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과 칼럼

위기를 기회로 바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가족사랑 2025. 6. 19. 05:45

「거기 누구 '정약용' 같은 사람 없소?! 」

유네스코는 2012년에 세계기념 인물로 네 사람(루소, 헤르만헤세, 드뷔시, 정약용)을 선정하였습니다.

그중 다산 정약용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등재되었습니다.

2021년에는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김대건을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강진 유배지에서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정약용은 500여권에 달하는 저술을 통해 정치, 행정, 법학, 경제, 지리, 의학, 공학 등을 아우르며 철저한 실학사상(實學思想)을 펼친 실사구시 철학인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적으로 초시는 1000명, 진사는 200명을 합격시켰는데 다산은 22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진사 합격자는 임금님께 인사를 드리는데, 조선왕조 최고의 대학자였던 정조는 다산의 주관식 논문을 읽고 인재로 키워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조와 처음 만남이 이루어지던 날 정조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어냐?"

"네! 정약용입니다."

"나이가 몇이냐?"

"22살입니다."

"알았다."

이 첫 만남을 다산 기록에 풍운지회(風雲之會), 즉 구름과 바람의 만남이라고 하였습니다.

정조는 성균관 학생들에게 수시로 시험을 치렀는데 다산이 계속 장원을 하니 감탄하여 학생인 다산을 수시로 불러 국가정책에 대해 물어보았고, 다산이 올린 정책 여러 개가 국정에 반영되기도 했습니다.

 

정약용은 6년 간의 성균관 공부를 마치고 28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들어선 첫날 시(詩)를 지었습니다.

그 시는 '공렴(公廉)'이란 두 글자로 공직자로서 마음 속에 다짐한 것이었습니다.

공렴(公廉)은 두 단어로 ()과 염()입니.

공은 공평(公評)입니.

사심 없이 공익을 위해 공정하게 일하는 것입니다.

염은 청렴((淸廉)입니.

청렴(淸廉)은 맑고 깨끗하며 탐욕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 성품과 행실이 깨끗하고 재물이나 이익을 탐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공직자의 덕목으로 강조되며, 부패하지 않고 공정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약용의 공렴(公廉) , 이 다짐은 평생 동안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정약용이 30세 때, 정조는 앞으로 10년을 계획하고 수원 화성 건축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다산은 설계를 하면서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발명하였으며, 거중기 11대를 투입해 2년 4개월 만에 완공하여 정조가 감탄해 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산의 유일한 배경이었던 정조가 죽었습니다.

어린 순조가 즉위한 후 노론이 정권을 집권하면서, 다산은 생애 최대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다산은 신유박해(辛酉迫害)때 천주교 탄압에 연루되어 40세에 유배형을 받았습니다.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년 발생한 대규모 천주교 박해 사건을 말합니다.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조선왕조의 천주교에 대한 최초의 대대적 박해 사건이었습니다.

순조 즉위와 정순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을 계기로, 그녀를 중심으로 한 노론 강경세력이 박해를 주도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후 천주교 선교활동을 주도했던 이승훈은 정약용의 매형이었습니다.

천주교 교리 연구회장인 정약종은 셋째 형이었습니다.

1791년에 전라도 진산에 살던 윤지충이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른 후 제사를 폐함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는 진산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진산사건을 일으킨 윤지충은 외사촌 형이었기 때문에 정약용은 궁지에 몰려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신유박해 때 정약용이 구속되어 18년만에 유배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1801년 11월, 둘째 형인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각각 유배를 떠났습니다.

강진에 도착한 정약용은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동문 밖 주막에 들려 주모한테 어려운 사정을 얘기했습니다.

정약용의 이야기를 듣고 주모가 말했습니다.

"높은 양반이 무슨 죄를 지었는 가는 모르겠는데 죄가 밉지, 사람이 밉겠소. 방이 하나 있는데 먹여주고 재워줄 테니 내 부탁을 들어줄래요."

"말씀해 보세요."

