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107)-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로마서 강해(107)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 로마서 12장 18~21절 -
어느 동네에 두 집이 이웃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집은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대가족이었고, 한 집은 젊은 부부만 사는 단란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대가족을 이룬 가정은 항상 화목하여 웃음꽃이 피었는데, 부부만 사는 가정은 항상 부부싸움이 잦았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이웃집의 화목한 모습을 보고 크나큰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우리는 둘만 사는데도 매일 싸워야 하고, 이웃집은 여럿이 함께 모여 사는데도 저토록 화목한 것일까? 그래서 어느 날 젊은 부부는 과일 한 상자를 사 들고 이웃집을 찾아갔다. 다과를 나누며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댁의 가정은 대가족인데도 웃음이 떠날 줄 모르고 우리는 둘이 사는데도 매일 싸움만 하는데, 선생님 댁이 그렇게 화목하게 지내시는 비결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이웃집 주인은 대답했습니다. "아. 네! 그것은 당신네 두 분은 모두 훌륭하시고, 우리 가족은 모두 바보들이기 때문이죠!" 그 말을 들은 젊은 부부는 되물었습니다. "아니 그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그러자 그 집 주인은 말하기를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입니다. 내가 출근하다가 물을 엎질렀습니다. 그때 나는 내 아내에게 내 부주의로 물을 엎질러 미안하다고 하며 용서를 청했지요. 그랬더니 내 아내는 '아니오' 하면서 생각이 모자라 물그릇을 그곳에 놓아두었으니 자신의 잘못이라고 하며, 오히려 나에게 용서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옆에 계시던 저의 어머니께서는 '아니다, 나잇살이나 먹은 내가 그것을 보고도 그대로 두었으니 내가 잘못이다.' 하셨습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위해 바보가 되려고 하니 싸움을 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젊은부부는 이웃집의 그런 이야기를 듣고 크게 깨달아 화목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화목보다 분노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화해(和解)를 말하고 화목和睦)을 말하면 사회적 약자로 생각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어느 모임이나 화해를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고 보복을 말하고 큰소리를 치는 사람들이 모임을 이끌어갑니다.
인간 관계 안에서 갈등과 대립, 분열이 일어나는 원인은 죄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평화보다 불화가 쉽습니다.
그래서 지구촌 곳곳에서 분쟁과 전쟁이 끝도 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꼭 가인의 후손 라멕이 지배하던 세상과 같습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의 후손 라멕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라멕은 자기의 잘못을 범하고도 오히려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여 사람을 죽였습니다.
자신이 상처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살해합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창세기 4장23절)
라멕은 자신의 이러한 복수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정당화하고 영웅시하였습니다.
라멕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분노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정당화하고 영웅시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화해하고 화목하는 것보다 분을 내고 분열을 일삼고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안겨준 사람들에 대하여 복수를 하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라!'는 것은 최대한 관용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로마서 12장18절)」
‘모든 사람과 더불어’라고 할 때 이것은 우리의 인간성에 기초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능력 안에서, 복음의 삶이 얼마나 거대한 포용력을 가지는가를 말합니다.
복음은 경계선이 없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형제, 자매는 물론이고 원수까지도, 나를 핍박하는 자에게도 사랑을 베풀고 축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진리에 대해서는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불법을 행하고, 거짓을 행하는 사람과 손을 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불의에 대해서는 맞서야 하고, 진리에 대해서는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비진리에 대해서 관용하거나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이단에 대해서도 과감하고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진리를 주장하는 우리의 태도가 투쟁적인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끔 교회 안에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세상과 비슷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모습을 볼 수가 있을까요?
목적이 좋으면 과정도 좋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성품을 드러내야 합니다.
아무리 중요한 것을 주장하더라도 마귀의 모습을 연상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화평을 이루는 사람들은 관용적이어야 합니다.
신자의 모습이 너무 완고하거나 조금도 융통성이 없는 경직된 사람으로 보여서는 안 됩니다.
