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8장1~13절□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미국의 34대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가 사관학교 2학년이었을 때 일입니다.
사관학교에서는 신입생들을 상급생들이 붙잡고 기합을 넣고 호통치며 군기를 잡곤 했습니다.
하루는 신입생 한 명이 뛰어가다가 아이젠하워를 들이받았습니다.
아이젠하워 '잘됐다' 생각하고 그를 세워놓고 소리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너는 명예로운 사관생도라기보다는, 겨우 시시한 이발장이 같은 녀석이로구나! 어떻게 그렇게 부주의할 수가 있는가 말이다!"
그러자 그 신입생은 어깨를 탁 펴더니 큰 소리로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네, 선배님! 저는 이발사였습니다. 저는 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이발사로서 가족들을 부양해 왔습니다!"
아이젠하워는 갑자기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가 설마 이발사였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입니다.
자신은 지금 남의 생계를 모욕하고 무시한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채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자기 방에서 홀로 앉아 다시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모욕하는 언행을 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의 그 행동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너무나 가볍게 생각했던 자신을 깨닫게 하는 큰 교훈이 되었다."
그 후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 사령관으로서 큰 일을 담당할 때나,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직분을 수행할 때나 늘 다른 사람을 격려하는 위대한 지도력을 발휘했습니다.
교만에는 후회가 찾아오고 겸손에는 지도력이 따라옵니다.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편지르 보낼 때, 고린도에는 태양의 신 아폴로(Apollo),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우스(Aesculapius) 신전을 포함하여 12개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이들 신전에서는 종교적인 제사만 행해진 것이 아니라 집안의 행사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회갑연을 신전에서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인들도 초청을 받게 되고, 가야 하느냐, 가서는 안되느냐 의견이 달랐던 것입니다.
특히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을 먹어도 되느냐, 안되느냐는 것으로 의견다툼이 있었습니다.
제사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안되느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는 우상에게 얼마나 많은 제물이 바쳐졌던지 그 고기가 다시 시장에 나와서 팔렸습니다.
그럼 시장에서 고기살 때, 원산지 확인하고 사야하느냐?, 신전에서 나온 고기냐 물어봐도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이런 문제로 고린도 성도들끼리 논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쓴 편지에 이 질문을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유교 문화권에 속하여 생활 전반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고린도의 정치, 경제, 여가 등 문화 전반이 신전을 중심으로 행해졌고 자연스럽게 고린도 사람들은 여러 신들을 인정하는 다원주의적 성향을 띄었습니다.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신분의 변화뿐 아니라 신분에 합당한 삶을 요청 받았고 익숙했던 생활 양식을 떠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8장 1절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에 대해서”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고린도교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 바울에게 질문을 했으며, 바울이 그 질문에 대해서 답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주요 상업 도시로서 큰 번영을 누렸던 고린도 지방은 특히 우상숭배가 성행했던 곳입니다.
그래서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 우상 숭배의 요소가 깊이 뿌리 박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어떤 우상숭배에 관련되거나,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을 가능성을 안고 살아갔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들끼리 가정에서 정결하게 만든 음식이 아니라면, 시장에 나온 고기와 음료들은 십 중 팔구는 이미 우상에게 바쳐진 후 팔린 물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상을 배격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와 같은 상황은 참으로 당혹스러운 문제였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본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이방 신전에 바쳐진 우상 제물들을 접촉하거나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함께 식사를 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헬라 세계에 증거 된 복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갖게 된 고린도 지역 그리스도인들은 이교도인 친척과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초대받아 함께 먹어야 할 때, 복잡한 종교적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시대에 이방인들의 종교행사에 바쳐진 제물들은 가정이 관여하는 종교적 행사였습니다.
제사에 드려지는 제물이 제사장들에게 제공되면 그들은 이 동물을 죽여 일부는 제단 위에서 태우고, 일부는 제사장이 가져가고, 그 나머지는 제물을 바친 자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 고기를 가져다가 가정에 함께 먹었습니다.
따라서 그 가정에서 초대받은 손님들은 어쩔 수 없이 이방 제물로 드려진 고기를 함께 먹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렇게 우상숭배에 사용된 고기가 시장에 나오고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사서 먹게 되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그런 고기를 사먹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적 갈등을 겪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는 곧 가정적이고 사회적이며, 종교적인 문제로 확대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안타깝게도 이 문제로 고린도 교회 내에서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지식보다 사랑으로 행동하라」
오늘 본문은 바로 그와 같은 논쟁에 대한 바울 사도의 권면을 담고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대하는 태도에 대헤서 바울 사도는 '지식과 사랑'에 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지식보다 사랑으로 행동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왜 지식보다 사랑으로 행동하라고 했을까요?
1절을 보십시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바울은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지식(그노시스, γνῶσις)은 고린도 성도들이 특별히 자랑했던 ‘성령께 받은 특별한 계시’를 말합니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로서 지식이 풍성했지만, 성도들은 앞서 살펴본 대로 성령께 선물로 받은 그 지식으로 자기를 앞세우고 다른 성도를 억압하며 서로 시기하고 다투면서 교회 안에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의 지식은 교만하게 하는 도구로만 사용됐고,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일에는 거듭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다 지식이 있다’는 말은 고린도 성도들이 자신들은 우상제물에 대하여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너희들이 지식이 있다고 하지만 이 문제를 지식만으로 해결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
“교만하게 한다”는 퓌시오오(φυσιόω)라고 하는데, 그 뜻은 “불어 부풀리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어간 상태”, 즉 자만에 빠져서 경거망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고린도 교회의 열광주의자들의 특징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말과 반대되는 말로 “덕을 세운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오이코도메오(οἰκοδομέω)인데, “세우다, 건설하다 ”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칭 강한 자들이 말하는 지식은 사랑이 없는 지식으로 사람을 부풀려서 그들을 교만하게 하고 약한 자들을 넘어지게 한다고 추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식을 자랑하며 경거망동하는 그들의 행동은 연약한 자들로 하여금 실족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강한 자들을 향해서 지식보다 사랑을 가지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은 사람을 자만하게 만들지만, 사랑은 교회를 세웁니다.
