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고린도전서 강해(49) - 사랑은 온유합니다

가족사랑 2026. 3. 28. 17:27

고린도전서13장4~7절□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날씨가 따뜻한 어느 봄날 태양과 바람이 만났습니다.

태양과 바람은 사이좋게 지내다가 갑자기 그 둘은 서로 자기가 더

힘이 세다고 자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태양은 '바람보다 내가 더 세다!'

바람도 '태양보다 내가 더 세다!'

서로 말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람은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야, 태양아! 내가 폭풍처럼 센 바람을 불면 너보다 더 셀거야!"

 

그 말을 들은 태양은

"그럼 좋아, 실제로 힘을 겨루어 보자!'

고 바람에게 제의를 했습니다.

그때 마침,

젊은 나그네가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태양은 바람에게

'저기 걸어가는 젊은 나그네의 외투를 먼저 벗기면 이기는 걸로 하자!'

고 했습니다.

바람도 자신 있다며 찬성을 했습니다.

먼저 바람이 걸어가는 젊은 나그네의 옷을 벗기기 위하여

아주 강하게 바람을 불었습니다.

나그네는 갑자기 센 바람이 쌩하며 지나가자

외투를 힘껏 움켜쥐고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갔습니다.

바람은 또 다시 더욱 센 바람으로 젊은 나그네를 향하여

'휘-익'하며  쏜살같이 돌진했습니다.

바람은 나그네 옷이 '벗겨져라, 벗겨져라!'하며

계속 나그네를 향하여 강풍을 불어댔습니다.

강풍이 불어댈수록 나그네는 옷이 날아갈까 봐

더욱 힘차게 옷을 잡고 외투의 단추까지 모두 꼭꼭 채웠습니다.

바람은 계속하여 강하게 불었지만 단추까지 잠긴 외투는 결코 벗겨지지 않았습니다.

비람은 그만 지쳐서 더이상 힘을 내어 바람을 불 수가 없었습니다.

 

"자, 이번엔 내 차례로군!"하며 태양이 말했습니다.

태양은 여유가 있게 젊은 나그네를 향해

따뜻한 햇볕을 서서히 비추기 시작하였습니다.

나그네는 강한 바람이 지나가고 따뜻한 햇살이 비추니

마음의 안정을 찾으면서 '이제야 조금 살 것 같군!'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가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꼭꼭 잠기었던 외투의 단추 하나 둘씩 풀면서 여유있게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태양은 더욱 뜨거운 열기로 나그네를 향해

아주 강하게 햇볕을 내리 쬐기 시작하였습니다.

젊은 나그네는 태양과 바람이 힘겨루기를 하는 줄도 모르고

'오늘 날씨가 왜 이렇게 변덕스럽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길을 걸어갔습니다.

한참을 걸었을까 날씨가 점점 뜨거워지자

나그네는 너무 더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온 몸은 찌는듯이 달아오르고 있었습니다.

나그네는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들고 걸어갔습니다.

태양은 사정 없이 더욱 강하게 열기를 뿜어냈습니다.

나그네는 온 몸에 비오듯이 땀이 많이 흐르고 목도 말라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나그네는 지친 몸으로 물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 이곳 저곳을 한참 동안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 나그네의 귓가에 졸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나그네는 드디어 맑고 깨끗한 시냇물을 찾았습니다.

손에 들고 있던 외투를 잠시 바닥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웃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 풍덩 뛰어들었습니다.

나그네는 차가운 시냇물로 세수을 하면서 더위를 식혔습니다.

태양이 드디어 승리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본 바람은 자기가 진 것을 알고 아무 말도 못하고

디론가 바람처럼 사라졌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는 것은 강함이 아니라 부드러움입니다.

부드럽다는 것은 현실과 타협하거나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껴안을 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부드럽다는 것은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을 만큼 현명하다는 것입니다.

강한 사람이란 많은 사람들의 힘을 이끌어내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드러움은 곧 강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밀림을 지배하는 힘은 강한 야성에서 나오지만 문명을 이끄는 힘은 부드럽게 포용할 수 있는 모성에서 나옵니다.

하나님께 쓰임받은 지도자들은 대부분 부드러움의 소유자였습니다.

60만명의 히브리인들을 애굽에서 가나안땅으로 이끌었던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부드러움의 소유자였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수기 12장3절)

최고의 카리스마는 온유함에서 비롯됩니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상 뭇사람들이 사랑에 대한 수많은 시를 지었고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 아닌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아가페(ἀγάπη, agape) 사랑입니다.

 

 

「사랑은 ‘온유’합니다 - 크레스튜오마이」

- χρηστεύεται ἡ ἀγάπη -

 

'온유하며'는 헬라어로 크레스튜오마이(χρηστεὐγμαι)라고 읽습니다.