웬만한 것은 양보하고 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앗시시의 성 프랜시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가장 근접했던 사람으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와 관련된 감동적인 이야기들도 많아서 듣는 이들로 하여금 고개가 수그러지게 합니다.
프랜시스와 그의 제자들은 산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소년이 혼자 남아 집을 지키는데 악명 높은 산적 셋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의 방문 목적에 대해서는 물어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도적은 도적질하고자 하는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이 소년은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용기를 다하여 큰소리로 호통을 쳤습니다.
“남들은 땀 흘려 일하는데 너희들은 남의 것을 훔쳐 먹으려는 것이냐!”
도적들은 마음이 찔렸는지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선생님이 돌아오시자 이 소년은 자랑스러운 듯이 있었던 일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프랜시스가 섭섭한 투로 말했습니다.
“그건 네가 실수했다. 지금 곧 도적들에게 가서 이 빵과 포도즙을 주고 오너라.”
소년은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들을 바로 쫓아가서 빵과 포도즙이 든 선물을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산적들은 그것을 먹지 않고 소년을 따라 수도원으로 왔으며, 회개하고 프랜시스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현대는 자신의 이익을 주장하지 못하면 무능하게 생각되고, 발 빠르게 자기 잇속을 차리면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습니다.
그래서 작은 자동차접촉 사고에도 분을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러 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으로 거듭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와 관용을 베풀수 있어야 합니다.
관용과 용서는 사람의 영혼을 움직입니다.
우리는 우리 입과 논리로 싸워서 얼마든지 이길 수 있지만, 이기는 것이 이기는 것일까요?
언제나 내가 이겨야 한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다면, 주변에 사람들이 없습니다.
나만 옳고 잘났다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우리의 판단이나 생각이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양보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의 언어는 허약하고 반론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나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기 보다는 상대의 말에 좀더 귀를 기울이고자 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화평을 이루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관용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경험으로 됩니다.
십자가는 날마다 자아가 죽는 경험입니다.
내가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내가 날마다 지는 것입니다.
내가 날마다 손해 보는 것입니다.
한 마을에 이웃한 두 집이 있었습니다.
한 집은 넓은 초원에 많은 염소를 키우고 있었고
그 옆집에는 사냥꾼이 살았는데 아주 사나운 개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이 사냥개는 종종 집 울타리를 넘어 염소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염소 주인은 사냥꾼에게 개들을 우리에 가둬달라고 여러 번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사냥꾼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습니다.
오히려 속으로 화를 내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우리 집 마당에서 개를 키우는데 무슨 상관 이야'
며칠 후
사냥꾼의 개는 또 농장의 울타리를 뛰었고,
염소 몇 마리를 물어 죽이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염소 주인은 더는 참지 못하고 마을의 치안판사에게 달려갔습니다.
염소 주인의 사연을 들은 판사가 말했습니다.
''사냥꾼을 처벌할 수도 있고, 또 사냥꾼에게 개를 가두도록 명령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 판사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친구를 잃고 적을 한 명 얻게 될 겁니다.
적과 이웃이 되고 싶으신가요? 아니면 친구와 이웃이 되고 싶으신가요?''
염소 주인은 ''당연히 친구와 이웃이 되고 싶죠''라고 답했습니다.
판사가 염소 주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며 말했습니다.
''잘됐군요. 한 가지 방법을 알려드릴 테니 그렇게 해보시죠.
그럼 당신의 염소도 안전하고 좋은 이웃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판사에게 방법을 전해들은 염소 주인은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 라고 웃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염소 주인은 가장 사랑스러운 새끼 염소 3마리를 골라 이웃집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이웃의 어린 세 아들에게 염소를 선물했습니다.
사냥꾼의 세 아들은 염소를 보자마자 푹 빠졌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매일 염소들과 놀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들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사냥꾼의 마음도 행복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마당의 개가 염소를 물어서 해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냥꾼은 개를 큰 우리에 가뒀습니다.
염소 주인도 그제야 안심을 했습니다.
