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과 칼럼

하나님의 구원계획 다섯단계

가족사랑 2021. 1. 31. 18:12

하나님의 구원계획 다섯단계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갑자기 충동적으로 준비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창세전부터 준비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 계획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다섯 단계(미리 아심, 미리 정하심, 부르심, 의롭다 하심, 영화롭게 하심)로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예지(豫智)-미리 아심

 

바울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셨다고 말합니다.

구원의 첫 단계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사람을 "미리 아셨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태어나기도 전에 아셨다는 것입니다.

미리 안다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기노스코(προγινώσκω)라고 하는데 앞일을 내다보다 또는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아는 것을 말합니다.

 

미리 아셨다고 하는 것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조건으로 나의 선이나 공로가 될만한 무엇을 미리 알고 계셨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주석가들은 히브리어 동사 야다(ידע)는 단순히 지적으로 아는 것뿐 아니라, 전 인격적으로 깊은 애정을 갖고 아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70인역 헬라어 성경에 기록된 기노스코(γινσκω) 안다, 알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야다(ידע)를 번역한 것입니다.

야다(ידע)는 문자적 의미에서의 알다라는 뜻보다는 직접 보아서 확인하다라는 의미에서 체험적으로 알다라 뜻이 좀 더 적합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야다와 헬라어 기노스코 동침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ידע)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4:1)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γινσκω)하지 아니하더니’(1:25)

하나님은 우리를 이와 같이 친밀하게 알고(γινσκω)계십니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2:24).

 

또 실제적인 지식으로써 사람의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γινσκω) 계십니다(2:25).

시편(1:6, 144:3)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알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알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돌보신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호세아(13:5)에서도 "알았다"는 말이 "사랑하셨다"는 뜻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구약에서 알다라는 야다(ידע)는 단순히 지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됩니다.

 

이러한 예는 비단 구약 뿐 아니라 신약에도 역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로마서 11(2)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이곳에서 미리 알았다는 말(프로기노스코, προγινώσκω) 사랑하여 선택했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구원은 아무 조건 없이 무상으로 받습니다.만일 나에게 있는 선이나 공로로 구원을 얻었다면 그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나의 공로가 될 수밖에 없으며, 예수님은 절대로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에 벌써 우리 개개인을 미리 아셨다는 사실, 우리를 사랑하여 선택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1:5). 

 

2. 예정(豫定)-선택(選擇)

 

구원의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예정(豫定)”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사랑하신 자) 미리 정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리 정하셨다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오리조(προορίζω)인데 이것은 사전에 미리 결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 사도행전 4장 28절 - 

 

바울은 여기에서 구원 받은 성도들이 창세 전에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정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상은 성경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선택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 창세기12장 13절 -

 

이삭을 선택하시고 이스마엘을 버리시며, 야곱을 선택하시고 에서를 버리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신약도 이러한 사상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는 제자들이 주님을 선택하지 않고, 주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도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미리 선택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 에베소서 1장 45절 -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에베소서 1장 9절 -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 에베소 3장 11절 -

 

이러한 진리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 일은 성령의 특별한 은총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내 영혼 거듭났네
주 내 맘에 늘 계시고 나 주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 찬송가 90장 -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미리 아시고 우리를 미리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선택하셔서 너는 내 자녀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는 세상에서 아무도 알 수 없는 은혜의 선택이며 하나님의 값없는 자비입니다.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예정하셨습니다.

 예지(叡智)와 예정(豫定)의 두 가지 사건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의 사건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예정이 두 가지 목적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예정하신 것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29)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자기 자녀로 예정하신 것은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자녀들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믿고 자신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 즉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그들 안에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함께 기도하며 도와주십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예정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맏아들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29).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한 형제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하려고 계획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알게 될 때에,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습니다.  

 

 

3. 소명(召命)-부르심

 

구원의 세 번째 단계는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을 간략히 주린 말로 표현한다면 소명(召命)이라고 합니다.

어부 시몬을 부르셔서 사도 베드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세관원 마태를 부셔서 제자 마태가 되게 하셨습니다.

바리새인 사울을 부르셔서 선교사 바울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신약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43장에 보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은 아무에게나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구태여 부르심이란 단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소유물로 내정되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소유물을 지명하여 부르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신 사람들을 자기 백성으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30절)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들 또한 부르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려고 해서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르심은 일반적인 복음 전파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러한 부르심은 불신자나 신자를 구별하지 않고 모두에게 해당되기 때문에 ‘일반적인 부르심’(외적인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부르심은 그것을 받는 사람들에 의해 수용될 수도 있고, 또 거절될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 부르심은 택한 백성들 속에서 부르시는 성령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은 복음이 전파될 때에 선택한 성도들의 심령 속에 성령의 감동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부르심이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임하기 때문에 ‘특별한 부르심’ 또는 ‘내적인 부르심’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은 외적인 부르심을 받지만, 내적인 부르심은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외적인 부르심과 내적인 부르심을 동시에 받습니다.

제자들, 사사들 같은 분들은 특별한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선택에 의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복음을 위임받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일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사명(使命)을 가지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은 사명(使命)과 관계가 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 사명이 남아 있다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이제 사명을 마쳤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호렙산 떨기나무에서 소명을 받고, 요단강 동편에서 사명을 마치고 느보산에서 죽었습니다.
 신명기 34장에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34:7)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그의 나이 120세, 눈은 흐리지 않고 기력도 쇠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늙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사명을 마쳤기에 하나님께 간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씀하신것처럼 말입니다.

 

신약 27권 중 바울은 13권을 썼습니다. 바울은 서신서의 첫 구절은 대부분 '소명'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롬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고전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골1:1)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열방을 위한 선교사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소명은 '부르심'이고, 사명은 '보내심'입니다.

