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과 칼럼

에바브로디도-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사람

가족사랑 2024. 7. 28. 15:32

빌립보교회 성도 - 에바브로디도( Ἐπαφρόδιτος)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나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자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 빌립보서 2장 2530절 - 

 

 

빌립보서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AD 62년에 써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보낸 이 편지를 감옥에서 썼습니다.

그래서 옥중서신이라고 합니다. 

빌립보서에는 바울의 개인적인 느낌과 생각들, 그리고 애뜻한 표현들이 상당히 많이 들어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가장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빌립보교회는 다른 지역의 교회들보다 가난한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가장 애를 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 빌립보서 4장14∼15절 -

 

바울은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빨리 보낸 후에 자신도 곧 가보려고 했었지만 그 일이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려고 결정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 Epaphroditus)는 누구인가?

‘에바브로디도'라는 이름은 로마 제국 시대에 아주 흔하였습니다.

에바브로디도(영어: Epaphroditus, 헬라어: Ἐπαφρόδιτος)는 빌립보 지역에 있었던 초대교회의 성도였습니다.

"에바브로디도"라는 이름은 아름다운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사랑스러운”, 또는 “매력 있는”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빌립보서에서만 등장합니다.

(1)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25~30절.

(2) 빌립보서 4장18절.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에바브로디도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그의 가족관계, 신앙의 계기, 직분 등 직접적인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에바브로디도가 언급될 때의 상황을 볼 때, 그는 감옥에 수감된 바울을 돕기 위한 조력자로 바울의 편지를 빌립보 성도들에게 전하는 전달자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바울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되어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게 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울을 몹시 걱정하여, 바울을 위해서 물품과 조력자를 보내고자 했습니다.

바울에게 물품을 전달하고, 곁에서 옥바라지해줄 사람으로 ‘에바브로디도’가 선정되었습니다(빌립보서 4장10~18절).

마케도니아에 위치한 빌립보 교회에서 바울이 수감된 로마까지의 거리는 2,000km가 넘습니다.

거기다 치안이 열악해 길에 강도와 도둑이 우글거렸던 시대적 환경을 생각하면, 선교 비용과 물품을 들고 수천 킬로가 넘는 거리를 이동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빌립보서 4:16~19).

무사히 도착하더라도 로마인들이 바울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다면, 곁에서 그를 도운 자신 역시 처벌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에바브로디도는 옥에 갇힌 바울을 보살피기 위해 그 위험한 여정에 기꺼이 발을 내디뎠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목숨을 건 여정을 거쳐 바울과 만났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돕기 위해 찾아온 에바브로디도를 하루라도 빨리 다시 빌립보에 보내려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에바브로디도가 자신에게 오던 중, 장거리 이동으로 인해 중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에바브로디도의 병세가 어느 정도로 나빴는지, 그리고 이제 어느 정도나 좋아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일단 위험한 고비는 넘긴 것 같습니다.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27절).

바울은 자신의 감옥 생활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중병을 앓았던 에바브로디도가 더 이상 감옥 생활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바울은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중병을 앓았던 에바브로디도의 안위와 형제로 인해 근심하는 빌립보 성도들을 염려해, 에바브로디도를 돌려보내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에바브로가 교회 공동체에서 어떤 사람인지를 구체적으로 말해줍니다.

25절입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새번역 성경은 25절을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형제요 동역자요 전우요 여러분의 사신이요 내가 쓸 것을 공급한 일꾼인 에바브로디도를 여러분에게 보내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영어 성경 NIV 번역입니다.

"But I think it is necessary to send back to you Epaphroditus, my brother, fellow worker and fellow soldier, who is also your messenger, whom you sent to take care of my needs."

헬라어 성경은 25절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Ἀναγκαῖον δὲ ἡγησάμην Ἐπαφρόδιτον τὸν ἀδελφὸν καὶ συνεργὸν καὶ συστρατιώτην μου, ὑμῶν δὲ ἀπόστολον καὶ λειτουργὸν τῆς χρείας μου, πέμψαι πρὸς ὑμᾶς,

 

1. 내 형제(my brother) 에바브로디도

'형제'에 해당하는 아델폰( ἀδελφὸν)은 한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난 이들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명사형은 아델포스() αδελφος)입니다.

히브리서 2장11절 말씀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성경에서 보여주는 성도간의 호칭은 「형제자매」입니다.

주님은 자기 안에서 거룩하게 하신 우리를 형제(αδελφός:아델포스)’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는 친형제배다른 형제의형제 등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형제로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장50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새번역)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함께 신앙을 공유하며 하나님 가족의 일원으로서 깊은 형제사랑을 나누는 성도였습니다.

바울의 감옥 생활을 도와주기 위해서 빌립보 교회로부터 파송받은 에바브로디도는 한낱 심부름꾼이 아니라 바울의 형제와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누구를 '형제'라 부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의 씨가 처음 뿌려지던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경상북도 영주군 순흥 지방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기독교가 전파될 당시만 해도 백정은 천민이어서 어른이 되어도 아이들이 하대를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백정 한 사람이 예수를 믿겠다고 했습니다.

선교사는 바로 그 백정을 입교시키고 그를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주변에서는 그를 형제라 부르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는 그를 형제라 부르기를 고집했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기독교는 야만의 종교요, 서양 선교사는 예법을 모르는 야만족이라고 해습니다.