"당신은 배움이 많을 것인데 우리 동네 아이들이 배우고 싶어도 선생님이 없어서 배울 수가 없소. 공부를 가르쳐 주겠소?"

"다른 건 몰라도 그거라면 하겠소."

정약용은 흔쾌히 허락하고 골방에서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정치한다고 책도 보지 못했는데 이제는 마음껏 책도 보고 글도 써야 되겠구나, 하늘이 내게 내린 좋은 기회가 아니겠는가.'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야겠다!'

천 리 길을 가족과 헤어져 온 사람으로서 보통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정약용은 암행어사 시절 관료들의 부패에 고통 받는 백성들의 황폐하고 비참한 현실을 보았습니다.

유배지 강진 고을에서도 백성들의 슬픈 현실을 지켜 보았습니다.

그는 목민관들의 마음 자세가 이런 상태라면 나라가 망할 것이며 개혁을 하지 않으면 국가와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어리고 순한 양들이 제 목소리를 다 낼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그리며 유배지에서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목민관(牧民官)이 지켜야 할 지침서 목민심서(牧民心書) 48권 16책,

억울한 백성들이 없도록 하는 형옥에 관한 법정서 흠흠신서(欽欽新書) 30권 10책,

정치 사회 경제 제도를 개혁하고 부국강병을 목표로 저술한 경세유표(經世遺表) 필사본 44권 15책,

정약용은 강진 유배생활 18년 동안 "미완성작" 등을 포함해서 무려  500여권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는 책에서 모든 문제점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반드시 대안을 제시하여 실행하면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주자의 성리학적(性理學的) 해석과 관념의 문제점도 실학적(實學的)으로 바꾸고, 실천이 없는 철학과 사상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모든 과학의 원리는 수학에 근본이 있다."고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교과서를 개편하여 백성들이 수학을 배워야 나라가 부흥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정약용은 위기에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보면 학연, 학유 두 자식이 잘못될까 걱정하며, 편지를 통해 수없이 효제(孝悌)를 강조했습니다.

"우리 집안이 언젠가 폐족을 면하는 길은 책을 읽고 독서하는 것밖에 없다. 짐승과 사람이 다른 점은 사람은 책을 읽을 줄 알고 짐승은 책을 읽을 줄 모른다."

"아버지가 벼슬을 했어도 재산이 없어 물려 줄 것이 없는데 야박하다고 서운해 하지 마라. 내가 너희들에게 유산으로 부적 두 글자를 물려줄테니 항상 지니고 다녀라. 그것은 바로 근검(勤儉)이다."

정약용의 가르침은 아주 세심했습니다.

이를테면 선비의 자세를 이를 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옷차림과 시선을 바로 하며 입을 굳게 다문 채 단정히 앉아 있어야 하며, 그 모습은 마치 진흙으로 빚은 사람처럼 엄숙해야 한다.’

그는 두 아들이 다녀간 후엔 매서운 질책이 담긴 편지를 보냈습니다.

‘지난번 너희가 왔을 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옷매무새를 여미고 똑바로 앉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정하고 엄숙한 모습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음가짐에 대한 당부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사대부의 마음가짐은 당연히 맑고 깨끗해 털끝만큼도 허물이 없어야 한다.”

“각별히 주의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하지 말라.”

“편지를 쓸 때 주고받는 말 중 한마디라도 거짓이 담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은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친어머니(해남 윤씨)를 여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4년 뒤 다산 아버지 정재원은 5남매 자식들을 위해 동지중추부사 김의택(金宜澤)의 서녀인 스무 살 김씨를 측실로 삼았습니다.

그녀는 작은 체구에 말수가 적었지만 영민하고 천성이 온화해 가족들을 화평케 했습니다.

새어머니를 맞을 당시 열두 살이었던 다산은 머릿니가 많고 몸에 부스럼도 잘 났습니다.

그동안 그를 챙겨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산과 불과 여덟 살밖에 차이 나지 않던 서모 김씨는 다산에게 손수 빗질해주고 부스럼 때문에 생긴 고름과 피도 닦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산 옷을 빨래하고 꿰매며 친어머니 이상으로 정성을 쏟았습니다.