“선한, 온화한, 자애로운, 유순한” 뜻으로 은혜를 모르는데도 계속해서 선을 베푸는”의 의미입니다.

“사랑은 온유하며”라고 할 때, 이 단어는 “온유”라는 명사에서 파생되어 나온 “동사”입니다.

헬라어 신약성경을 통틀어서 “온유하다”는 동사 “크레스튜오마이(χρηστεύομαι)”는 오직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서만 단 한 번 사용된 독특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동사적 의미를 강조해서 번역하면, “다른 이들에게 선한 마음을 품고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온유하게 행동하며, 친절을 베풀며, 선대한다” 입니다.

'온유하게 행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선의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이 온유하게 행하는 것으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사랑이 '온유하다'는 것은 나에게 해를 끼치는 자가 은혜를 모르는데도 계속해서 친절과 선을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약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온유는 힘이 없어서 침묵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받았기 때문에 움츠러드는 것도 아닙니다.

온유는 자기 안에 있는 힘을 하나님의 손에 맡긴 사람의 얼굴입니다.

온유는 칼을 품고도 칼을 휘두르지 않는 겸손입니다.

온유는 분노할 수 있어도 분노를 다스리는 거룩한 통제입니다.

온유는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권리를 양보합니다.

더 높은 세계와 더 깊은 자비를 바라보며 자신을 주께 맡기는 신앙인의 품격입니다.

그러므로 온유는 성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닮음입니다.

누가 내 안의 왕좌에 앉아 있습니까?

누가 내 감정의 주인이십니까?

누가 내 억울함의 재판장이십니까?

이 질문 앞에서 온유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온유한 사람은 세상 앞에서 작아진 사람이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충분히 엎드린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신의 분노를 더디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감정 컨트롤(self-control)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스스로의 내면을 통제하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 분은 세상이 기다리던 방식의 왕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쇠 갑옷의 번쩍임으로 오시지 않았습ㅂ니다.

그 분은 말발굽의 천둥으로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말구유에 누이신 왕이셨습니다.

그 분은 아기의 울음으로 세상에 들어오신 창조주이셨습니다.

그 분은 섬김으로 통치하시는 메시아이셨습니다.

그 분은 겸손하여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그것은 위엄이 없어서가 아니라, 위엄을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온유는 권세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권세를 거룩하게 절제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실 수 있었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조롱하는 자들 앞에서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부르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져야할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침묵은 무능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침묵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온유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온유함은 연약함이 아니라 사랑의 강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향해서는 추호의 타협도 없이 거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에게는 한없이 자비로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눈부신 거룩은 온유의 절정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눈부신 거룩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빛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온유를 가르치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온유 그 자체로 이 땅을 걸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은, 당신의 성품을 인간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기대하는 방식의 과시로 자신을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온유와 겸손으로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나타난 온유는 단지 미덕이 아니라 복음의 얼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온유의 가장 찬란한 승리입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패배로 보았지만, 하늘은 그것을 승리로 선언했습니다.

세상은 침묵을 약함이라 조롱했지만, 하나님은 그 침묵을 통해 죄와 사망의 머리를 깨뜨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온유는 세상 논리 안에서는 손해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온유는 하나님의 구속 경륜 안에서는 가장 깊은 승리의 길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장5절)

세상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밀어내고, 빼앗고, 전쟁을 통해 상대방을 초토화시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빼앗는 자가 아니라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은 부동산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입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시편 37편11절)

이 약속은 여호와를 바라는 자가 마침내 땅을 차지한다는 믿음의 노래입니다.

땅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안식의 자리입니다.

땅은 언약 성취의 상징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을 가리키는 종말론적 유업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여기에서 당장 많이 차지하는 자가 복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의 날에, 참으로 남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주먹으로 움켜쥔 것은 결국 썩어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기업은 영원합니다.

세상의 승자는 흙 한 줌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온유하게 사는 자는 마침내 새 창조 전체를 유업으로 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이요, 하늘의 복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사람의 눈에는 초라해 보여도 하나님의 눈에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세상에서는 밀려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상속자입니다.

 

온유는 하나님 앞에서 나타납니다.

자기 죄를 아는 사람만이 온유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압니다.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얻습니다.

그 다음, 비로소 온유한 자의 자리에 이릅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 순서가 아닙니다.

자기 영혼이 얼마나 빈곤한지를 모르는 사람은 언제나 타인 앞에서 거칠어집니다.

자기 죄를 슬퍼해 보지 않은 사람은 남의 허물에 대하여 잔인해지기 쉽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먼저 무너뜨리고, 그리고 다시 세웁니다.

십자가 앞에 선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큰 용서를 받은 자인지 압니다.