예배당에는 상놈들이나 갈 곳이지 양반은 갈 곳이 못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선교사의 결정은 옳은 결정이었습니다.

깊은 형제애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다른 사람을 향하여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우리의 순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2. 함께 수고하는(fellow worker) 에바브로디도

'함께 수고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르곤(συνεργν)’은 동역자를 의미합니다.

영어로는 Fellow worker(펠로우 워크)란 뜻인데 길을 쫓다 따라오다’ ‘일하는 사람 노동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동역자(同役者)는 복음 증거를 위해 함께 수고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동역자는 아무리 무겁고 힘든 짐이라 해도 함께 나누어지고 사역하는 사람입니다.

동역자는 '같은 목적을 위해, 함께 가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시너지(synergy)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함께 일하고 협력할 때 효율극대화가 일어납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도서 4장12절).

주님의 일을 하는데는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어떤 여성도의 장례식에서 ㅋ'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할머니는 자기 좋은 동역자였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교인들이 "어떻게 그 할머니께서 목사님의 동역자냐?"고 물었습니다.

"그 할머니가 나의  동역자인 이유는 매주일 등록하는 새신자들의 명단을 적어서 일주일 내내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동역자'라는  '함께 일하는 사람', '돕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쓰임을 받는 모든 사람은 동역자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동역자요, 목사의 동역자요, 성도의 동역자입니다.

하나님은 동역(同役)을 좋아하십니다.

우리를 혼자 살게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일을 시키실 때도 혼자 일하게 시키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세분이 같이 일하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분이 삼위일체, 세 분이 동역하십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그 공동체의 최소 단위는 두세 명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복음18장1920절)

에덴동산의 아담도 혼자서는 외로웠기에 하와라는 배필이 필요했습니다.

남녀 둘이 만나고 사랑하여 결혼하면 최소 공동체입니다.

그것이 가정입니다.

 

3. 함께 군사된 자(fellow soldier) 에바브로디도

'전우(戰友)'입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대적자들과 계속해서 싸우는 일꾼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계속해서 고난을 당하였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자신들이 군인임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과 소명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군인임을 자랑스러워했고,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수호자임을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은 마귀와 죄와 세상과의 영적 전쟁입니다.

성도는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군병들입니다.

군인들은 전쟁 때를 위하여 잘 훈련되어야 합니다.

군사들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무장을 해야합니다.

성도들도 영적 무장을 해야합니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에베소서 6장11∼17절)

 

말씀과 기도로 잘 훈련된 성도는 어려운 일이 닥쳐도 흔들리지 습니다.

군인에게 필요한 것은 잘 훈련되는 것과 더불어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입니다.

군인은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하며 죽음의 싸움터에도 용기 있게 나가야 합니다.

성도들과 주의 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전쟁을 수반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적대적이니까요.

물론 우리들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니 세상 사람들에 대해 적대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뒤에서 작용하는 악한 영의 세력과 다퉈야 하겠지요.

이 싸움도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고 전우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대적자들과 계속해서 싸우는 일꾼을 가르키는 것으로 그가 계속해서 고난을 당하였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바로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인간 관계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답이 있습니다.

그것이 참된 형제애에 기초한 관계라고 한다면 그 어떤 경쟁심이 끼어 들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가장 바람직한 관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초기 1905년 전북 김제 금산교회가 유명합니다.

김제에서 큰 부자가 조덕삼인데 이 부자가 미국선교사님에게 예수를 믿고 자기 집을 통째로 바치니다.

이것이 금산교회가 됩니다.

조덕삼의 집에 머슴으로 이자익이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조덕삼은 이 머슴을 공부할 수 있도록 천자문도 가르치고 신앙생활도 같이합니다.

금산교회에서 둘이 같이 집사도 되고 영수도 됩니다.

1907년에 장로투표를 했는데 조덕삼, 이자익 두 사람이 같이 장로후보에 올랐습니다.

투표결과가 놀라웠습니다.

머슴이 주인보다 표가 많이 나와 장로가 됩니다.

성도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조덕삼이 나오더니 인사말을 했습니다.

"금산교회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이자익 영수가 저보다 신앙열정이 훨씬 높습니다. 그를 장로로 뽑아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조덕삼은 자신을 누르고 장로로 피택된 머슴을 질투하는 표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는 머슴 이자익이 조덕삼을 깎듯이 섬기고 교회에서는 조덕삼이 이자익을 장로님으로 존경하고 그런 동역의 관계가 됩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동역입니다.

그런데 조덕삼은 또한번의 결정을 합니다.

이자익을 평양신학교로 보내 목사로 만듭니다.

조덕삼은 그로부터 3년 뒤 장로가 되고 1915년 조덕삼장로는 이자익목사를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합니다.

머슴출신을 담임목사로 모시고 깎듯이 섬깁니다.

이 모습이 금산교회에서 너무나 아름다웠고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됩니다.

이자익목사는 세번씩이나 교단 총회장을 지내는 한국교회의 거목지도자가 됩니다.

금산교회 두 사람의 동역을 생각해봅니다.

100년 전에 양반과 머슴의 차별이 서슬이 퍼런 시대였는데 믿음의 힘으로, 진정한 관심으로 동역을 이루어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역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동역은 둘다에게 진정한 관심이 있을 때 세워집니다.

머슴을 장로로 세우는 것, 머슴을 신학교 보내 목사로 키우고, 그 머슴을 담임목사로 청빙하고, 이것이 바로 진정한 관심을 가진 동역입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