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13장1~3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바울은 12장 마지막 부분에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보여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은사 중에서 더욱 큰 은사, 즉 가장 큰 은사와 가장 좋은 길, 교회를 섬기는 가장 좋은 방법을 말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13장에서 사랑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방언과 같은 은사에 열광하며, 예배 때에 이러한 은사를 과시하면서 혼란과 위화감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서로를 향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는 영적 질병에 걸려 있는 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은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12장과 14장 사이에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는 13장을 삽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랑을 예찬하는 13장을 통해서 모든 은사는 사랑의 정신으로 이웃을 섬기고, 교회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예찬하는 13장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1∼3절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은사가 헛된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둘째는 4∼7절입니다.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셋째는 8∼13절입니다.
사랑의 영원성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 - 아가페」
13장에서 바울이 “사랑”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는 말은 “아가페”입니다.
아가페(그리스어: αγάπη, 영: agape)는 헬라 문서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 사용되기 전에는 별로 특색이 없는 단어였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구약에서 아주 중요한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대해 주시는 신실하신 사랑을 가르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그런즉 너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신명기 7장:6∼11절)
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이웃에게 나타내야 할 신실한 사랑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장5절)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위기 19장18절)
헬라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랑이란 단어는 “에로스(Έρως, Eros)”였습니다.
이 말은 어떤 특별한 가치가 있는 곳에 끌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가치를 가진 대상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행위가 바로 에로스였습니다.
이 말은 지식을 사랑하는 것,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하는 것, 권력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주장적인 사랑의 행위를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에로스는 서로 육체적으로 끌린 사람들 사이에 나누는 성적인 사랑이나 흥분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시대에는 이 단어가 문화적으로 품위가 떨어지는 것으로 여겨져, 신약성경 전체에서 단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사랑이나,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이웃에게 행하는 사랑을 표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을 예찬할 때에 당시에 별 특색도 없었던 “아가페”라는 단어를 선택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은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서 “아가페(αγάπη)”를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신약 성경에서 아가페는 신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그분의 사랑으로 부터 흘러나옵니다.
아가페는 또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묘사합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누가복음 10장27절).
아가페는 주인에 대한 종의 신실한 섬김을 말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6장24절)
아가페적 사랑은 항상 행위로 보여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에베소서 2장4-5절)
우리는 그런 희생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로마서 5장8절).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은 우리가 자격이 없어도 베푸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며, 끝없이 사랑하는 자들의 유익을 위하십니다.
아가페는 우리의 육신적인 힘으로 행하는 사랑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과 성령의 열매로만 맺을 수 있는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갈라디아서 5장22절)
이러한 점에서 아가페는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없는 은사는 무익합니다」
1절은 사랑이 빠진 방언의 무익함에 대해서 말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1절)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은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써 하나님을 향하여 말하는 신비한 언어입니다.
이는 성령님이 주시는 귀한 은사입니다.
그런데 그 귀한 은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시끄러운 소리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칩니다.
고린도교회의 열광주의자들은 방언을 천사의 언어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령을 통해서 방언을 받은 것을 천사처럼 되어서 하늘 예배에 참여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고린도전서 4장8절)
그러므로 그들은 방언을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또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예배 때에 그들은 이 은사를 서로 앞 다투어 사용함으로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는 헬라의 종교 의식에서 광란의 의식을 행할 때에 사용되던 도구였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도구들을 마구 쳐대면서 광란의 종교 예식을 거행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이 도구들을 언급하는 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도구들을 언급함으로서 사랑이 없는 무질서한 은사 사용은 마치 이방 종교에서 행하는 광란의 종교 예식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받은 거룩한 성령의 은사도 사랑이 없으면 우상을 숭배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맙니다.

2절은 사랑이 빠진 예언과 믿음의 은사 사용의 무익함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예언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아 깨달은 비밀과 신비로운 지식을 말합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닙니다.’를 영어로 하면 I am nothing입니다.
제 아무리 크고 놀라운 일을 깨닫고, 제 아무리 크고 놀라운 일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맙니다.
위대한 깨달음과 큰 업적은 있는데, 자기 자신은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기에 언급된 ‘산을 옮길만한 믿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을 옮기는 믿음”을 기억나게 하는 말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마가복음 11장23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태복음 17장20절)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알고 예언을 하며, 산을 옮길만한 큰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지식을 가르치는 목회자와 신학자들에게 큰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교회 생활과 전도는 열심히 하면서 사랑이 결핍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도 큰 경종을 울리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전도와 성경 교육조차도 사랑이 빠지면 무익한 사역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3절은 사랑이 없는 구제와 사랑이 없는 자기 희생은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는 것은 자기 소유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 줄지라도”는 자기 몸(생명)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교를 의미할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을 노예로 넘겨주는 행위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것을 철저하게 포기하는 생활, 즉 철저한 금욕생활을 말합니다.
당시에 내세에서 많은 보상을 받을 것을 기대하고 이러한 금욕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랑 없이 그런 생활을 하면 그것이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을 끼치지 못합니다.
사랑 없는 금욕생활은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사랑이 결핍된 구제와 자기희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구제와 자기희생은 고귀한 사역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역들조차도 진실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는 사역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고대의 헬라-로마 사회에서는 부자들이 돈을 많이 내서 한턱을 내는 일이 흔했습니다.
지금도 발견되는 비문을 보면, 도시를 위해서 크게 헌금하고 행사한 자에 대한 칭송하는 비문이 많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이 이렇게 한 것은 자기의 명예와 권세를 얻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크리스마스나 연말연시, 또는 선거철만 되면 생색을 내기 위한 구제와 헌신이 자주 일어납니다.