그러다 다산이 15세에 장가를 간 뒤로는 자연스럽게 그의 수발을 그만두었습니다.

사실 다산 집안은 원래부터 가난했습니다.

아버지 정재원이 10여 년간 지방관 생활을 했지만 청렴결백해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탓입니다.

가난한 집안에 시집온 서모 김씨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잘 이끌었고, 1792년 남편이 죽고 난 뒤에도 배다른 자식들 건강과 생계를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였습니다.

이후 다산이 1801년 신유사옥으로 유배를 떠나자 김씨는 늘 그를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친자식이나 다름없던 다산을 끝내 보지 못해 안타깝다는 유언을 남기고 1813년 7월 60세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유배지에서 서모 김씨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산은 애틋한 마음을 담아 서모 묘지명(墓誌銘)을 직접 지어 김씨를 추모했습니다. 

 

목민심서(牧民心書)를 통해서 보는 정약용의 공직자관

1801년부터 시작된 다산 정약용(1762∼1836년) 귀양살이는 1818년에야 끝납니다.

귀양살이가 풀리기 몇 달 전인 그해 봄 다산은 필생의 저서 ‘목민심서(牧民心書)’를 48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탈고했습니다.

백성을 돌봐주고 부양하고자 했던 마음에서 다산은 ‘목민(牧民)’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또 당시 자신은 전혀 이를 실천할 방법이 없었기에 ‘마음으로 전하는 책’이라는 뜻에서 ‘심서(心書)’라고 했습니다.

1818년 봄에 집필을 완료한 뒤 가을에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고향집 ‘여유당’ 서재에 앉아서 책을 다시 한 번 수정합니다.

이후 책을 짓게 된 동기와 책 내용을 요약한 서문을 썼습니다.

서문을 보면 목민심서가 어떤 책이고 왜 책을 저술했으며, 다산은 그 책이 어떻게 활용되기를 바랐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현의 가르침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수신(修身)이요, 하나는 치민(治民)인데 치민이 바로 목민이다. 그렇다면 지식인들이 배우는 일이란 수신이 절반이 되고 그 절반은 목민하는 일이다.”

다산은 배우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인간에게 배워야 할 두 가지 길 중 하나인 ‘목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밝히고, 어떻게 목민할 것인가를 위해 이 책을 짓는다고 밝혔습니다.

“성인의 시대는 멀어졌고 성인들의 말씀도 사라져 성인의 도가 어두워졌으니, 오늘날 목민관들은 오직 이익 탐하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 부양하는 일은 알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일반 백성들은 여위고 괴로우며 시들고 병들어 죽어가 구렁텅이를 가득 메운다. 그들을 양육한다는 관리들은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들만 살찌우고 있으니 왜 슬프지 않겠는가.”

즉, 백성을 살려낼 방법으로 목민관들의 행정 규범을 저술한 책이 목민심서입니다.

아울러 심서라고 이름을 붙인 것에 대해서도 “백성을 양육하고 돌봐주고 싶은 마음이야 있으나 몸소 실행할 길이 없어서 ‘마음으로 전하는 책’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말로 서문을 마무리했습니다.

당시 지방 관리들이 전세(토지 소유세)와 공부(貢賦·세금 유형 중 각 지방 토산품을 거둬들이는 형태)를 제대로 처리할 줄 몰라 아전들의 농간에 휘말렸습니다.

그 결과, 여러 가지 폐단이 어지럽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다산은 자신이 비교적 낮은 신분이었기 때문에 군현에서 일어나는 실태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고 밝혔지만, 자신의 견해를 바탕으로 백성들이 착취와 탐학의 굴레에서 벗어날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공평한 세금, 부패 없는 공납의 문제 해결은 당시 부정부패를 막아낼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다산은 목민심서를 쓰기 위해 4서 5경을 연구하고 중국 23사 역사책, 국내 역사책, 선현들의 문집 등에서 옛날 목민관이 백성을 양육하는 기록을 골라 정리했습니다.