소명(召命)이란 '부를 소'에 '목숨 명'을 써서 소명입니다.

'부름 받은 목숨'이란 뜻입니다.

영어로는 ‘Calling’이라고 합니다.

사명(使命)이란 '심부름 사'에 '목숨 명'을 써서 사명입니다.

즉  사명이란 '심부름하는 목숨'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Mission’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소명과 사명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소명은 부름이고, 사명은 소명 받은 자의 과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명 없이 사명 없고, 사명감이 없는 자는 당연히 소명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갖는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나 전도사 같이 이른바 주의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주셨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이 역사 속에서 오직 구원 받은 그 사람을 통해서만이 이루어 나가야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에 응답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본분이며 특권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에베소서 1장 17∼19절 -  

 

 

4.칭의(稱義)-의롭다 하심

 

구원의 네 번째 단계는 복음을 믿은 성도들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일”입니다.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30절)

성경에서 의롭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완전한 자격을 말합니다.

전혀 마귀의 참소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완벽한 의인을 말합니다.

그리고 죄를 범한 일이 한번도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처럼 허물과 실수가 많은 사람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또 그는 기근이 왔을 때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애굽으로 피난 갔습니다. 애굽에 간 후에도 거짓말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바로 왕에게 빼앗겼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육신을 따라 행한 그의 행실은 그의 행위로서는 절대로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그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었다면 자랑할 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아브라함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함을 받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이 말씀은 로마서 4장 3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행위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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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복음에 응답한 성도들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정죄할 수 없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본문에서 성도들이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말은 ‘죄의 용서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의롭다 하심”은 헬라어로 디카이오오(δικαιόω)라고 하는데, 이 말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혀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죽음 뿐 아니라 부활에도 함께 참여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죄의 용서를 받았을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의 영광과 의에도 역시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의롭게 만드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가 씻겨지고,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궁극적으로 의로운 것을 행하기로 하는 하나님의 헌신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의 명예와 하나님의 영광의 가치를 유지하기로 하는 하나님의 헌신입니다.

의로움은 죄의 반대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하나님을 멸시하지만, 의는 하나님을 위하여 선택함으로써 하나님의 가치를 드높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주셨고, 그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은 의로우심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에 대해 부여하시는 가치의 선포이며,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갖고 계신 미움에 대한 선포이며, 죄인에 대하여 하나님이 갖고 계신 사랑에 대한 선포입니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의롭다하심’에 대해서 “하나님은 효과적으로 부르시는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데, 그들에게 의를 주입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의 인격을 의롭다고 간주하시고 인정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 안에 있는 어떠한 노력의 결과나 그들이 행한 일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다. 또한 믿음 자체, 즉 믿음의 행위나 다른 어떠한 복음적인 순종을 그들에게 의로 전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배상을 그들에게 전가하시는 것인데, 그들은 믿음에 의해 그분과 그분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할 수 있다. 이 믿음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소명(召命)과 칭의(稱義), 즉 ‘부르심과 의롭다 하심’ 두 가지 사건은 오직 이 땅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의 삶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의롭게 되는 기회는 오직 이 땅에서만 주어집니다.

 

누가복음 16장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삶이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 것이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 누가복음16장25-30절-  

 

5. 영화(榮化)-영화롭게 하심

 

구원의 마지막 단계는 의롭게 된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불러 의인으로 인정해 주셨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의롭게 된 우리는 영화의 길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영화롭다는 말은 헬라어의 독사조(δοξάζω)라고 합니다.

영광스럽게 하다, 또는 영광으로 생각하다, 폭넓은 적용으로 ‘영광(榮光)을 돌리다’는 뜻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시던 날 밤, 베들레헴 시골 들판에서 양떼를 치던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목자들에게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었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일로 목자들은 공포에 질려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이때 주의 사자가 목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2:10)

 

이렇게 말하고 있던 중 홀연히 하늘에 수많은 하늘군사들이 나타나 천사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한밤중에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이 베들레헴 들판에서 "하나님께 영광!" 찬송가를 부른 것입니다.

 

천사들이 하늘로 올라간 후 목자들은 급히 베들레헴에 갔습니다.

그 목자들도 가서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 경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2:20)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6)고 말씀하셨을 때도 바로 이 단어, "영광!"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순한 죄 용서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궁긍적인 목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자녀로 만드셨습니다.

자기 백성을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삼아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성도들이 이 일을 완성할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어 성도들을 인도하고 보호해 주십니다.

의롭다 여겨지고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에게는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날마다 우리가 주님 닮은 거룩한 자가 되도록 이끌어주십니다.

그러다가 예수님 만나는 날, 우리의 낮은 몸을 영화의 몸으로 변화시키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국의 빛과 영광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장차 부름 받은 자녀들을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할 것입니다.

그들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 날을 소망하면서 즐거워하고,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도 참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의 첫째 단계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사람을 "미리 아셨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구원의 둘째 단계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사랑하신 백성을 성도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구원의 셋째 단계는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자기의 종을 보내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구원의 넷째 단계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받아들인 백성들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구원의 다섯째 단계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장차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 다섯 단계는 하나 하나가 깨뜨릴 수 없는 고리와 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주석가는 이를 "구원에 이르는 다섯 개의 황금 사슬"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구원의 다섯 고리는 어느 누구도 끊을 수 없는 견고한 사슬입니다.

우리의 완전한 구원은 미래에 성취될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주님 오실 때까지 흔들리지 말고 살아 내십시오. Μαραναθα(Our Lord come).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 고린도전서 15장 58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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