또한 고대에는 자기의 신념을 보이고, 영웅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일”도 있었습니다.
또 성경에서도 믿음의 용사들이 이렇게 했던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얼굴빛을 바꾸고 명령하여 이르되 그 풀무불을 뜨겁게 하기를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에게 명령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지라 하니라"(다니엘3장19-20절)
오늘날에도 무슬림들은 알라를 위해서 자기 몸을 헌신해서 자살 폭탄조로 지원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운동권 사람들이 자기의 신념을 전달하기 위해서 몸에 기름을 붓고 분신자살하는 일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영웅적인 자기희생도 사랑이 결여되면 무가치한 일이 되어 버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랍니다.
독실하기로 알려진 신자 한 분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얼마 전 고혈압으로 남편을 잃고 애들 셋을 데리고 슬픔의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는 부인이었습니다.
목사님도 한두 번 그 집을 찾아간 일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혼자서 돌보던 식료품 상점을 부인 혼자서 해 나가기란 너무나 힘겨웠습니다.
애들도 하나 둘 학교를 그만 두고 어머니 일을 도왔습니다.
그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루하루 살림은 어려워만 갔습니다.
"목사님,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울먹이는 부인을 목사님은 위로의 말과 기도를 해 주는 이외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세상은 허무하다는 것, 믿을 것은 그리스도뿐이라는 것, 지상 생활은 순간적이라는 것, 차근차근 타이르듯 목사님은 위로했습니다.
헤어질 때 돈을 좀 넣는 봉투를 주려고 할 때 부인은 당황하면서
"목사님, 이러시면 다음 찾아올 때 찾아올 수가 없게 됩니다."하며 사양했습니다.
"애들을 생각하셔서 받으셔야 합니다."
하며 목사님은 봉투를 겉옷 주머니에 넣어 주었습니다.
그 후 그 부인은 찾아오지도 않았고 주일 예배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애들도 하나 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은 거리에서 우연히 그 부인을 만났습니다.
의외로 그 표정은 밝았고, 작업복 차림에 동작도 밝았습니다.
부인의 생활을 계속 걱정해 온 목사님은 부인과 함께 부근 다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부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상 떠난 남편은 부인을 너무도 아끼고 소중히 여겼습니다.
특히 부인이 교회 일을 돌보는 것을 마치 자기 일처럼 자랑스럽게 생각해서,
가게 일은 일체 혼자 맡아 했고 부인은 거들지도 못하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데 졸지에 남편이 돌아가니 그 이튿날부터 부인은 암담했습니다.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살림은 기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한 두 번 목사님으로부터 돈 봉투를 받고 나서는 왜 그런지 찾아가는 발길이 무거워졌습니다.
때때로 교회에서 교우들이 찾아와 찬송과 기도를 드리고 갔습니다.
잠시 위로는 되었으나 실지 생활은 어려워만 갔습니다.
애들도 하나 둘 학교를 그만 두어야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물건을 사러 온 한 여자 손님과 우연히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 손님이 하도 동정하는 표정이어서 부인은 자기 어려움을 털어놓았습니다.
그 이튿날 여자 손님은 대 여섯 명의 여자 손님을 데리고 와서 식료품을 적지 않게 사갔습니다.
하도 고마워서 부인은 값도 싸게 해 주었습니다.
낯선 이 부인 손님들의 수는 늘어갔습니다.
매일처럼 와서 물건을 사갔으며, 이러 이러한 물건을 준비해 놓으면 사가겠다고 일러주기도 했습니다.
이 바람에 동네 사람들도 이 가게로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몇 달 안돼서 애들도 복교했고, 일하는 점원까지 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부인은 그 고마운 손님들이 어느 단체에 속해 있으며,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활동을 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 후 부인도 그들 모임에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곳이 바로 <쇼까 각 카이> 부인회였습니다.
이름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서로 곤란할 때 실지로 도와주며 살아가는 이 모임에 이 부인은 한없는 애착을 느꼈습니다.
그 날도 부인은 틈을 내어 어느 혼자서 사시는 할머님 댁에 가서 청소를 해 주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목사님, 사랑이란 주는 것이라기 보다 서로 서로 도우며 함께 기쁘게 살아가는 것임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나는 교회를 떠나 이들과 행동을 같이 하기로 했습니다."
부인과 헤어져 교회로 돌아오는 목사님의 발걸음은 무거웠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섬기는 교회가 무엇인가 결함이 있는 것같이 느꼈습니다.
목사님은 자기 교회 단체가 활동하고 있는 각 기관을 면밀히 검토했습니다.
이후 목사님은 자기 교회를 서로 서로 돕고 사랑하는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 '소카가카이(Soka Gakkai)'는 13세기 일본 불교 승려 니치렌(日蓮)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설립된 일본의 신흥 종교 단체로, 한국에서는 '창가학회' 또는 한국SGI(Soka Gakkai International)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묘호렌게쿄(나무묘법연화경, 南無妙法蓮華經)'라는 주문을 부르는 것을 중심으로 하며, 일상 속에서 깨달음과 가치 창조를 추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 아무리 위대한 말이나 위대한 행위도 사랑이 없으면 그 자체도 무익하고, 그 일을 하는 사람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 성경은 그것을 세 번이나 강조해서 말했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은사의 중심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자기가 받은 은사가 최고라고 자랑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받은 은사는 무시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방언과 예언하는 일이 최고라고 자랑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들에게 사랑이 없으면 그 좋은 은사도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받은 은사에 사랑의 날개를 달아 주십시오.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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