목민심서는 모두 12편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1편은 부임(赴任), 2편은 율기(律己), 3편은 봉공(奉公), 4편은 애민(愛民)입니다.

5편에서 10편까지는 6전(典)에 관한 내용입니다.

11편은 진황(賑荒), 12편은 해관(解官)입니다.

12편이 각각 6개 항목으로 구성됐으니 도합 72조항이며 총 48권으로 구성됐습니다.

 

 

첫 조항인 부임은 벼슬살이 시작부터 목민관(牧民官)이라면 지켜야 할 기본 행실을 설명한 부분입니다.

해관에서는 벼슬을 그만둘 때 목민관의 처신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12편에서 두 편을 제외한 10편이 목민관들이 실제로 실행해야 할 행정수칙입니다.

72조항 중 60조항은 반드시 실천해야만 하는 목민관의 의무로 제시했습니다.

율기·봉공·애민 3편은 목민관 도리로서 반드시 행해야 할 기본 원칙이자, 3대 강령입니다.

 

5편에서 10편까지 6편은 각론으로 행정 실무를 자세히 풀어 썼습니다.

5편은 이전(吏典)으로 조선 왕조 6조에서 이조(오늘날 내무부)에 해당하는 임무를 열거한 내용입니다.

6편 호전은 호조(기획재정부)에, 7편의 예전은 예조(문화체육관광부), 8편 병전은 병조(국방부)에 해당됩니다.

9편과 10편의 형전과 공전은 각각 형조(법무부)와 공조(국토교통부) 역할을 담당하도록 배열했습니다.

 

한 고을을 맡은 목민관은 관료의 한 사람에 그치는 게 아니라,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쥔 통치자와 같습니다.

그래서 다산은 “비록 벼슬 이름은 다르지만 목민관 직책은 옛날의 제후이다(부임 편, 제배조항)”라며 “나라에 6조가 있는 것처럼 고을에는 6전을 배치해 나라 다스리듯 고을을 다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산은 인생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회갑을 맞는 해에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란 이름으로 자서전을 썼습니다.

자신이 쓴 수많은 저서에 대해 간략하게 책마다 해설을 단 책입니다.

‘목민심서’에 대해서는 “현재 법을 토대로 해서 우리 백성들을 돌봐주자는 책”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법과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해 온 천하 백성이 편하게 먹고살 수 있는 부국강병 나라를 만들자는 ‘경세유표’와 달리 ‘목민심서’는 백성 한 사람이라도 혜택을 입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뜻에서 만들어진 책입니다.

 

다산은 “백성은 토지를 밭으로 여기지만 아전들은 백성을 논밭으로 삼는다”고 했습니다.

아전을 단속하고 감시하는 일이야말로 목민관이 해야 할 가장 큰 일이자 힘든 일 중 하나였습니다.

조선시대 아전들의 탐학한 악행이야말로 가장 큰 적폐였습니다.

아전들의 적폐만 제대로 청산해 백성들이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면 목민심서의 저술은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법과 제도를 통째로 개혁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한 목민관도 최소한 공정성과 청렴성을 갖고 관행이나 읍례(邑例)라는 이름으로 쌓여 있는 적폐만 청산해도 백성이 큰 혜택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이 다산의 뜻이었습니다.

아전을 단속하는 문제는 바로 오늘날 공무원 부정부패를 막는 일과 비슷합니다.

 

목민심서의 핵심은 공권력의 회복과 애민(愛民)이었습니다.

다산이 주장하는 공권력의 회복은 권위의 상징이지, 절대왕정은 아니었습니다.

국왕이나 관료가 공적인 관료기구를 통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파악하였습니다.

