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을 내세요! 당신은 얼마든지 새 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 <호손>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매사에 정직 성실하였습니다.
그는 감수성이 특히 예민하여 작은 일에도 늘 다정다감한 반응을 보이는 마음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웃에 사는 사람들은 그가 남자로서 너무 소심하고 유약하다고 수근거렸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
그를 지극히 사랑하는 그의 부인은 남편 <호손>을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유능한 남자로 존경했습니다.
호손의 직업은 세관의 관리로서 샐러리맨이었습니다.
그는 맡은 바 직분에 늘 충직하게 일하면서 퇴근 후 밤에는 독서와 글공부를 하는 것이 유일한 취미이자 낙이었습니다.
호손의 부인도 남편이 어차피 활동적, 사교적인 인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호손 일가에게 뜻밖의 불행이 닥쳤습니다.
별로 크게 잘못한 일도 없는데, 상사와의 사소한 갈등으로 그만 직장인 세관에서 면직되었습니다.
호손은 월급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생활을 하다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집에 돌아와 부인에게 사실을 고했습니다.
남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내는 살아갈 앞날이 캄캄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절망에 빠져 있는 남편을 그냥 놓아두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위로했습니다.
간절한 사랑의 눈빛으로 남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여보, 너무 잘된 일이에요.
이제야말로 하나님이 당신에게 마음 놓고 집에서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계신 거예요.
자, 힘을 내세요. 당신은 얼마든지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훌륭한 남자라구요."
그러면서 아내는 한 뭉치의 원고지와 펜을 남편의 무릎 위에 갖다 놓았습니다.
아내의 위로와 격려에 용기를 얻은 호손은 결연한 표정으로 아내의 손을 꼭 쥐었습니다.
"여보! 고마워. 사실은 벌써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몰래 익혀 두었던 작품의 소재가 있었어."
호손은 이튿날부터 직장으로 출근하는 대신, 서재의 책상 앞에 앉아 열심히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심혈을 기울인 집필은 오래도록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마침내 작품을 탈고시켰습니다.
작품의 제목은 《주
홍글씨》였습니다.
<주홍글씨>는 19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등장을 뜻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역경에 처했을 때 위로와 용기를 북돋워 주는 사랑이야말로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개척하게 하는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불행스러운 현실을 위로해 주는 사람입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사람은 이웃의 마음속에 위로로 용기를 주는 사람입니다.
절망을 주면 죽음을 주지만 용기를 주면 삶을 줍니다.
절망을 주면 불행을 주지만 용기를 주면 행복을 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위로를 주는 사람입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포르티스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 고린도후서 1장 3~6절 -
<위로(慰勞)>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영어로 ‘위로’라는 단어는 '컴퍼트, comfort'입니다.
이 단어는 라틴어에서 파생된 용어로 강조적인 의미의 컴(com)과 '힘, ' 또는 '능력'이라는 단어인 포르티스(fortis)의 합성어입니다.
“위로자, 컴퍼터(comforter)”는 슬픔과 괴로움에서 위로와 위안, 그리고 동정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낱말은 용감함, 강함, 그리고 용기를 의미하는 라틴어 “포르티스 fortis”와 훨씬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단어는 의미에서 동정심과 위안를 주는 것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단어는 우리가 직면한 삶의 위기에서 의기양양하게 대처하여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능력과 용기의 영으로 충만히 채워줍니다.
그래서 '위로'라는 ' 컴퍼트, comfort'는 ‘함께 있으면서 힘이 되어준다’는 뜻입니다.
<위로>는 헬라어로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라고 합니다.
“간청하다, 간구하다, 청하다, 위로를 받다, 애걸하다, 빌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제자들과 작별하시면서 한 설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7절)라고 말씀하십니다.
보혜사(保惠師)는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보혜사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ετος)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 '곁에 오셔서 위로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위로자(Comforter)라고도 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3절에는 하나님을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4절에는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 합니다.
여기 나오는 표현은 참 흥미롭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동시에 '자비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러한 바울의 설명은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시지만 자비로운 아버지도 되신다고 하심으로 절대적인 초월자이며 능력자이신 하나님을 아주 친밀한 관계인 아버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라는 개념은 친밀하고 가까이 계시는 분으로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하나님을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
바울이 하나님을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상황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든든한 빽이 되어주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친구나 친척이나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병들거나 사회적으로 능력이 없으면 무시하고 그 곁을 하나씩 떠납니다.
가장 힘들어 할 때 힘이 되어 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위로는커녕 더 큰 낙심을 주기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위로’라는 헬라어 말 그대로 곁에서 말해주는 분이십니다.
말을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실제적으로 힘이 되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위로하셨을까요?
4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바울은 위로의 하나님께서 ‘모든 환란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셨다’고 합니다.
바울이 환란을 당하였다는 것은 추상적이거나 막연한 개념이 아닙니다.
이 본문에서는 어떤 환란인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고 있지만 그는 많은 고통을 경험하였습니다.
