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105)-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가족사랑 2022. 3. 19. 07:23

로마서 강해(105)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

- 로마서 12장 14〜17절 -

 

복수는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감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누구라도 억울한 피해를 당하면 그 피해를 되갚아 주고 싶은 마음이 일게 마련입니다.

인간은 복수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한 대를 맞으면 열 대를 되돌려 주어도 마음이 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수는 증폭되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복수로 얼룩져 있습니다.

인간의 그 마음이 각종 첨단무기와 핵무기로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방식과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방식과 정반대여야 합니다.

세상의 방식이 복수라면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악을 선으로 갚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복수라는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갚는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짐 해논이 감독한 영화 ‘창끝’(End of the Spear)은 원시 부족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준 미국 선교사들의 죽음과 그 가족의 선교에 관한 눈물겨운 실화입니다.

이 영화는 1956년 짐 엘리엇(28세)을 비롯해, 네이트 세인트(32세), 피트 플레밍(27세), 에드 맥컬지(28세), 로저 유데리안(31세) 등 휘튼 칼리지를 졸업한 다섯 명의 젊은 선교사들이 에콰도르 정글 속 ‘아우카’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다가 그들이 던진 창에 찔려 순교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2006년에 순교자의 아들 스티브 세인트가 쓴 책 『End of the Spear(2005)』를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창끝-2006년에 순교자의 아들 스티브 세인트가 쓴 책 『End of the Spear(2005)』를 영화로 만들었다. 

 

1956년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명문 휘튼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짐 엘리엇을 비롯한 5명의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남미 에콰도르의 와오다니(아우카)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들어간 뒤 실종되었습니다.
다섯 명의 젊은 선교사들이 아내를 집에 남겨둔 채, 경비행기를 타고 에콰도르의 아우카 인디언 마을로 떠납니다.

피트는 신혼여행도 포기하고 선교 여행에 동참합니다.

그들은 음식과 의약품 등을 정성껏 담은 바구니를 먼저 내려 보냅니다.

인디언들을 만나면 그들의 언어로 ‘나는 당신의 친구입니다’라고 말할 준비도 합니다.

그러나 모래사장에 그들이 도착했을 때, 곤경에 처해 있던 한 인디언이 “이방인들이 부족 여자 한 명을 납치, 살해했다”고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다섯 명의 선교사들은 해변에서 무참하게 창에 찔려 죽습니다.
1956년 1월 8일, 피트 선교사는 아내에게 긴급 무전을 칩니다.

“흥분한 인디언들이 몰려오고 있어. 기도해 줘.”

그리고 연락이 끊기고 맙니다.

이튿날 수색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다섯 명의 선교사들은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습니다. 

 

아우카족은 그 당시까지 접촉해서 살아남은 백인이 한 사람도 없을 정도로 사나운 부족이었습니다.

엘리엇과 친구들은 영혼 구원이라는 한 가지 목적으로 아우카족 선교를 계획하고 실행했습니다.

이들은 에콰도르의 전진기지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아우카족이 살고 있는 정글 속으로 들어가 바구니에 성경책과 선물을 담아 내려줬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 엘리엇 등은 아우카족 마을에 근접한 강가 모래톱에 비행기를 착륙시켰습니다.

그리고 아우카족 마을을 향해 떠났습니다.

이후 소식이 끊겼습니다.

가족들은 이들의 무사 귀환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청년 선교사들의 실종 소식은 미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대대적인 수색작업이 벌어졌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엘리엇과 친구들은 모두 아우카족의 창에 찔려 살해됐습니다.

경비행기는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끔찍한 비극이었습니다.

미국 전역이 들끓었습니다.

언론에서는 ‘이 무슨 낭비인가(What a waist!)’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습니다.

전도유망한 청년들이 너무나 허망한 죽음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2년 반이 지난 후 짐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와 그의 딸 발레리, 네이트 세인트의 누이 레이첼은 아우카 부족을 찾아갔습니다.

젊은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기도 전에 순교했으나,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사랑의 의술을 베풀며, 용서하는 법을 알려 주기 위해 여인들은 부족과 이웃한 지역에 머물렀습니다.
어느 날 추장 민카야니가 엘리자베스를 찾아와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도대체 우리를 위해 이토록 애쓰며 수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5년 전에 당신들이 죽인 남자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여기에 왔습니다.”

여인의 이 말에  추장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습니다.

부족 마을에 들어와 함께 살자고 여인들을 초청하고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짐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와 그의 딸 발레리

훗날 민카야니 추장은 빌리 그래함 전도 집회에서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우리들은 그분들에게서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젊은 선교사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예수를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들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들은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그분들처럼 살기를 원합니다.”