또한 아래로는 목민(牧民)에 대한 지도를 확립하여 민본의식을 실천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그의 주장은 목민관이 지켜야할 지침인 목민심서를 비롯하여 제도의 개혁원리를 제시한 경세유표, 죄수에 대해서조차 흠휼사상에 입각해 재판하도록 하는 흠흠신서등을 통하여 사회를 합리적으로 경영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공직자의 자세가 중요하였는데, 화를 내지 말 것, 직위를 구하지 말 것, 절약할 것, 기쁜 마음으로 할 것, 배움을 중시할 것, 재난에 대비할 것, 세력자의 횡포를 막을 것, 청렴할 것 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공렴(公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목민심서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 하나를 찾는다면 ‘공렴(公廉)’이라는 단어입니다.

다산은 공직자들이 공(公)하고 염(廉)하기만 하면 목민심서에서 강조한 모든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산은 ‘공’과 ‘염’이라는 글자가 지닌 뜻을 실제 행정에서 실천한다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황해도 곡산 부사 시절의  다산 정약용

 

정약용은 서른여섯 살인 1797년 윤 6월에 황해도 곡산 부사에 제수되었습니다.

한 달 전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어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정조는 반대파의 칼날을 피해 지방관으로 보낸 것입니다.

잠시 외직으로 보내어서 공격을 누그러뜨리려는 조처였습니다.

짧은 기간의 암행어사와 금정찰방을 제외하면 본격적인 지방관, 이른바 목민관(牧民官)이 된 것입니다.

'목민관'은 임금이나 고을의 원이 백성을 다스리고 기르는 벼슬아치를 일컫습니다.

뒷날 치민(治民)에 관한 도리를 논하고, 벼슬아치들의 통폐를 제거하고, 관리의 바른 길을 알리고자 그릇된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약용은 이때 처음으로 한 고을의 책임을 맡아 피폐한 민생을 목견하고 구제의 방법을 찾았습니다.

관리들의 탐학이 얼마나 극심한가를 알게되고, 관념적이던 실학사상이 현실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정약용이 임금께 작별인사를 할 때 정조는 변함없는 신뢰를 보내주었습니다.

「자찬묘지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지난 번 상소문은 문장이 좋을 뿐 아니라 생각도 훤하니 참으로 쉽지 않은 것이다. 바로 한 번 승진시켜 쓰려고 하였는데, 의논이 들끓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한두 해가 늦어진다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가서 있으면 장차 부를 것이니 서운하게 여기지 말라."

 

마치 어버이가 자식을 떠나보내면서 하는 당부와 같습니다.

정약용은 비록 외지로 떠나는 좌천의 벼슬길이지만, 이같은 군주의 마음을 새기면서 낯선 임지로 향합니다.

「곡산 부임을 앞두고 궁전을 하직하며」라는 시 한 편을 지었습니다.

 

종종걸음 치면서 궁전 뜰 내려설 때

자상하신 임금 말씀에 절로 눈물 흐르네

등생(謄生)처럼 원해서 고을살이 감 아니요

소송(騷頌)의 창주(滄州) 부임과 같다네

떠나는 짐에는 규장각의 책도 있고

궁중 약원의 환약도 있어 이별 시름 덜어 주네

궁궐에서 서쪽으로 삼백 리 가매

가을 되어 서리 내리면 원님 방에서 꿈꾸리.

 

정약용이 곡산부사로 부임하기 전 이곳에서는 민요에 버금가는 소요사건이 있었습니다.

조정에까지 알려지고 일부에서는 주동자를 체포하여 처형하자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과연, 그가 부임하는 길에 이계심(李啓心)이라는 주동자가 백성의 고통을 12조목으로 적어 호소한다며 가마 앞에 엎드렸습니다.

자수한 것입니다.

수종하던 서리들이 포박하러들자 이를 말리면서 관청으로 데려갔습니다.

사연인 즉 전임 곡산부사 때 서리들이 농간을 부려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자 이계삼이 백성 천여 명을 이끌고 관청에 몰려가 항의한 일이 있었습니다.

관청에서는 시정책을 찾기보다 주동자의 체포에 나섰고, 이계심은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정약용이 부임한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호소하고자 나타난 것입니다.