자기 빚이 얼마나 엄청났는지를 아는 사람은, 다른 이의 작은 빚을 목 졸라 독촉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온유는 인간이 타고나는 품성이 아니라, 은혜를 깊이 통과한 영혼의 열매입니다.

자기 의가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은 쉽게 흥분합니다.

쉽게 판단합니다.

쉽게 상처를 되갚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 오래 선 사람은 눈빛이 달라집니다.

말의 끝이 달라집니다.

분노의 속도가 달라집니다.

타인을 대하는 손길이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온유하심의 덕으로 여기까지 살아왔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온유는 사람 앞에서도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는 겸손한 척하지만, 가까운 사람에게는 가장 잔인합니다.

교회에서는 부드러운데 가정에서는 날카롭습니다.

예배당에서는 경건한데 일상에서는 무례합니다.

그러나 참된 온유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증명됩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사람 앞에서 온유는 시험을 받습니다.

나를 오해하는 사람 앞에서 온유는 시험을 받습니다.

내가 설명해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 앞에서 비로소 온유는 시험을 받습니다.

온유는 모든 갈등을 회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을 말하되 칼날 없이 말하는 것이 온유입니다.  '

바른 길을 권하되 상대를 부수지 않는 것이 온유입니다. 

징계가 필요할 때에도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온유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정결케 하실 때 분노를 가지셨습니다

하지만 그 분노는 자기 기분의 폭발이 아니라 거룩한 분노이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거룩한 분노는 아버지의 집에 대한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온유는 무기력함이 아니라 성화된 힘입니다.

온유는 자기 감정의 노예가 되지 않는 자유입니다.

온유는 진리를 붙들되 사랑을 잃지 않는 성숙입니다.

 

 

이 시대는 유난히 온유를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말이 칼이 되어 날아다닙니다.

판단이 번개처럼 떨어집니다.

사람들은 이해받기보다는 이기기를 원합니다.

공적 공간에서도 자신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사적 공간에서도 자신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모두가 날카롭고, 단호합니다.

침묵은 패배처럼 여겨집니다.

양보는 바보처럼 보입니다.

부드러움은 뒤처지는 자의 표식처럼 취급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시대의 공기를 무비판적으로 들이마시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왕을 섬깁니다.

다른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품어야 할 향기는 세상의 독한 냄새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고린도후서2장15절)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게 합니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마음과 의도를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게 합니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을 돕고자 하게 합니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고자 합니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의 영혼에 진정한 유익을 끼치게 합니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의 영혼이 잘되기를 진정으로 바라게 합니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친절하게, 인자하게, 따뜻하고, 너그럽게 행동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고, 사랑의 열매인 온유입니다.

우리 안에 참된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행동하게 만들 것입니다.

사랑은 악의를 가지고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해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친절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매정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가혹하게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면 잘 해줄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도와주고자 할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친절을 베풀고자 할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호의적이고, 따뜻하고, 부드럽고, 너그러울 것입니다.

그것이 온유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사람들에게 한없이 부드러워지고, 한없이 너그러워지고, 한없이 친절해집니다.

온유한 사람은 사람들을 더 없이 부드럽게 만들고, 친절하게 만듭니다.

온유한 사람은 상대방을 돕고, 유익하게 하고자 하고, 상대방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사랑이 우리 안에서 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기기 위해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으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에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 마태복음 11장29∼30절 -

 

이 세상이 교회를 보고 놀라야 할 것은 우리의 숫자나 힘이 아니라, 주님을 닮은 성품의 거룩한 빛입니다.

우리가 온유를 잃어버리면 진리를 말해도 아름답지 못하고, 열심이 있어도 상처만 남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유를 입으면, 책망도 살리고, 권면도 살리고, 눈물도 살리고, 진리도 빛납니다.

온유는 상처받은 순간에 빛을 발합니다.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도 빛을 발합니다.

내 선의를 오해할 때도 빛을 발합니다.

내가 기도하며 쌓아 올린 수고를 가볍게 여길 때도 빛을 발합니다.

내 안의 옛사람은 즉시 일어나 자기를 변호하고 싶어합니다.

억울함은 마치 불씨처럼 가슴 깊은 곳에서 타오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성령께서 우리 안에 다른 길, 온유를 여십니다.

예수님이 오해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버림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침묵 속에서 눈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온유의 그릇입니다.

 

우리의 억울함은 예수님 앞에서 낯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온유는 억울함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억울함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상태입니다.

“주께서 아십니다. 주께서 판단하십니다. 주께서 나를 붙드십니다.”

이 고백이 심장 속에서 자라날 때, 사람은 눈물 가운데서도 거칠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온유의 신비입니다.

온유는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내적 질서입니다.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이 아시는 평강, 바로 그것이 온유의 신비입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