다섯 명의 선교사들이 피살된 지 36년이 지난 1992년 6월 11일, 와오다니 우림 지역의 외딴 마을 티네노네에서 감격적인 신약성경 봉헌예배가 드려졌습니다.

75명의 와오다니 인디언 기독교인과 여러 명의 성경 번역 선교사들이 참석한 신약성경 봉헌예배에서 와오다니어로 번역된 신약성경을 와오다니 기독교 지도자가 천천히 읽어 내려갔습니다.

선교사들을 살해했던 다섯 명의 인디언들도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이들 가운데 4명이 목사가 되었으며, 다른 한 명은 ‘아우카’에서 ‘와오다니’로 이름을 바꾼 부족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 마을은 ‘복음의 땅’으로 변했습니다.

1천 명의 마을 주민들 모두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짐 엘리엇과 동료들이 살해당한 지 수십 년이 지난 후 그들이 전도하려고 했던 부족 안에 수백 개의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영화 "창끝"에서, 민카야니 추장은 부족과 함께 살다가 죽은 고모 레이첼의 장례식에 참석한 네이트 세인트의 아들 스티브를 살해 현장으로 데려갑니다.

스티브에게 창을 건네며 스티브의 아버지를 죽인 자기를 죽여 달라고 간청합니다.

하지만 스티브는 거절합니다.

“아무도 아버지의 목숨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자신이 내어준 것입니다. 우리의 목숨도 아버지처럼 늘 ‘창끝’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라고 스티브는 고백합니다.


"누구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며"


이 문장에서 단어들의 순서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첫 구절을 직역하면 '누구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며'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2장 6절에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에서 하나님은 각 사람이 행한 일에 대해 공의로 갚으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갚아 주시므로 우리 스스로 원수를 갚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아십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뿐 아니라 마음 깊이 감추어진 동기까지 아십니다.

그분이 우리 각자 행한 대로 보응하십니다.

 

이 말씀은 신앙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몰라도 그분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아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대로 보응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기꺼이 진리의 삶과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되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얄팍한 계산으로 진실을 가리는 사람에게 이 말씀은 가장 두려운 경고가 될 것입니다.

분노는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기에 앞서 자신의 심령을 황폐화시킵니다.

상대방에게 표출하기 전에 분노는 먼저 나 자신의 멘탈을 붕괴시켜 요즘 유행하는 '멘붕'으로 만듭니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죄악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어리석은 파멸로부터 우리의 심령을 보호해 주십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주님의 품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대신 갚아 주시므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이런 명령에 대해 인간적 본성은 즉각 반발합니다.

"하지만 그도 당해야 합니다. 그가 우리에게 한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또는 "그 사람은 우리의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는 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어떤 인간은 너무도 악합니다.

그들이 저지른 범죄는 너무 참혹합니다.

하지만 보복이나 복수는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 모두에게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연관된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것을 이해합니다.

오늘 말씀의 첫머리는 "누구에게도(with no one)"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절대적으로, 예외 없이, 그 누구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누구에게도, 어떤 변명거리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정의로운 보복이 되도록 유의하십시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보복이 전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명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최고조로 발달했던 시기에 유대 율법은 이례적일 정도로 정의로운 법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은 균등한 보응을 요구했습니다.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애굽기 21장 23∼25절).

탈리오 법칙으로 불리는 이 율법은 셈족 사회의 특성이었던 끔직한 보복을 막아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사실 셈족뿐만 아니라 어떤 민족 어떤 사회건 보복과 복수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자에 대한 처벌이 그 범죄의 정도와 같아야 한다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탈리오 법칙을 실천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인간은 결코 받은 만큼 갚는 데 만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창세기 라멕의 노래에서 볼 수 있듯이 타락 이후 인간은 "칠십칠 배"로 되갚아도 분이 안 풀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세기 4장 2324절)

탈리오 법칙은 분노의 사슬을 끊는, 절제를 요구하는 정의로운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탈레오 법칙으로는 분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탈레오의 법칙보다 놀라운 법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 5장38∼48절).

예수님은 인간적 정의의 모든 기준들을 뒤엎으시고 사랑의 법칙을 주창하셨습니다.

당한 이상으로 보복해서는 안 되는 데 머물지 않고 적들을 적극적으로 섬기는 반전의 법칙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래야 보복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은 공평함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고통을 가하든지 사랑과 은혜로 대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이 되어야 합니다.  평안!