사실관계를 확인한 정약용은 이계심을 풀어주었습니다.

정약용은 이계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고을에는 모름지기 너와 같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 한 사람으로 형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 백성을 위해 그들의 원통함을 폈으니, 천금을 얻을 수 있을지언정 너와 같은 사람을 얻기가 어렵다. 오늘 너를 무죄로 석방한다."(이암(菴)선생 연보)

 

이계심의 방면은 파격적이었습니다.

조선시대의 관리들은 죄가 있건 없건 필요에 따라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고 매질을 하여 '자복'을 받아내기 일쑤였습니다.

특히 백성들의 집단행동은 반역죄로 치부하여 가중처벌하였습니다.

정약용은 뒷날 이 사건을 회고하여 「자찬묘지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관청이 밝지 못하게 되는 까닭은 백성이 자신을 위해 도모하는 데 교묘하기만 하고, 폐단을 들어 관청에 대들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관청에서 천금을 주고 사야 할 것이다."

 

정약용은 '목민관은 주색에 빠져 거드름 피우면서 백성들의 고혈을 빠는 자리가 아님'을 행정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목민관은 입만 열면 '민생' 운운하면서 뒷구멍으로 망나니짓이나 일삼는 감투가 아님'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이처럼 정약용은  학구적으로 그리고 중앙에서 관념적으로 추구하던 실학정신을 현장에서 행정으로 실행하고자 하였습니다.

정약용은 그의 재임 중 '여덟가지 규정'을 만들어 실행하고, 백성들의 생활향상에 가치를 두었습니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호구를 조사하여 적정한 세금을 내게하고, 죄인들에게 공정한 재판을 통해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했습니다.

구리로 자(尺)를 만들어 관리와 상인들의 협잡을 막고, 농민들이 생산한 쌀 대신 돈으로 세금을 내도록 하는 과정에서 생긴 비리를 막고자 원칙대로 (쌀로 내도록) 집행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크게 줄였습니다.

 

- 정약용의 표준영정(왼쪽)과 윤지충의 초상화. 두 사람은 내외종 사촌지간이었으며 윤지충은 정약용 형제에 의해 천주교를 접했다.-

다산 정약용의 신앙세계

 

다산의 집안은 순교자 가족이라 할 만큼 신자가 많았습니다.

셋째 형 정약종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했고, 둘째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돼 유명한 ‘자산어보’를 썼습니다.

다산 자신도 천주교를 믿었다는 죄목으로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가 ‘목민심서’ ‘경세유표’를 비롯한 불후의 저서들을 썼씁니다.

하지만 다산은 한때 천주교를 믿었으나 결국 받아들이지 않은 배교자(背敎者)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엔 ‘천주교에 학문적 관심을 가졌을 뿐 교회 내에서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서술이 나오는 등, 애초에 천주교 신자는 아니었던 것처럼 인식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산 연구자 중 한 명이며 조선 후기의 바다와도 같은 고전과 문집 속 문장을 발굴·재해석해 온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의 생각은 좀 다릅니다.

정 교수는 최근 출간한 900여 쪽 분량의 연구서 ‘서학(西學), 조선을 관통하다’에서 이 같은 주장을 했습니다. “다산은 천주교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며, 천주교와 관계를 끊었다고 알려진 뒤에도 100% 배교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정 교수는 천주교사 연구를 하게 된 계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로 강진 시절의 다산이 남긴 글을 보다가 젊은 시절로 올라가 보니, 천주교를 빼놓고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더라고요.”

그러나 ‘다산의 천주교’는 국학과 천주교 양쪽에서 사각지대였습니다.

국학 연구자 쪽에선 순수성이 훼손된다는 듯 천주교 얘기만 해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고, 천주교 쪽에선 이미 배교한 사람인데 무슨 얘기할 게 있느냐는 반응이었습니다.