바울은 당대에 로마가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태어날 때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최고의 학문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아주 중요한 사회적 지위였던 바리새인이기도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특권을 통하여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복음 때문에 많은 환란을 받았습니다.
그 환란과 고통의 내용을 이 편지의 뒷부분인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린도후서 11장24~27절)
이 뿐만 아니라 바울은 불치의 병도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그것은 눈병으로 보기도하고, 간질로 보기도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일로 인하여 세 번이나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내가 받은 엄청난 계시들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과대평가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으로 나를 치셔서 나로 하여금 교만해지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것을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12장7~8절, 새번역)
'모든 위로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에게 태어날 아기 예수의 이름이 ‘임마누엘 (Immanuel)’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복음1장23절)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God is with us)”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이 말을 생각만 해도 마음에 흥분과 감동이 일어납니다.
영국에 ‘존 웨슬리 (John Wesley, 1703-1791)’라는 성공회 (Anglican Church, 영국 국교회)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나중에 이분이 감리교회를 창시하였습니다.
감리교회는 영국에서 탄생했지만, 미국으로 건너와서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종교개혁 시대에 웨슬리 덕분에 영국 교회와 영국 사회가 성공적으로 개혁을 이룰 수 있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존 웨슬리가 마지막 임종을 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The best thing of all is God is with us (무엇보다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배경을 알고 계시나요?
성서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이 서기 60-70년 경으로 보기도 하고, 이보다 늦게 서기 90년대로 보기도 합니다.
기록 연대를 서기 60-70년으로 보는 것은 네로 황제가 기독교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서기 64년에 ‘로마의 화재’가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 네로는 그 책임을 크리스천들에게 돌리면서 크리스천들을 박해했습니다.
또 기록 연대를 90년대로 보는 것은 그 때가 로마 황제를 신격화하고 이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박해했던 때이기 때문입니다.
기록 연대를 어느 때로 보든지 요한계시록은 박해받는 크리스천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요한계시록 7장17절)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장3-4절)
1세기에 살았던 크리스천들이 모진 박해를 견뎌내면서 얼마나 이 성경 말씀에서 위로를 받았겠습니까?
요한계시록은 이런 기도로 끝이 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20)
이 말은 아람어로 ‘마라나타(מרנא תא, maranâ thâ)’입니다.
로마의 지배아래 있던 초기 크리스천들은 서로 인사할 때 아람어로 ‘마라나타’라고 했습니다.
그 의미는 ‘주님이 오고 계십니다’ 혹은 ‘주님, 오십시오’라는 뜻입니다.
이 인사가 박해 시대에 살던 크리스천들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마라타나!”는 “평화”를 뜻하는 “샬롬” 대신 억압받는 믿는 자들 간에 일상적인 인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이미 경고를 하셨기 때문에 평화는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돌아오셔서 주님의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진리로부터 큰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주께서 오실 것이라는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요한계시록22장12절)
‘모든 위로의 하나님’은 우리의 짐을 덜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안식 (rest)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 마태복음11장28∼30절 -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받는 고통을 함께 받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성경에 많이 나오는 ‘긍휼’이라는 단어가 바로 우리와 같이 고난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영어로는 ‘컴패션, compassion’입니다.
'같이 고난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이 겪는 모든 고난을 같이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긍휼의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몸소 체험하시고 우리를 돕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돕도록 하나님께서 세우신 분입니다.
미국 테네시 주의 한 작은 마을에, 벤 후퍼라는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체구가 몹시 작고,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생아였습니다.
마을의 어른들은 자기 자녀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벤 후퍼와 함께 노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친구들도 그를 놀리며 멸시하였습니다.
벤 후퍼가 12살이 되었을 때 마을의 교회에 젊은 목사님이 부임해 오셨습니다.
벤 후퍼는 그때까지 교회에 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젊은 목사님이 가는 곳마다 분위기가 밝아지고 사람들이 격려를 받는다는 소문을 듣고 교회에 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배 시간에 좀 늦게 예배당에 들어가 맨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축도 시간이 되면 아무도 모르게 살짝 빠져 나오곤 했습니다.
몇 주가 지난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벤 후퍼는 목사님의 설교에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잠시 감동에 젖어 있는 사이에 예배가 끝나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벤 후퍼도 사람들 틈에 끼어 나오면서 목사님과 악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벤 후퍼를 보고, “네가 누구 아들이더라?” 하고 말했습니다.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환한 얼굴로 벤 후퍼에게 말했습니다.
“그래, 네가 누구 아들인지 알겠다. 너는 네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어!”
목사님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네 모습을 보면 알 수 있거든!”
당황하여 빠져 나가는 벤 후퍼의 등을 향해서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답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월이 흘러 벤 후퍼는 주지사가 되었습니다.
주지사 벤 후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을 만나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던 그날이 바로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태어난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은 '서로 위로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로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자신도 위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환난에 직면해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나 오뚝이처럼 제기하였다면 이제 이웃을 위로해줄 차례입니다.
우리는 상처받은 사람들을 건강하게 치유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싸매어 주도록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힘든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서로 위로하며 용기를 주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분의 자녀들이며 제자들입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