덕을 세우는 사랑이 결여된 지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입장과 상황을 무시하게 합니다.
그것은 결국 그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을 교만으로 가득 차게 합니다. 반면에 사랑은 자랑하지 않고, 봉사와 섬김으로 ‘덕을 세우게’하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사회적 문제는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의 결여에서 비롯됩니다.
가정에서 부부간에 다툼이 왜 일어납니까?
서로에 관한 지식이 부족해서입니까?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아는 관계가 부부관계입니다.
하지만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지식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부족해서입니다.
교회나 사회에서도 서로를 잘 아는 사람들이 사랑이 부족해서 분란을 일으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 없는 지식은 인간을 이기적이고 교만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 교만을 극복하기 위해서 본문이 제시하는 바가 바로 사랑입니다.
남을 멸시하고 자기만을 자랑하는 교만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바울 사도는 새로운 기준, 곧 사랑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결여된 지식은 자기 자랑으로 가게 되고, 지식이 없는 다른 사람을 멸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자랑하게 만들고 자기만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자기 옆에 있는 이웃을 돌아보게 하고 그를 존중하며 그와 더불어 자기의 것을 나누게 합니다.
지식은 틈만 보이면 비판하지만, 사랑은 그 틈난 공간을 메워 나갑니다.
지식은 끊임없이 나와 타인을 비교하게 함으로, 열등감 속에서 비굴하게 만들거나 우월감으로 오만하게 만듭니다.
3절을 보십시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하나님은 지식을 가진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받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 잘난 사람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자를 즐겨 받으십니다.
11~13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바울이 채식주의자여서가 아니라 내가 우상 앞에 바친 고기를 먹음으로써 믿음이 약한 형제들이 실족하게 된다면 차라리 평생 입에 고기를 대지 않으리라는 선언입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도 평생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1875년 1월 14일 독일 카이제르스부르크 라는 작은마을에서
목사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슈바이처는 동물을 사랑했습니다.
이에 친구들이 동물을 괴롭힐때마다 말렸습니다
목사였던 슈바이처 가족들은 식사때마다 소리내어 기도를 드렸고
기도 시간에 슈바이처는 길에서 본 다리절룩거리는 늙은 말을 보고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 숨쉬는 모든 동물을 보호하시고 축복하여 주세요."
슈바이처의 마을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슈바이처 집안도 가족이 많아 빠듯했지만
목사아들이면서 차림새가 단정했던 슈바이처는
부잣집 아들이라는 오해를 받으며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슈바이처가 따뜻하게 대하자 마을 아이들도 슈바이처를 좋아했습니다.
슈바이처가 일곱살때 길에서 몸집 큰아이 게오르그가 슈바이처에게 싸움을 걸었는데
슈바이처가 이겼습니다.
게오르그는 화를 참지 못하며 말했습니다.
"그래 , 나도 너처럼 일주일에 두번씩 고깃국을 먹으면 너 같은 것은 문제없어!"
이에 충격을 받은 슈바이처는 평생동안 그 말이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게오르그의 말이 맞아... 그건 공정한 싸움이 아니었어."
이때 슈바이처는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고
다른 아이들보다는 부유했던 슈바이처는 자기만 좋은 생활하는게 싫었습니다
굶주린 이웃들이 있는데 자신만 배부르고 따뜻하게 지내는 것이 부끄러워진 슈바이처는
이후부터 고깃국을 입에 대지 않았고 추운 날씨에도 외투를 입지 않았습니다.
슈바이처는 어린시절 가난한 친구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습니다.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자유가 남을 해칠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형제 사랑이요 이웃 사랑입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이 드러내 놓고 술 마시고 담배 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음주와 흡연이 그의 신앙 양심을 파괴하지 않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고유의 기독교 전통에서는 그런 행위로 시험에 들 사람이 충분히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음주와 흡연은 피해야 마땅합니다.
내 개인적인 신앙 양심에는 아무 거리낌이 없어도 나의 그 행위에 누가 다칠 수 있다면 자제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함부로 먹고 마셔 약한 형제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은 명백한 죄라고 합니다.
음주와 흡연의 죄가 아니라 약한 형제를 돌보지 않고 해친 죄입니다.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12절)
나만 좋으면 된다, 나만 거리끼지 않으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나만 좋은 게 아니라 남에게도 덕이 되어야 합니다.
내게 아무리 좋아도 남에게 덕이 안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 양심의 자유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이 부분에서 많이 약합니다.
아직도 나만 옳으면, 내게만 좋으면 다 인줄 압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양심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먹을 수 있는 자유, 누릴 수 있는 권리보다 형제와 이웃의 덕을 먼저 배려하고 고려하라고 합니다.
이것을 주님의 정신이라고 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아무리 옳은 일이라 해도 약한 사람이 나의 지식 때문에 다칠 수 있다면 그 옳은 일을 자제하는 게 맞는 것이고, 이게 기독교가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각자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와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지향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식보다 사랑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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