하지만 청년기의 다산을 다룬 책 ‘파란’(2019)을 쓰다 보니 “다산의 천주교 관련 기록이 파도 파도 고구마 줄기처럼 계속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18년간의 유배기간을 자신의 학문을 연마하는 계기로 삼아 육경사서에 대한 연구와 일표이서 즉,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의 경세론 등 500여 권의 대저술을 남겼습니다.

정조는 결국 상황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를 황해도 곡산부사로 내보냈습니다.

좌천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지만 정약용은 목민관으로서 직접 피폐한 민생을 구제하고 누적된 폐단을 바로잡는 행정을 펼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는 이 시기에 민생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두 가지 저술을 하였는데 천연두 치료법을 소개한 『마과회통(麻科會通)』과 농업발전을 위한 상소문 「응지논농정소應旨論農政疏)」입니다.

곡산부사로서 약 2년간의 외직을 마친 후 1799년(정조 23, 38세) 형조참의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1800년(정조 24, 39세) 또다시 천주교 연관 문제로 공격을 당한 후 형조참의를 사직하고 낙향하였습니다.

사직소(辭職疏)에서 그는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쏟아진 비방에 얼마나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했는지를 격정적으로 토로하고 있습니다.

1818년(순조 18)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약 18년간의 길고긴 강진유배기는 그의 생애에서 참담한 시절임에는 틀림없지만 동시에 이른바 ‘다산학’이라고 이름할 만한 대저술이 만들어지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정조가 재차 부르기도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조는 세상을 뜨고 말았고 정약용의 관직생활도 여기서 끝났습니다.

이후 그는 고향집에 ‘여유당(與猶堂)’ 이란 이름을 붙이고 조심조심 살아가고자 했으며 아들들에게도 말과 행동을 의심받지 않도록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짐이 무색하게도 그는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대대적으로 천주교도들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연루되어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백서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강진에 유배되었습니다.

 

조선인 신부(神父)가 없던 시절, 조선에 입국한 첫 외국인 신부는 청나라 강소성 출신 주문모(1752~1801)였습니다.

1795년(정조 18년) 한양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체포될 뻔했습니다.

한영익이라는 배교자가 밀고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문모 신부는 추격을 피해 달아나 그 뒤로 6년 동안 전교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 주문모 신부가 1795년  봄 서울에서 첫번째 부활 미사를 집전하는 장면을 인형으로 재현한 작품 -. -

주문모 신부(神父)가 그때 어떻게 체포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기존 역사에선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습니다.

한양의 천주교인들이 주문모 신부를 초빙한 곳은 계산동(지금의 종로구 계동)에 있던 교인 최인길의 집이었습니다.

임금이 있는 창덕궁에서 불과 1㎞ 남짓 떨어진 곳에서 미사를 드리고 고해성사를 받았던 것입니다.

1795년 6월 27일, 교인인 누이동생에게서 소식을 듣고 계산동을 찾아 주문모 신부를 만난 진사 한영익은 죄를 뉘우치고 교리문답을 받던 중 최인길 등에게 신부의 입국 경로를 자세히 물어봤습니다.

한영익은 그 길로 왕의 친위 조직인 별군청 관리였던 이석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고, 이석은 영의정 채제공에게 보고했습니다.

놀란 채제공은 정조 임금에게 뛰어가 직보했습니다.

왕은 포도대장 조규진을 불렀습니다.

“좌의정의 지시를 받아 은밀히 주문모를 체포해 오라!”

그러나 포도대장이 계산동 천주교당을 덮쳤을 때 이미 신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역관 집안 출신 최인길이 중국말을 하면서 주문모 신부인 척 시간을 끄는 동안 진짜 신부는 멀리 달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누군가 계산동을 찾아 한영익의 밀고 사실을 알려 주고 주문모 신부를 황급히 피신시켰던 것입니다.

그게 과연 누구였을까요.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단서는 참으로 뜻밖의 자료에서 불쑥 나오게 됩니다.

최근에야 번역돼 그 내용이 세상에 알려진 천주교 문서가 있었습니다.

