 노력이 자기 것이 아닌 주인 것이 모두 된다 해도, 내가 그 주인에게 인정받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 이것이 청지기의 긍지입니다.

 

청지기의 존재 가치는 주인의 영광에 의해서 결정되어 집니다.

주인의 영광이 클수록 청지기의 영광도 큰 것입니다.

대통령의 비서와 한 기업체 사장의 비서가 다르지 않습니까?

바울은 하늘과 땅의 주권자인 하나님의 청지기가 된 것에 대해 엄청난 긍지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비굴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한계를 철저히 깨닫는 인생의 깊은 경험에서 나온 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영광스런 청지기 자리에 세워주시고,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후회가 많은 삶을 사는지 모릅니다.

1주일, 1년, 아니 우리의 지난 날을 돌아보면 허물투성이의 삶 그 자체입니다.

매일 한계와 부족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존재인 나를 선택해 주셨습니다.

더구나 그런 존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 주셨습니다.

생각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한계와 부족, 그리고 한없는 은혜 앞에 서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구속해 주시고, 직분을 맡겨주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 앞에 선 자신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직분에 대한 넘치는 은혜의 고백 앞에 서있어야 하겠습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