사냥꾼은 염소 주인의 친절함에 보답하려고 사냥한 것들을 그와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염소 주인은 사냥꾼에게 염소 우유와 치즈를 보답으로 주었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은 가장 좋은 이웃이자 친구로 지냈습니다.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기대와 달리 더 많은 것을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염소 주인이 이웃을 벌하려고만 했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가장 가까이 살지만 먼 이웃이 되지 않았을까요?
그동안 서로 인사도 하지않고 지내는 이웃이 있다면 먼저 자그마한 선물이라도 마음을 담아 전달해 봄이 어떨까요?
먼저 손 내미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먼저 마음을 여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손해는 결코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경험한 사람들의 특징은 온유함입니다.
사나운 사람이 부드러워집니다.
반면 논쟁을 잘하고 투쟁을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걸고 싸운다고 하는데 그 모습이 왠지 평화롭지가 않습니다.
그가 십자가를 진다고 해서 그 일이 정당화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의 중심은 십자가이어야 합니다.
항상 사람들과 대립하고, 고집이 세고, 질 줄 모르고, 거침없이 이겨야만 하는 삶은 복음적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자는 뿔이 나면 안 됩니다.
복음은 우리를 부드러워지게 하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품는 자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연륜이 깊어갈수록 넉넉해져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가서 넓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안에서 나이가 들어갈 때 넓어져갑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 마태복음 18장 21〜22절 -
예수님께서는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실수를 오래 기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어떤 사람이라도 화목하라'는 말씀은 어떤 경우에도 사람들과 원수를 맺지 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은 원수까지라도 사랑을 베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관계에서 매우 적극적인 교훈입니다.
복음적 삶이란 인간관계에서 매우 적극적입니다.
악연이 되면 관계가 뒤틀리고 원수가 되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이나 할 수 있는 행동을 다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은 좁고 인생은 생각보다 깁니다.
내가 원수를 맺어서 끝내고 싶다고 할 것, 못할 것 다하고 모든 것을 쏟아내지만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시 만날지 모릅니다.
인간관계란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연결됩니다.
묘한 것이 인생입니다.
지금은 원수이고 지금은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살다 보면 갑과 을도 수없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결론 내리지 마십시오.
인생이란 우리 생각과 다르게 얽히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원수가 내일 내 삶에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원수가 내뱉은 한마디가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줄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 성경은 '할 수 있거든 화목하라'고 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더불어 화목해야 하겠지만, 상황이 허락하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화목을 위해 노력하지만, 종종 우리의 노력만 가지고는 화목이 불가능할 때도 있습니다.
화목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계가 있지만 너무 쉽게 포기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 끝내고 싶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듣는 얘기는 “그냥 끝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한번 더 생각해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하신 가운데 중요한 것은 화목의 사역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여 화목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자유스럽게 나아가게 길을 터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가지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화해의 직분”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 고린도후서 5장 17〜18절 -
우리가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를 화해하게 되었으면 이제는 수평적으로 화해를 이루는 사역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고 직분입니다.
생각하면 최고의 직분이고 영광의 직분입니다.
이 세상에 보면 중재자라는 역할이 있는데 이 중재자들은 대부분 중요한 위치에 있거나 역량이 있는 분들입니다.
그리고 이 중재자라는 자리는 존경받는 자리이고 인정받는 사람이고 하면 할수록 영광을 받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 특별하고 귀한 중재자의 직분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너무 쉽게 빨리 결론을 내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누군가를 성급히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살이에 쉬운 관계는 하나도 없습니다.
때로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고, 고통이 지속되어 기다릴 수 없을 만큼 힘들어질 때도 있습니다.
나는 싸우기를 원하지 않지만 상대가 싸움을 걸어올 때도 있고 내가 화목하고자 하는 것을 악용 당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화목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길이 보이지 않고 가능성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해도 그것을 붙잡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해야 합니다.
화목이야 말로 우리가 어떤 희생을 해서라도 얻을 만한 값진 것입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