주문모 피신 사건으로부터 2년이 지난 1797년, 북경의 고베야 주교가 사천의 대리 감목 디디에 주교에게 보낸 라틴어 편지 속에 이런 얘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한영익)이 조선 대신들에게 밀고하는 자리에 어떤 무관(武官) 한 사람이 같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한때 천주교 신자였다가 배교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무관은 배교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는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천주교 신자들은 이 무관에게 신부님이 오셨다는 사실을 전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그 사람이 그런 사실을 누설하지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관은 앞에서 이야기한 또 다른 배교자가 고발하는 모든 사실을 듣고는,

곧장 신부님이 머물고 계시다고 일러준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고는 신부님이 고발당하였기 때문에 신부님과 천주교회에 위험이 닥쳤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는 신부님에게 한시라도 빨리 그 집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나서

자기가 신부님을 다른 곳으로 모시고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윤민구 역주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신부를 모셔오기 위해 지난 몇 년 동안 조선 교회가 들였던 피눈물 나는 노력이 일시에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절체절명의 위기가 이 ‘무관’ 한 사람의 중거리 질주로 극복됐다는 것입니다.

이 무관은 누구였을까요?

분명 그 시각 창덕궁에 있었으면서 한영익의 밀고를 인지했을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훗날 스스로 쓴 묘지명에 이런 사실을 기록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가 변복하고 몰래 들어와 북산(북악산) 아래에 숨어서 서교(西敎)를 널리 폈다. 진사 한영익이 이를 알고 이석에게 고했는데, 나 또한 이를 들었다(오역문지·吾亦聞之).”

한영익이 창덕궁 내 별군청에서 이석에게 주문모 신부 관련 사실을 밀고할 때 바로 그 자리에 있던 ‘무관’이 바로 이 사람이었습니다. ‘나 또한 이를 들었다’고만 적었을 뿐 시침 뚝 떼고 있었지만 사실은 무관복을 펄럭이며 왕복 2㎞를 전력질주하고 난 뒤 궁궐 구석에서 몰래 숨을 고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고베야 주교의 편지에서처럼 배교자였습니다.

정리하면, (1)과거 천주교 신자였으면서 (2)창덕궁의 밀고 현장에 함께 있었던 (3)무관은, 이 사람 단 한 명 밖에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 사람의 이복동생은 한영익을 계산동으로 이끈 천주교 신자 누이동생과 결혼하게 됩니다.

모든 자료가 주문모 신부를 탈출시킨 사람이 ‘그 무관’이었다고 지목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 무관은 누구였을까요?

다산 정약용이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우부승지였던 다산은 서학 문제로 비방을 받아 체직(벼슬이 바뀜)됐고, 부사직 신분으로 규장각에서 ‘화성정리통고’의 교정 작업을 맡고 있었습니다.

정조 임금 입장에서 급여는 줘야 하겠기에 임시로 내린 부사직이 바로 중앙 군사조직인 오위(五衛)의 무관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잠시 동안 명목상의 무관으로서 무관 옷을 입고 궐내에서 근무하고 있었을 때 이런 사건이 터졌던 것입니다.

이후 신하들이 도대체 어떻게 주문모가 피신했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하자 정조 임금은 지나가는 말처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건 정약용이 알 것이다.”

임금도 사태의 내막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쯤해서 사건을 덮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다산 정약용은 조상 제사를 거부할 수 없다며 배교한 뒤에도 신앙을 완전히 놓지 않았습니다.

다산은 이성적으로는 더 이상 천주교를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지만 마음 속에서는 신앙을 차마 저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고베야 신부가 편지에서 쓴 ‘무관이 죄를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받으려 했다’는 것은 다산의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었습니다.

그래서 33세의 젊은 다산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한영익의 밀고를 듣자마자 자신의 안위 따위는 돌아볼 새조차 없이 목숨을 걸고 2㎞ 전력질주를 감행했던 것입니다.  평안!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을 것이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 느혜미야 1장111절 -

거기 누구 '정약용' 같은 사람 없소?!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장2839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